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4장 - 살아있는 늪(1)
12막 악야
4장 살아있는 늪(*)
헬바르드 대공 마농 지젤은 리카드 7세의 고손녀로서, 황족이 으레 그렇듯 대륙의 왕과 귀족 들의 피를 두어 방울씩 섞어 조형된 인물이었다. 로베르한 황실 특유의, 조금 오만한 느낌을 주는 끝이 쳐들린 코를 갖고 있었고, 색이 연한 금발은 분을 뿌려 하얗게 빛났다.
대공은 충분한 영양 공급으로 그 나이대에서는 오히려 보기 좋은 살집이 붙어 있었고, 조명의 도움을 빌려 오면 처녀 때의 풋풋한 생기도 가장할 수 있었다. 그녀에겐 말 더듬는 사람 일반의 움츠러든 태도가 없었는데, 그건 마흔 번째 생일을 맞던 아침, 거울에 비친 여자의 턱이 두 겹으로 접히는 것을 확인한 이래로 턱을 조금 위로 드는 습관을 들였던 탓이었다.
대공의 자택에는 빈방이 많았고, 거기에 누군가 장기간 체류하며 숙식해도 그건 여전히 빈방으로 치부되었다. ‘공식적으로’ 헬바르드 대공은 자신의 저택에 신세지는 이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이들 정체불명의 식객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폭발물에 조예가 깊으며 저들끼리 있을 때는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을 쓰는 부류였고, 다른 하나는 필리프 페실이 쓴 소책자, 『시민의 권리』를 옆구리에 소중히 끼고 에릭 도스피앙의 의회 연설을 암송하는 부류였다.
용인 받지 못하는 무리들이 대공의 자택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건 이를테면 오래된 전통이었다. 다밀 홀만이 고어로 적힌 성서를 하임벤어로 옮긴 죄로 쫓길 때 인자공(仁慈公) 조르주는 바로 이런 전통을 확립했다.
세간에서 자애공(慈愛公)으로 통하는 지젤 역시 이런 전통을 물려받아 검은 속내를 감추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대공이 짜증스럽다는 듯 비음을 섞어 말했다. 그녀가 말을 더듬지 않았다면 그건 속에서 여러 번 되뇌었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진심에 가깝다는 뜻도 되었다. 대공은 자신의 머리를 연신 매만지는 하인의 손을 쳐냈다. 하인은 주문 받은 대로, 베개에서 방금 뗀 머리를 연출하는 데 최선을 다하던 중이었다.
“좋네요.”
팔짱을 낀 채로 대공의 머리 손질을 관망하고 있던 여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대공의 시선이 거울에 비친 여자를 향했다. 여자의 화장기 없이 파리한 얼굴엔 갱부들의 감독관이 지닐 법한 빈틈없는 집요함이 담겨 있었다. 대공의 시선은 여자가 입고 있는 수수한 드레스에 머물렀다.
“다, 단정치 못하게 이게 무어야. 자, 자기는 제대로 입, 입고서.”
대공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잠옷 앞자락을 불만스럽게 당겼다가 놓았다. 방금 막 목욕을 끝낸 흰 살결에 훈기가 스며 있었다. 그녀는 내의를 끌어올리고 숄을 여몄다.
“지젤도 들었잖아요. 교황이 잠옷 바람으로 도망을 쳤다지 않아요? 차려 입고 무안을 주느니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 낫죠.”
대공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최측근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여자는 손가락을 튕겨 하인의 주의를 끌고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만하고 올라가서 방 정리 시작하라고 해요. 분주하고 느릿하게. 무슨 말인지 이해했죠?”
“세실, 자기는 무슨 기, 기계 같아.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처, 철저할 수가 있는지 원.”
세실이 빙긋 웃었다. 대공의 눈에 들기 전 극단에서 일하며 가다듬은, 매력적이면서도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연극적인 미소였다. 세실은 대공에게 다가가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두 여자의 머리 위로 상상의 왕관이 사뿐 올라앉았다.
“각본대로만 하면 연극은 웃으며 끝날 거예요. 누군가에겐 비극이고 우리에겐 확실히 희극이 되겠죠. 쫓겨난 왕자를 만나러 가볼까요?”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자신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세실이 허리를 숙여 대공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자신감을 얻은 듯 대공이 당당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공의 주변에서 정력적으로 솟아나는 염문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녀의 자애 정신이 두루 적용된 실례였다.
“자, 자기 동생이 교황을 모시, 모신다고 하지 않았어? 같이 올 수도 있겠네?”
대공이 문을 나서기 전에 물었다. 세실은 어깨를 으쓱하고 알쏭달쏭하게 답했다.
“장요? 글쎄, 모르겠네요. 걔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요.”
*
각본에 적힌 어수선한 환대는 지젤이 계단을 황급히 내려오다가 옷자락을 밟고 균형을 잃은 덕에 더욱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대공은 간신히 붙잡아 마지막 체면을 유지하게 해준 난간에서 손을 떼고 첫 대사를 읊었다.
“교황 성하!”
그녀는 얼른 무릎을 굽히고 교황의 손을 끌어당겨 반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입을 맞췄다. 교황은 이제 잠옷 바람은 아니었지만 반지는 없었다. 굵직한 자수정이 박힌 은반지는 곧 다른 인물의 손가락에 끼워질 예정이었다.
케넌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입을 열려 할 때 나이로드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헬바르드 대공, 염치없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여, 염치라뇨. 그리고 신세를 진다니요. 성하께서 계신 곳은 어디든 성전(聖殿)이옵고, 미천한 소인은 한량없이 기쁜 마음으로 성하를 받들 뿐입니다.”
연습했던 말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송한 듯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교황 일행의 초라한 행색을 눈으로 재빠르게 훑었다. 하루아침에 염치없는 식객으로 전락한 이들의, 엄숙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안드로스 단장님, 어, 언제나처럼 성하의 곁을 지키고 계시네요. 만인의 귀감이십니다. 옆에 계시는 분은 처, 처음 뵙는데······.”
대공은 베른트와 세실이 공통으로 가진 금발에서 관련성을 찾으려는 듯 둘을 살갑게 번갈아 살폈다. 나이로드가 손짓해 베른트를 옆으로 당겼다.
“베른트 슈나이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냥꾼 중 하나입니다.”
“엽사님이셨군요. 방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혹 시장하시면 하인들을 시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세실이 흠 잡을 데 없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치고 들어오는 시기는 물론 계산한 대로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야망을 감추는 데 그리 능숙한 인물이 못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런 환대가 답례를 바라지 않는 호의로 비칠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교단의 후레자식들이 황제와 작당을 해서 날 쫓아냈소.”
물론 나이로드는 그런 세실의 계산을 아득히 넘어서는 인물이었다.
“교황도 마음대로 바꾸는데 황제는 왜 못 바꾸겠습니까? 헬바르드 대공, 나랑 같이 역도가 되어 역도를 토벌합시다. 반역의 반역은 정의요.”
대공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가, 비죽이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으려고 더 기괴한 낯빛을 띠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경쾌하게 웃었다. 뒤에 선 세실의 머릿속에서 주판알이 요란스럽게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이로드 교황 성하.”
대공이 예스럽게 몸을 굽혀 절을 해 보였다.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성하를 받들어 지옥의 유황불도 불사하겠나이다.”
*
유례없이 신속하게, 혹은 졸속으로 열린 콘클라베는, 그러나 성령의 개입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추기경들이 만장일치로 다음 교황을 지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결정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지연은 내정자의 적격 심사에서 발생했다.
각지에서 모인 추기경들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주장과 역시 같은 반론만을 맴돌 때, 이들은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것으로 타협을 맺었다. 오래 앉아 체력이 바닥난, 늙은 추기경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떠났다. 발을 빼고 싶어서 콘클라베 동안 한 마디 말을 보태는 일 없이 헛기침 하던 이들이 다음으로 성당을 나섰다.
벨레몽 추기경은 두 부류에 한 발씩 걸치고 있는 인물로서, 동시에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남자였다. 앉아 있는 것만으로 체력이 바닥나기에 그의 비대한 몸집은 제법 튼실했고, 발을 빼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지만 동시에 떨어지는 꿀물을 포기할 만큼 소박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주케토 밑으로 손을 넣어 달걀처럼 벗겨진 머리를 긁적이며, 차라리 자신을 다음 교황으로 지목해달라고 하면 충분한 납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허상에 지루한 정신을 내맡겼다. 성당의 뒤뜰은 산책이 허락된 유일한 장소였고, 불편함이 없도록 시중드는 이들은 예외 없이 로덴치오 추기경의 눈이거나 드로크만 대주교의 귀였다.
뒤뜰의 풀을 밟으며 벨레몽은 양편 가운데 어디에 서야 할지를 고민했다.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이기는 편에 서는 것은 최상책이었다. 그는 신실하게 주를 섬기기만 했더니 어느새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다는 식으로 능청을 떠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염원과 실천에 보답이 따른다고 믿는 부류였다.
벨레몽이 자리로 돌아오자 게르스트 추기경의 발언으로 콘클라베가 재개되었다.
“사실이라면 그건 중대한 결격 사유이외다. 그자들은 마물과 다름없잖소? 그런 자들과 손을 잡았다면 교황의 자리는커녕 대주교의 자리도 내놓아야 할 것이오.”
“고탄께서 이르시길 너는 장물아비의 물건을 사지 말라. 이를 어겼다면 마땅히 손을 잘라야 한다. 손 없이는 천국에 들어도 부정 탄 손으로 주를 섬기지 못하느니.”
골라내고도 남은 늙은 추기경들 몇이 햇살 받아 조는 닭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함과 추문은 결백한 이도, 아니 결백할수록 피할 수 없는 환난이지요. 견타인유여의사 즉기투지(見他人有如意事 則忌妬之)라.(**) 열 명의 죄인을 풀어주어도 한 명의 무고한 이를 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지고의 법도입니다.”
벨레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발언자의 얼굴을 보고 고소를 머금었다. 그룬발트 추기경은 사생아를 양산해내기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가 정부(情婦)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자 유용한 자금 가운데에는 드로크만 대주교의 손을 거친 것도 필시 있으리라고, 벨레몽은 어림했다.
“부덕의 소치요, 부덕의 소치. 똥 무더기를 깔고 앉아도 구린내는 감출 수 없소이다.”
“신성한 자리에서 말을 삼가시오, 게르스트 추기경.”
“똥을 똥이라고 하지, 그럼······.”
게르스트 추기경은 좌중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이 호의적이지 않은 것을 깨닫고 입을 닫았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 코를 훌쩍이며 자신을 향한 힐난의 눈길을 지워줄 다음 발언자를 찾아 눈알을 굴렸다.
또 다른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그룬발트 옆에 앉은 이의 이름을, 벨레몽은 떠올려내지 못했다.
“우리가 종들의 종으로 다른 이를 고려한다면 그자가 가만있겠습니까?”
벨레몽 추기경은 그 말에 동조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그런 협박조에 이토록 쉬이 수긍해버린 자신에게 놀랐다. 다른 추기경들도 마찬가지의 심경 변화를 겪은 듯 표정들이 굳었다. 통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마주 앉은 추기경들이 약속한 것처럼 헛기침을 해댔다.
“우리는 목자요, 양 떼가 아니외다.”
로덴치오의 말이었다.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발언 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규칙을 모른 체하고 있던 다른 추기경들과 달리, 로덴치오는 왜소한 체구를 꼿꼿이 일으켜 세웠다. 엄지로 묵주를 세는 움직임에 추기경들의 시선이 모였다.
로덴치오는 많은 것들을 적은 말 속에 담아내는 식으로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동안 무서운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증류해낸 술 한 방울이 혀끝에 닿은 듯이, 벨레몽은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로덴치오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튀어나온 배가 탁상을 밀어 바닥에 탁상 다리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 덕분에 벨레몽 추기경은 주의를 끄는 데에 성공했다.
“무리에 늑대가 섞였으면 우리의 역할은 더욱 명명백백해지지 않겠습니까?”
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저음이 성당의 둥근 천장을 타고 널리 퍼졌다. 벨레몽은 오늘따라 자신의 커다란 울림통이 제몫을 톡톡히 해낸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로덴···”
“시니안 살리오든 대주교.”
벨레몽은 로덴치오에게로 당혹한 시선을 던졌다. 로덴치오는 표정 변화 없이 벨레몽을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벨레몽은 목을 가다듬고 자연스럽게 발언을 이어갔다.
“저는 감히 로덴치오 추기경의 말씀을 따라 살리오든 대주교를 다음 교황이 될 인물로 거론하는 바이오.”
*이청준 作 『살아있는 늪』에서 따옴.
**남의 일이 잘되는 것을 보고 질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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