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3장 - 연옥의 한가운데(2)
*
황망한 정신 속에서 길고 난했던 도주로는 햇볕 속에서 대단할 것 없는 정체를 드러냈다. 정오가 채 되지 않았을 때 이븐은 도주로의 삼분지 이를 되밟았고, 심지어 도보로 이동했음에도 그러했다. 길이 엇갈린 듯 병사들과 맞닥뜨리는 일은 없었다.
이븐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그웬돌라드를 향했다. 여름 해는 길고 끈질겼다. 해가 서녘에서 뉘엿거릴 때쯤 이븐은 강을 건넜다. 장화를 벗어 들어찬 물을 빼낼 때 그는 노상강도들과 마주쳤다. 강도 중 하나가 늑대사냥개를 알아봤고 종내에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웬돌라드의 남서부 방면은 뷔센의 관할이었다. 소도시 펠햄에서 이븐은 교단 앞으로 값을 달아두고 말을 샀다. 걸어갈 기력은 충분했지만 그게 자기 몸 고유의 것이 아닌 듯해서 무턱대고 끌어 쓸 수 없었다. 마주(馬主)로부터 이븐이 사냥꾼이라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아침에 여관으로 찾아왔다. 이븐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여기 사냥꾼은요?”
“전쟁터로 갔지요. 거기에 마물들이 들끓는다나.”
“용병들을 쓸 수 있을 텐데요. 용병들이 대금을 높게 부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수다. 자기네들은 위험해서 못 잡는답디다.”
이븐은 의뢰를 맡지 않았다. 교단이 그의 발목을 잡아두려는 수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는 실력 있는 용병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조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놓아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그런 용병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라트펠트 교구에 들렀을 때 이븐은 몇 가지 소식을 두서없이 엿들었다. 멜레란데, 록펠트의 군대가 교황령을 가로질렀고, 칸테리에서 출발한 보급품을 가득 실은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교황 선출을 위해 추기경들이 랜시스 성당에 모였다. 나이로드는 축출되어 유폐되었다.
“부정축재에 문란하기가 말로 다 못 한다잖은가.”
“교황이 어디 요강인가. 하루아침에 비워 버리게. 내가 볼 땐 교단 실세 몇이 주판을 두드려 보니 수지가 안 맞으니까 쫓아낸 것 같으이.”
이븐은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남자가 부정축재에 대해 말할 때 이븐은 은이 부족하면 촛대를 녹여 주겠다는 교황의 호언을 기억했다. 이븐은 나이로드가 권좌를 되찾을 때 이들이 또 무슨 말을 주워섬기게 될지 자못 궁금해졌다.
다시 날이 저물었을 때 이븐은 잔베르 교구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븐은 소란을 피하려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성당 건물에 들어서자 신부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신부는 교황청의 일을 물었다. 이븐은 대답하지 않고 신부의 어깨를 살짝, 그리고 단호하게 밀었다.
“교황 성하께선 무사하십니까?”
신부가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이븐이 뒤를 돌아 되물었다.
“어느 교황 말입니까?”
연구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이븐은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 귀를 기울였다가 로지아의 혼잣말임을 깨달았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안에서 대답이 있기 전에 열었다. 로지아가 토끼 눈을 하고 이븐을 맞았다. 슬로언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다들 안 다쳤나요?”
“다친 사람도 있고 다쳤다가 나은 사람도 있고.”
이븐은 건성으로 답하며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부탁했던 소견서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헤르돈 항마연구소의 ‘진보한’ 성과가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는지, 다년간 관련 분야에 투신해온 수석 연구원의 관점에서 분석한 글이었다.
“이븐이 써야 할 내용도 있어요. 헤르돈에서 뭘 봤는지, 내사가 진행되던 중 대주교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하는 것들요. 슈나이더 씨랑 함께 오셨나요?”
“아니.”
로지아의 얼굴이 습자지처럼 창백해졌다.
“베른트는 당분간 교황을 보필할 거야.”
로지아가 둥글게 모은 입술 사이로 호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안도로 풀려 축 처졌다. 이븐은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볼을 꼬집고 말했다.
“살 좀 찌워. 넌 내 비상식량이잖아.”
“그렇게 부르지 말랬죠, 내가.”
로지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극을 뭉개는 잔인한 유머는 이븐의 특기였다. 웃음소리에 슬로언이 깼다. 그는 깨고 나서도 께느른하게 눈을 비비다가 등에 꽂히는 시선이 두 개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몸을 돌리며 일어났다.
“돌아오셨군요.”
주춤주춤 물러나 창가에 기대어 섰던 슬로언이 이븐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했다. 연구실에 들어온 사람이 이븐이 아니었다면 창밖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할 품이었다. 이븐이 그를 보고 말했다.
“마일스아이렌으로 갈 준비는 되셨습니까?”
“거기는 난리도 아닐 텐데요.”
“아직 부족합니다.”
이븐은 슬로언의 책상 위에 놓인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이븐의 동행 요청에 슬로언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위험에 마음이 끌리는 이들은 비단 사냥꾼뿐만이 아니었다.
“맞불이라도 놓자는 겁니까?”
“그보다는 기름을 부으려고 합니다.”
“어쨌거나 다 태워버리자는 말씀이시군요.”
이븐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로언은 양손을 마주 비볐다. 거칠고 단단한 이븐의 손과는 달리 학자로서 슬로언의 굳은살은 오른손 중지에만 있었다. 손가락 끝이 휜 것처럼 보일 만큼 기형적으로 박인 굳은살이었다.
학자들 사이에 번지는 전염병이기라도 한 듯이 그건 로지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경험해온 시간들이 그 작은 못에 응축되어 있었다. 그 시간들이 이제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수줍게 동경하고 있었다.
“저는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로지아 넌 여기 남아줘.”
이븐은 실망으로 풀이 죽은 로지아를 보고 덧붙였다.
“드로크만이 눈치를 채면 증거를 인멸하려 들 거야. 일을 그르쳤을 때 보험이 필요해.”
“저기, 이븐?”
슬로언은 일이 돌아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듯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증거는 소견서에도 있지만 제 머릿속에도 있는데요.”
이븐이 손을 수평으로 들어 목 언저리에서 흔들며 대꾸했다.
“그것도 인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
“잠시만.”
이븐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마주 앉은 슬로언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문이 열리고 들어온 무리들이 누군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븐은 그들이 자신을 찾아냈다는 것보다, 오히려 교황청의 코앞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더 신기하게 여겼다.
“이거 한 대만 마저 피우고 갑시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이제 막 담배를 피워 문 참이었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가 가슴을 긁었다. 요 며칠 쌓였던 여독이 느른하게 풀려 나왔다.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이쪽을 향해 서시오.”
이븐은 담배의 마지막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하얗게 늘어난 재가 털기도 전에 제풀에 무너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븐은 병사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슬로언이 잔뜩 긴장해 서두르면서도 굼뜨게 움직였다. 그에겐 책상 앞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어도 어색해 보이는 재주가 있었다.
교황청이 있는 마일스아이렌에도 범죄자는 있었으므로 감옥 역시 마련되어 있었다. 교단은 교황령에서 발생한 살인 따위의 강력범죄는 그 범죄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해결했다. 다만 교단과 관련된 일이라면 사법권 일체가 교구의 성당에 있었으므로 이븐은 교황청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호송하는 도중에 병사들은 이븐의 무장을 차근차근 해제시켜서 감옥으로 향하는 돌계단에 이르렀을 때 이븐은 셔츠와 바지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장화에 단도를 숨겨두었으므로 맨발로 지하의 찬 바닥을 밟는 일을 불평할 수는 없었다.
“저는 마일스아이렌 항마연구소 소속 연구원입니다! 저를 구금하시면 불법을 저지르는 겁니다! 이건 불법이에요!”
슬로언이 지하 감옥의 문설주에 두 다리를 걸고 버텼다. 온갖 흉기로 몸을 감싸다시피 한 이븐과 달리 슬로언의 몸에서 나온 거라곤 여비가 얼마쯤, 그리고 펜 하나가 전부였다. 여비는 증거품으로 채택되어 병사의 주머니 속에 안전히 보관되었다.
슬로언이 입구에서 옥신각신하는 동안 이븐은 제법 정중한 에스코트를 받아 감방으로 향했다. 병사가 한쪽 팔만 붙잡았다면 무도회장에라도 들어가는 분위기로 착각할 듯싶었다. 이븐은 자신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병사들에게서 긴장한 기색을 읽었다.
“의사를 데리고 왔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건 왼편의 감방이었다. 죄수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짚고 절뚝거리며 창살에 다가붙었다. 그는 이븐을 발견하고도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
“염병, 너까지 잡히면 어쩌겠단 거야.”
뤼시앵이 바닥에 침을 뱉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븐은 뤼시앵이 수감된 방으로부터 두 칸을 더 지난 뒤에 던져졌다.
“이고르.”
이븐이 자신을 내던지고 문을 닫으려는 병사를 향해 말했다.
“이고르를 불러주십시오. 전할 말이 있습니다.”
병사가 이븐의 말을 묵살하고 문을 닫았다. 이븐은 창살을 양손으로 잡고 틈을 벌렸다. 병사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븐은 벌린 틈으로 머리를 빼고 말했다.
“불러주지 않으면 난동을 부릴 겁니다. 죄수들을 몽땅 데리고 교황청을 뒤집어 놓을 거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으니 이것 좀 원래대로 해놓으시오.”
병사가 휜 창살을 보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이븐은 힘주어 창살을 다시 안쪽으로 오므렸다.
“이고르. 성은 모르겠습니다. 사냥꾼 이고르를 불러주십시오.”
병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병사가 이븐의 협박 같은 부탁을 받고 감옥의 문을 향할 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아냐!”
그건 일전에 얻은 교훈을 뼈에 새긴 이의 목소리였다.
“난 난동 같은 거 다시는 안 부릴 거라고!”
*
“중요한 이야기여야 할 걸세, 체렌도프 엽사.”
이고르가 미처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로덴치오는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집무실에는, 깔끔할 수도 있었던 일을 복잡한 판국으로 몰고 간 원흉이 능청스럽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남자를 지키고 있던 병사 두 명이 꾸벅 절을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로덴치오 추기경 예하.”
“베르자크.”
로덴치오는 왜소한 노구를 기민하게 움직여 책상 뒤에 앉았다. 등이 굽은 추기경의 움직임은 설치류를 연상시켰다.
“나이로드는 어디 있나?”
“뜻이 있는 곳에 계시겠지요.”
로덴치오의 눈가에 난 주름이 깊어졌다.
“헬바르드 대공에게 붙었나?”
“그럴 수도 있고요. 중간에 헤어져서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고르가 뒤에서 서성거리다가 이븐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돌발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이고르의 팔이 이븐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짚었다. 로덴치오가 손깍지를 끼고 말했다.
“그건 혼란으로 향하는 길이야. 아수라장의 문고리를 돌리는 일이란 걸세. 자네가 가서 말려야 하네.”
“말려서 도축장으로 끌고 오란 말씀이십니까?”
“죽일 거였다면 벌써 열 번은 더 죽였어.”
“직접 가시지 않고요. 교황 성하의 가장 충직한 우군이신 추기경께서 찾아가시면 성하도 감화 감동되어 진실로 설복하실 텐데요.”
욕지거리를 정화하는 과정인 듯이 추기경의 주름진 입이 닫힌 채로 오물거렸다.
“비아냥거림일랑 그만두지.”
“제가 한때 모셨던 사람을 밀고하는 일은 못 하겠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냥개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죠. 개가 사람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거야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고요.”
“자네와 대화하는 요령에 관해 쓴 책이 있을 법도 한데,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했군.”
로덴치오의 응수에 이븐은 어린애처럼 킥킥거렸다. 이고르도 참지 못하고 웃음에 동참했다. 이븐은 문득 사냥꾼들이 시답잖은 농담에도 곧잘 웃는 건 곧 죽을 놈들이어서 그렇다는 웨인의 말을 떠올렸다.
“드로크만 대주교에 관한 겁니다.”
이븐이 사설을 걷어치우고 본론을 꺼냈다. 흥미와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한 듯 로덴치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교황이 되기엔 그자에게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습니다.”
“자네가 알고 있는 건 나도 모두 알고 있네. 높은 곳에 서있으면 아래가 훤히 눈에 들어오는 법이지.”
“드로크만은 머리 꼭대기 위에서 노는 일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알고 계신지요?”
로덴치오가 고개를 쳐들고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말하게.”
“대주교가 오늘을 위해 손잡은 이들은 황제와 남부의 귀족들뿐만이 아닙니다.”
이븐은 뜸을 들였다. 이고르가 재촉하듯 손가락을 세워 이븐의 등을 찔렀다.
“헤레틱스가 여기에 관여했습니다.”
“자네들이 밝혀낸 학자들의 비밀 결사 말인가?”
“저는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기보다는 그냥 미친놈들이라고 부르는 편을 선호하지만, 어쨌든 비슷합니다.”
이븐은 헤레틱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차분하게 전부 털어놓았다. 헤르돈에서 진행된 연구와, 그가 목격했던 다모크 자한의 상태, 켈레넨스크의 기현상에 대해 추측한 바, 그리고 실험장으로서의 전쟁터까지, 이븐의 설명은 가히 점입가경이었다.
이븐은 자신의 소감을 밝히는 것으로 긴 설명을 마무리했다.
“이런 이가 사냥단의 최고통수권자가 된다면, 외람되지만 저는 용병으로 전직하렵니다.”
“놀랍지 않군.”
로덴치오의 담담한 반응은, 그러나 했던 말을 반복함으로써 또 다른 의미가 묻어 있음이 드러났다.
“놀랍지도 않아.”
“추기경 예하, 생각해보십시오. 드로크만 대주교야 처음부터 나이로드 교황의 반대편에 서 있던 인물이라지만, 예하와 다른 이들은 어떻습니까?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드로크만 선장의 배 위에 올라타지 않으셨습니까?”
이븐은 자신의 무례한 지적이 로덴치오의 단단하게 다져진 신경을 뒤흔들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닳고 닳아 노회한 추기경의 심경을 긁어놓을 수만 있다면, 이븐은 주먹으로 턱을 한 대 갈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상황이 안정되면 가장 먼저 내쳐질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이븐은 로덴치오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마지막 수를 던졌다.
“선수를 치십시오. 제가 돕겠습니다.”
- 작가의말
최근 연재분에서 상황이 늘어지는 것 같아서 속도감을 살리려고 노력해 봤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