12막 2장 - 안식일(1)
12막 악야
2장 안식일
방책을 둘러싼 채 버티고 있는 병사들은 삼각모를 눌러 쓰고 있었다. 진청색 외투 아래로 노란 제복을 받쳐 입은 병사들의 소속을, 이븐은 알지 못했다. 그는 베른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의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었다.
병사 하나가 이븐을 향해 다가왔다.
“이쪽으로는 갈 수 없소.”
“그럼 어느 쪽으로 가면 되겠습니까?”
이븐은 여유를 가장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병사들의 면면과 이들이 차려놓은 간이 검문소를 눈으로 훑었다. 불과 몇 달 전 이븐은 이 근방에서 들개인간들 무리를 죽인 전력이 있었다.
“신분을 밝히시오.”
“피에르벤의 연락원 파트리크 베트샤르트입니다. 귀관의 소속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병사는 고개를 돌려 뒤의 무리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무리들 가운데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질문에 답하지 않고, 병사가 다시 고압적인 태도로 물었다.
“연락원이라면 파발꾼이오?”
“비슷하지.”
“사냥단의?”
“그렇습니다.”
“용무는?”
이븐은 고민하지 않고 매끄러운 음성으로 준비해온 대답을 읊었다.
“헤르돈 대주교이신 히셀 드로크만 각하께 긴히 전할 말씀이 있습니다.”
“내용은?”
“밝힐 수 없습니다.”
이븐에게서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병사는 시선을 옮겨 베른트 쪽을 향했다.
“파발꾼에게도 도제가 있소?”
이븐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베른트를 보며 부디 그가 조금 전의 문답에서 배운 바가 있기를 바랐다. 베른트는 서툴게 거짓말했다.
“헤르돈 대교구 소속······ 빌헬름, 빌헬름 아이힝거요.”
“본인 이름을 말하는 데 꽤 애를 먹는군.”
“그럴 만도 하지.”
이븐이 끼어들었다. 병사가 이븐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짓을 보냈다.
“두개골 서리꾼의 본명을 듣고 공포에 질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이름 밝히기를 망설인대도 그를 탓할 순 없을 겁니다.”
병사의 표정이 괴이해졌다.
“무슨 서리꾼?”
“두개골 서리꾼 혹은 머리 수집가. 뭐라 부르든 헤르돈 대교구의 사냥꾼 빌헬름의 위명을 이루 다 표현하기는 힘들지요.”
이븐의 대답에 병사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고, 무리들 가운데 몇몇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본 적 없다는 몸짓이었다. 이윽고 병사가 던진 질문에서 이븐은 이들의 정체에 대한 자신의 추측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다모크 자한 엽사가 오지 않았소?”
“그 이유를 알려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병사는 몸을 돌려 방책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머리를 한데 모으고 무엇인가를 의논했다. 이븐은 그들의 입에서 인상착의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병사들 사이에 흐르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베른트가 잇새로 쯧 하는 소리를 냈다.
“말에서 내리시오!”
이븐을 검문하던 병사가 방책 옆에서 소리쳤다. 이븐은 진정하라는 뜻으로 고삐 잡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는 오른손을 외투 속으로 천천히 가져갔다.
“손 떼!”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병사들은 이제 머스킷을 들어 이븐과 베른트를 겨냥하고 있었다. 모두 여섯. 이븐은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민한 동작으로 품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는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이걸 보시면 오해가 풀릴 겁니다!”
“구겨서 이쪽으로 던져!”
“중요한 서류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븐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춘 탓에 병사들이 서로 표정을 교환했다. 이븐은 슬금슬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방책까지 열 걸음. 이븐은 인질범을 어르듯 낮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이리로 오셔서 건네받으십시오.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말에서 내리고 서류를 바닥에 내려놔!”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쏘지 마십시오.”
이븐은 뒷굽으로 말의 배를 툭 건드렸다. 이어진 고함에 말이 흥분한 콧김을 푸르르 내뿜었다.
“말에서 내려!”
“쏘지 마십시오.”
이븐은 말의 목을 두드려 진정시키며 앞으로 몰았다. 다섯 걸음.
“말에서 내리고···!”
이븐은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그는 당황한 병사의 목깃을 움켜쥐고 말 위로 끌어 올리면서, 다른 팔로는 고삐를 틀어 말 머리를 돌렸다. 이븐은 ‘중요한 서류’ 따위는 대충 집어던지고 팔꿈치로 병사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병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방책을 치우십시오!”
흥분한 말이 진정할 때까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이븐이 외쳤다. 어느새 꺼내 든 권총으로는 병사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병사들은 머스킷을 겨눈 채로 굳어 있었다. 이븐은 재빨리 권총을 들어 허공에 한 발을 쏘았다.
탕-
“다모크는 내 손에 죽었다! 누가 다음··· 제기랄, 방책이나 좀 치워라!”
식지 않은 총구를 병사의 머리에 다시 대자 머리카락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다. 총성 따위보다, 붙잡힌 인질의 목숨보다, 다모크의 죽음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한 듯 병사들 사이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병사들이 주춤거리며 방책을 열기 시작했다.
“베른··· 빌헬름, 갑시다.”
이븐은 말을 내달려 방책 사이를 통과했다. 베른트가 뒤를 따랐다.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말 뒤로 검문소가 빠르게 지워졌다. 두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이븐의 말이 거친 숨을 헐떡였다. 말의 심장 고동이 다리를 울렸다.
이븐은 말의 속도를 늦추고 의식을 잃은 병사를 풀밭에 내던졌다. 병사의 힘 빠진 몸이 비탈에서 얼마간 구르다 멈췄다. 팔꿈치로 내려쳤을 때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븐은 당면한 일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인질을 잡는 법은 배운 적이 없는데요.”
“앞으로도 배울 일이 없어야 할 겁니다.”
이븐은 다시 박차를 가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베른트가 옆에 붙어 말했다.
“남부 억양을 쓰더군요.”
“제대로 봤습니다.”
베른트가 보여준 의외의 관찰력에 조금은 놀라며, 이븐은 마일스아이렌을 떠올렸다. 사태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고, 쉬어갈 여유는 없었다.
“그보다··· 두개골 서리꾼이라고요?”
맞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이븐은 따라오는 베른트를 향해 답했다.
“왜요, 마음에 안 듭니까?”
*
“제가 가서 얘기해보겠습니다.”
뤼시앵이 플랑베르주를 등에 걸고 말했다. 그는 케넌의 피범벅이 된 외투를 걸치고 있는 교황과 호흡을 고르고 있는 케넌을 번갈아 살핀 뒤 자칭 근위병들을 향해 걸어갔다. 케넌은 모퉁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뤼시앵이 병사들과 대화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뤼시앵이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자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넌이 나이로드에게 상황을 전했다. 나이로드도 뤼시앵의 이토록 자연스러운 대처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엽사들이, 사냥꾼들이 가담했나?”
“에스트룀 부단장 휘하의 사냥꾼 넷이 이 일에 가담한 것 같습니다.”
“어째서?”
케넌은 배신감으로 떨리는 교황의 눈동자를 보았다. 두통이 도지는 것처럼, 나이로드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짓눌렀다. 케넌은 부펜하르크와 동부 국경에 파견할 사냥꾼과 마일스아이렌에 남겨둘 사냥꾼의 목록을 비앙카 에스트룀 부단장이 정하게끔 한 것이 실수였다고 말하는 대신 간단히 대꾸했다.
“제 불찰입니다.”
뤼시앵이 돌아와 평소의 교황 앞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불손하게 고갯짓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가시죠.”
뤼시앵이 앞장서고 케넌이 교황의 옆을 지켰다. 시체에서 벗겨 신은 신발이 커서 나이로드가 걸을 때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케넌이 뤼시앵을 멈춰 세웠다.
“오른편으로. 말을 타야 하네.”
뤼시앵이 방향을 바꿨다. 옆문으로 향하는 복도는 불길할 정도로 고요했다. 개 짖는 소리처럼, 먼 데서 고함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걸음을 재촉하는 케넌에게 떠밀리며 나이로드가 처량하게 말했다.
“난 최선을 다했어. 자네들 사냥꾼이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사냥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걸, 성심과 성의를 다해서······.”
“성하.”
케넌이 나이로드의 말을 끊었다. 그가 나직이 덧붙였다.
“제 고향에선 개가 주인을 물면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미친개는 쳐 죽일 뿐이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나이로드는 앞서가는 뤼시앵의 등에 대고 물었다.
“뤼시앵, 자네는 무엇 때문에 날 돕는가?”
뤼시앵은 조심스럽게 연 문틈으로 밖을 살피다 안전하다는 뜻으로 손짓했다.
“오늘 낮에 에스트룀이 사냥꾼들을 불러 모을 때, 저만 쏙 뺐더군요.”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가로지르며 뤼시앵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뱉었다.
“부단장 놈, 엿이나 먹으라지.”
뤼시앵이 내뱉은 욕지거리의 함의를 깨닫고 나이로드가 물었다.
“그럼 부단장이 자네를 불렀으면 저편에 가담했을 거란 말인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누가 봐도 저쪽이 이기는 편인데.”
나이로드는 입을 다물었다. 케넌이 몸을 기울여 낮은 목소리로 뤼시앵의 동기를 부연했다.
“뤼시앵은 전쟁을 막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성하께서 전쟁 억지를 위해 기울여 오신 노력 또한 알고 있고요.”
성체 보관소를 지나려 할 때 그들은 문을 지키고 선 병사와 맞닥뜨렸다. 병사는 상대에게 횃불과 머스킷 가운데 뭘 겨눠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허둥대다가 횃불 쪽을 선택했다.
“누구요?”
“그러는 그쪽은?”
뤼시앵의 반문에 병사는 익숙한 답변을 읊었다. 아마 그렇게 답하기로 입을 맞추어 둔 모양이었다.
“교황 성하의 충성스러운···”
“근위병이로군. 이쪽은 빌지스 주교님과 그분의 신실한 시종이오.”
“성직자들은 예배당에 모여 있을 텐데.”
“밤눈이 어두워서 헤맸소.”
뤼시앵과의 문답에서 석연찮은 느낌을 받은 것인지 병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횃불 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케넌과 나이로드를 불빛으로 비추어 보았다.
“잠깐, 당신들은···”
검광이 횃불을 반사해 번득이고 뿌려진 피가 불길에 닿아 증발했다. 뤼시앵은 쓰러지는 병사의 몸을 한 손으로 받아 바닥에 눕혔다. 그는 허공에 검을 내리쳐 피를 털었다. 쓰러진 병사의 목에서 자기 피에 질식해 죽는 이의 애처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뤼시앵이 성체 보관소의 문을 열며 말했다.
“성호 그으실 필요 없습니다. 교황은 무오류의 존재 아닙니까?”
그의 말은 잔뜩 심란해져 있는 나이로드에게 별다른 위안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성인의 유골과 그들을 고문하고 사형할 때 쓰였던 도구가 엄숙히 모셔진 방을 가로질렀다. 이디나르의 목에 감겼던 밧줄 옆을 지나칠 때 케넌이 말했다.
“사냥꾼의 전당을 통해 밖으로 나갈 겁니다.”
“내 편이 정말로 하나도 없단 말인가?”
케넌은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교황의,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을 보았다. 당당함도, 의연함조차도 그 수심 깊은 얼굴엔 없었다. 사람은 환경의 노예일지니 나이로드 또한 초인은 아니었다. 케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버티시면 때가 옵니다.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뤼시앵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 재촉하듯 고갯짓했다.
그들은 성체 보관소의 문을 열고 다시 외부로 나왔다. 양편의 회랑과 가운데 정원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정원을 건너 전당의 문을 향했다. 전당에 들어서자 향내가 훅 끼쳤다.
“그것 보라니까.”
여자가 성냥을 흔들어 끄면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관 앞에 놓인 모든 향로에 불을 붙인 듯 향내가 진동했다. 어둠 속에서 향연기가 푸르게 풀려나왔다.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환도를 빼들었다.
“이쪽으로 온다고 했지, 내가. 토끼 사냥하고 다를 게 없어.”
여자는 환도의 끝으로 뤼시앵을 겨눴다. 뤼시앵은 총을 겨누듯 독특한 그녀의 자세가 환도의 손잡이에 장착되어 있는 두 개의 총포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어느 곳에 서있든 모두 그녀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뤼시앵은 천천히 팔을 들어 플랑베르주의 손잡이를 잡았다.
“뭐야, 뤼시앵. 그쪽에 붙은 거야?”
“내가?”
뤼시앵은 뒤를 돌아 교황과 케넌을,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여자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를 번갈아 살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뤼시앵.”
남자가 벽에서 등을 떼며 뤼시앵을 불렀다. 그의 옆에는 남자의 키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칼이 있었다. 작두의 날을 필요 이상으로 키워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뤼시앵도 남자의 이름을 마주 불렀다.
“이고르.”
“교황 성하의 신변을 우리에게 양도해줄 수 없겠나?”
“이거 왜 이래. 에스트룀의 계획을 귀띔해준 게 자네였잖아.”
여자가 얼른 고개를 돌려 이고르를 노려보았다. 이고르는 거대한 칼을 한 팔로 들어 어깨에 걸쳤다. 칼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뤼시앵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랬지. 같은 식구잖은가?”
“물러 터졌어. 그럴 거면 아예 저쪽 가서 서있으라고.”
“로즈플뢰르, 이고르, 물러나게.”
케넌이 걸음을 내디뎌 뤼시앵의 옆에 섰다. 그가 든 묵색의 권총과 칼이 빛을 삼켜 질리도록 어두웠다. 대구경의 권총은 사람의 머리를 일격에 박살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이 권총을 다루기 위해 케넌은 오른팔에 반동을 제어하는 장치를 두르고 있었다.
케넌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자네들을 해치고 싶지 않네,”
“하!”
로즈플뢰르가 코웃음 쳤다. 케넌은 그녀의 코웃음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 버티고 있는 두 사냥꾼은 제국에서 가장 많은 수의 마물을 상대해온 이들이었다. 그들 눈에는 오래 전에 현장에서 물러나 앉은 케넌이 행정가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대체 에스트룀이 뭐라고 했기에 이렇게 홀라당 넘어가서 감히 교황 성하께 칼을 겨누는 거냔 말이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뤼시앵의 물음에 로즈플뢰르가 반문했다.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 나이로드 밑에서, 저 잘난 안드로스 단장 밑에서 죽을 때까지 구르다가 끝날 거라고. 무슨 발버둥을 치더라도 결국엔 여기 묻혀서, 질질 짜는 추도사나 듣고 향내나 맡게 되겠지. 그게 네가 원하는 미래야?”
뤼시앵은 이 아이러니가 너무 희극적이어서 웃고 말았다. 오펜하른에 가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안체가 잡은 채 끝까지 놓지 않았던 투창기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반대편에 서 있었을 터였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네.’
뤼시앵은 케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의 뤼시앵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을 연기하는 일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었다.
헤레틱스가 그에게 약속한 것을 받아내기 위해, 그는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그 일이 결국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었는지 돌이켜 보노라면 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만둬 버려.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사냥꾼 노릇 하기 싫으면 때려치우라고.”
“누가 하기 싫대? 내가 너 같은 겁쟁이인 줄 알아? 하고 싶어! 사냥꾼으로 살고 싶다고! 하지만 너희 교황님은 우리가 무슨 초인쯤이나 되는 줄 아시지. 아주 산 채로 석고를 부어다가 동상을 만들면 흡족해 할 인간이라고!”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느라 로즈플뢰르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그녀는 목이 메는 듯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냥꾼이더라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거야. 그뿐이야, 뤼시앵.”
“아냐.”
뤼시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냐. 너희들은 드로크만한테 뭔가를 약속받은 거야. 이븐이 말한 게 이거였군. 이븐 베르자크가 되고 싶나? 그의 몸이 부러워서 이러는 거야?”
뤼시앵은 고개 젖혀 웃었다. 한때는 바로 그 자신이 헤레틱스의 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이었다. 뤼시앵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외쳤다.
“그 미친놈은 이미 감염되기 전에 잔베르에서 그 짓거리를 벌였다고! 각오야. 각오가 너와 베르자크를 구분 짓지. 그게 약해지니까 편법을 찾아 기웃거리는 거라고.”
“나이로드 교황 성하께선 각오가 부족하셔서 뒷구멍으로 달아나시나? 단장님, 뤼시앵, 물러나십시오. 저야말로 두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고르가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뼈마디 사이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새어 나왔다. 뤼시앵의 말이 효과를 발휘한 대상은 뜻밖에도 로즈플뢰르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효과는 아니었을뿐더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듯했다.
“나도 적당히 하려고 했어.”
그녀가 주머니에서 꺼내 든 물건의 의미는 모여 있는 다섯 가운데 넷이 사냥꾼이었으므로 자연히 공유되었다. 기실 그건 사냥꾼이 아닌 나이로드조차 알 수 있을 만큼 자명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불을 지핀 거야, 뤼시앵.”
로즈플뢰르가 호각을 입에 물었다. 호각 소리가 전당의 어둠을 난도질했다.
- 작가의말
국립국어원은 ‘-ㄹ뿐더러/-을뿐더러’를 하나의 어미로 취급하네요. 지금까지 저는 ‘의존 명사+조사’의 형태로 파악하고 있어서 잘못 썼는데, 앞의 글들을 수정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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