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3장 - 연옥의 한가운데(1)
12막 악야
3장 연옥의 한가운데
몸을 덥혔던 열기가 가시고 땀으로 들러붙은 옷에 새벽바람이 스미자 오슬오슬했다.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가 이제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간밤의 기억이 어스름했다. 이븐은 혹 불빛이 눈에 띌까 간신히 참았던 담배를 문간에서 피워 물었다. 새벽 여명 속에서 손톱만한 불빛이 힘없이 깜박였다.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이븐을 확인한 그는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남자는 이븐의 옆에 서서 파이프를 물었다. 쌈지에서 잘게 썬 담뱃잎을 꺼내 파이프에 채워 넣고 성냥을 가져다 댄 채로 입을 뻐끔대는 과정이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웠다.
“미안합니다. 날이 밝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남자가 이븐을 힐끗 보았다. 남자는 어깨가 굽어 어딘지 위축된 인상을 주었다. 그의 입에서 연기가 푸르고 매캐하게 흘러나왔다.
“보통 분들은 아니시라는 건 알겠소.”
“설명드릴 수 있는 때가 올 겁니다.”
말들이 구유에 담긴 물을 순서를 정해 차분히 마셨다. 혓바닥이 물을 때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이븐은 담배를 끄고 말 쪽으로 갔다. 물을 삼키는 말의 목을 두드릴 때 손바닥 밑으로 둥둥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우리는 아직도 달리고 있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븐에게 시선이 모였다.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그를 노려보는 여자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나이로드의 땋은 은발을 신기한 듯 만지고 있는 일고여덟 살짜리 여자애, 그리고 밖에서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가 이 오두막의 주인들이었다.
케넌이 불에 달군 바늘로 베른트의 찢어진 얼굴을 꿰매고, 베른트는 한 땀마다 눈언저리를 씰룩였다. 나이로드가 여자애의 머리를 땋아주다가 이븐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븐을 향한 시선을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래서?’라는 뜻이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는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강을 건넜으니 사냥개들을 동원해도 뒤쫓아 오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나이로드의 표정이 미묘해져서 이븐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진짜 사냥개 말입니다. 멍멍 짖는 개들요.”
“알아들었네. 어디로 가는 게 좋겠나?”
이븐은 탁자 옆의 의자 하나를 들어 나이로드 앞에 놓고 앉았다. 그는 여자와 아이를 슬쩍 눈으로 훑었다. 여자가 아이를 불렀다.
“메그, 침대로 돌아가.”
“그래, 엄마 말 들어야지.”
나이로드가 아이의 어깨를 잡아 돌려 세웠다. 아이는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이븐의 손을 미끄러지듯 피해서 침대로 갔다. 이븐은 잠시 자신의 투박한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웬돌라드는 어떨까 싶습니다.”
“자네가 있는 곳이어서?”
“첫째로, 계시던 곳과 가깝습니다. 일을 꾀하기 용이할 겁니다. 둘째로,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성··· 당신께 호의적인 이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것 역시 중요한데, 사냥꾼들이 있습니다. 부단장과 다른 견해를 지닌 이들을 설득해 우리 쪽으로 들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나이로드는 이븐의 말을 곱씹어 보는 기색이었다. 먼저 오른손가락으로 이븐이 말한 조건들을 꼽아보고, 반대편 손가락으로는 반론을 헤아렸다.
“사냥꾼들이 뭘 할 수 있는지는 나도 잘 아네. 바로 오늘 그대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까.”
이븐은 나이로드의 주먹 쥔 왼손과, 오른손을 보았다. 오른손의 약지와 소지가 펼쳐진 채로 남았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뭘 할 수 없는지도 알고 있어야 하네. 전세를 뒤집는 데에는 잘 훈련된 개인보다 오합지졸의 다수가 때로는 더 유효하지. 이븐, 난 군사가 필요하네.”
“그웬돌라드엔 황제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드로크만이 길을 열면 나머지 왕국의 군대들도 가세할 터이고요. 이븐의 제안은 그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이겠으나 최선이라 할 순 없습니다.”
케넌이 삶은 헝겊 조각을 베른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베른트는 헝겊을 얼굴에 대고 눌렀다. 이마부터 콧등에 이르기까지 이고르의 칼이 찍은 자리에 상처가 길고 비뚜름하게 남았다. 상처를 꿰맨 자리가 우둘투둘해서 미간에 새로운 입술이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케넌, 그대의 제안은 뭔가?”
“생트바이룬으로 가셔야 합니다.”
나이로드가 떨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이븐도 그 지명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로덴치오와 드로크만이 손을 잡고 나이로드를 쫓아냈으나, 케넌의 제안은 그들의 몸통은 황제라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븐은 생트바이룬에서 치렀던 전쟁을 떠올렸다. 그들 독립군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썼다. 방언이라고들 했지만 실상 외국어에 더 가까웠다. 케넌은 오래 전 실패했던 반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대공에게 의탁하시지요.”
“바람 좀 쐬지.”
나이로드를 따라 일행이 우르르 일어났다. 베른트가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나왔다. 먼 곳에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잔베르 탈환의 열흘 동안 이븐을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해가 계속해서 뜬다는 사실이었다. 끝장난 줄 알았던 세상 위로 해는 질기게 떴다.
케넌이 입을 열었다.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려면 황제를 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케넌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막겠다던 나이로드가 택하기엔 꼴이 우스워지고 마는 방안이었다. 이븐은 그렇게 말했으나, 잠옷 바람으로 도망도 친 마당에 못 할 게 뭔가 싶었다. 나이로드의 빌려 입은 바지가 껑충해 발목이 드러났다.
“대공의 병사를 빌려 교황청을 장악한 역도의 무리들을 쫓아내는 건 어떤가?”
“대공을 움직일 만한 유인이 없습니다. 생트바이룬의 독립군과 대공의 병사로 황궁을 치십시오. 헬바르드 대공을 시켜 공화국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면 작은 전쟁으로 큰 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이로드의 말에 케넌이 차분히 설명했다.
“그 다음엔 생트바이룬을 제국에서 독립시켜주고? 허, 맥혼이 내게 했던 말과 똑같군.”
“추기경이 한 번 제안했던 방법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그건 동시에 추기경이 우리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이븐이 케넌의 제언이 가진 위험성을 언급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계획에 박차를 가한 꼴이 되었다. 나이로드가 결행을 작심한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맥혼보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군.”
“헬바르드 대공은 야심 있는 인물입니다. 방계 혈족 가운데 계승 순위가 제법 높은 편에 속하고요. 명분은···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본 다음 천명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븐은 그렇게 말하는 케넌의 정치적인 면모에 새삼스레 놀랐다. 하기야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나 사냥을 하던 이븐보다는 사관 학교를 졸업했다는 케넌이 지략에서 더 나을 터였다. 나이로드가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이븐 자네도 함께 갈 텐가?”
“저는 안에서 흔들어 보겠습니다.”
나이로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흔들다니, 누구를?”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여기 베른트와, 연구원 하나를 데리고 헤르돈을 방문했습니다. 중간에 습격을 받아 계획했던 바를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부 자료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븐은 슬로언과 로지아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둘의 호흡이 잘 맞기를 바라며 이븐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쯤이면 분석이 끝났을 겁니다. 가지고 들어가서 최대한 활용해 봐야죠.”
“직접 가서 보니 어떻던가? 그대의 예상과 같았나?”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븐은 케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모크와 아블린이 죽었습니다. 둘 모두 드로크만을 따랐고, 다모크는 오래 전 감염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진즉에 보고해야 했던 내용이었으나 경황이 없었던 탓에 지금까지 미뤄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케넌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와 아블린의 악연이 이렇게 끝나는군.”
“제가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끝에는 정말 설득했다고 믿어 버렸습니다.”
“자네나 아블린이나 꺾이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자세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뤄두세. 자네가 헤르돈 연구소에서 알아낸 사실이 드로크만 대주교를 실각시킬 만큼 위력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네.”
“사냥꾼들을 마물화시키는 계획요? 아뇨, 아닐 겁니다. 그건 전혀 위력을 갖지 못합니다. 누구나 떠올려 봤을 법한 일이고, 헤르돈의 경우엔 다모크 자한이라는 실례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븐이 말을 멈추고 입맛을 다셨다. 이븐이 하지 못한 말을 케넌이 대신 받았다.
“자네의 존재 때문에 희석될 테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헤레틱스와의 내통은 다릅니다. 그건 이적 행위지요.”
“알고 있겠지만 헤레틱스에 대해서는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써왔네. 지금 드로크만이 헤레틱스와 손을 잡았단 사실을 공표한대도 기대한 효과를 거두긴 어려울 걸세.”
“압니다. 하지만 저는 한 사람만 움직이면 상황을 모두 관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명 속에서 세상이 색을 되찾고 있었다. 이븐은 겹겹이 쌓인 어둠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가는 양을 지켜보았다. 나이로드가 말했다.
“추기경을 만나러 갈 셈이군.”
이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로드가 먼 곳을 응시했다가 다시 이븐을 쳐다봤다.
“가기도 전에 잡힐 거야. 대책은 있나?”
“그들이 무슨 죄목으로 저를 잡겠습니까? 교황 성하를 보호하려 했다는 거요? 상을 받아야 할 일이죠.”
“죄목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붙을 수 있는 것이네, 이븐.”
“저는 죽지 않습니다.”
이븐은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자 실소를 머금었다. 나이로드가 허리를 굽히고 웃었다. 이븐이 기다렸다가 덧붙였다.
“그냥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신감은 좋은 것이지.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랬어.”
자신감 넘치던 나이로드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장화 끝으로 흙을 긁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븐은 나이로드의 눈이 예전의 빛을 되찾은 것을 확인했다.
“좋아. 그럼 맥혼을 만나러 가게. 그 늙은이를 흔들어서 드로크만과 치고받게 만들어 버려. 그럼 케넌과 내가 들이닥쳐서 상황을 끝내버리도록 하지. 완벽하군, 완벽해. 그럼 움직이세. 아침을 얻어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교황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는 문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물었다.
“자네는 오늘 처음 보는군. 이름이 뭔가?”
“체스바덴에서 사냥을 배우고 있는 베른트 슈나이더라고 하옵소섭니다.”
예법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베른트를 보며 나이로드가 피식 웃었다.
“체스바덴이라면 헬라이드 엽사 밑에서 배우겠군. 어떤가, 내 말이 맞나?”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이븐이 대신 답했다. 그는 베른트의 공손히 굽어 있는 어깨를 뒤로 당겼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헬라이드 밑에서 배우지 않았나. 허, 그 늙은 사냥꾼이 내 수호성인이시로군. 어쨌거나 베른트, 고맙네. 그대 같은 사냥꾼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큰 위로가 돼. 사람이 반성도 하면서 살아야 한다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확신이 필요할 듯싶네. 그대가 내게 확신을 주는군. 내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는 그런 확신 말이야.”
나이로드가 베른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븐은 이로써 베른트의 향방이 결정지어졌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베른트, 성하의 곁에서 보좌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베른트는 어리둥절해져서 이븐과 나이로드를 번갈아 보다가, 무슨 일이든 감내하겠다는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내야죠.”
나이로드가 베른트의 어깨에서 흠칫 손을 뗐다. 그가 문을 열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며 줄어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얘기는 내 쪽이 아니라 다른 데를 보면서 해주게.”
- 작가의말
베른트의 기묘한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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