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막 4장 - 살아있는 늪(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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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창문으로 비가 들이쳤다. 번개가 칠 때마다 어두운 하늘에 하얀 금이 쩍쩍 새겨졌다. 카펫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어 일전에 있었던 혼돈을 불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마르셀은 잔에 술을 따라 이븐과 이고르의 앞에 각각 하나씩 놓았다.
마르셀은 어쩐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야 할 사람처럼 보였다. 케넌이 있던 집무실이 한편으로 기울어 있는 느낌이었다면, 마르셀은 집무실의 바닥을 들어 올려 준평하게 고르고 있는 듯했다. 바닥에 고인 빗물 웅덩이가 번개에 번쩍였다. 평평한 바닥 위에서 웅덩이는 흐르지 않고 고일 터였다.
“자네는 머리가 좋으니까 국경에서 처음 만났던 때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겠지.”
마르셀이 술병의 뚜껑을 닫고 입에 문 시가를 손에 옮겨 쥐었다. 몸을 더듬어 성냥을 찾는 이븐에게 이고르가 불을 빌려 주었다. 둘은 마르셀과 마주 앉아 나란히 담배를 태웠다.
“사냥꾼은 사냥만 해야 한다고요.”
“이제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마르셀은 이븐의 입을 거쳐 나온 자신의 말이 이고르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기를 바란다는 듯 그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아뇨, 단장님.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이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뒷짐 진 채로 방관했어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방관과 중립이 악을 꽃피운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너무 뻔하니까요. 하지만, 마르셀, 마차가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리고 있단 말입니다. 황제가 왕국들을 꾀어 전쟁에 가담시키고, 게헤만 의회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올 테면 와보라는 식으로 굴고 있죠.”
“달리는 마차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게. 그런 건 순진한 사람들을 겁주고 으르댈 때나 써먹는 비유야. 아내를 따라서 나도 한때는 독실한 신자였지. 하지만 난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아. 왜 그런 줄 아는가, 이븐?”
이븐은 난데없는 마르셀의 신앙 고백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그런 수사적인 물음은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마르셀이 한 말에서 이븐은 언젠가 아블린이 언급했던 그의 별장이란 곳의 쓰임새를 알게 되었다.
“텔루즈에 보육원이 있어. 나와 내 아내가 운영하는 곳이지. 거기 있는 애들이 감염당해 죽은 자기네 부모가 지옥에 갔는지 물어보는 일에 질려 버렸기 때문이야. ‘마르셀 아저씨, 우리 엄마는 지옥에 갔나요? 전도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비명을 지르고 있나요?’ 애들을 겁박하는 전도사 놈들이야 말로 지옥에 떨어질 작자들이지. 자넨 지옥을 묘사하고 있어, 이븐. 헤레틱스? 전쟁? 유황못과 불구덩이, 묵시록의 메뚜기 떼와 다를 게 뭔가? 나팔 좀 그만 불어대게. 자네는 종말의 천사가 아니야.”
“단장님, 이븐이 하는 말은······.”
이븐은 이고르의 어깨에 손을 얹어 그의 중재를 막았다. 이븐은 여느 때보다도 지금이 자신의 목소리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라고 느꼈다.
“저는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마르셀. 저도 빌어먹을 나팔수 노릇은 관두고 싶습니다. 숨이 차서 죽겠단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연민만큼 꼴같잖은 일도 없지. 이븐은 재떨이를 당겨 담배를 껐다. 눅눅한 방 안에 매캐하고 역한 담배 연기가 짙게 스몄다. 그는 문득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마르셀과 이고르가 시체에 꼬이는 까마귀들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이로드 교황의 모든 행보에 제가 동의하거나 수긍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수도와 데텔마인의 사냥꾼들을 교황청으로 복귀시킨 건 누가 보더라도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황이 —이제는 전 교황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사냥꾼들을 사지로 내몰아 혹사시킨다고 느끼는 이들도 적잖이 있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로드가 아니라면 누가 전쟁을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자네는 더욱 그렇고.”
전당에서의 전투로 목숨을 잃은 사냥꾼들의 장례식이 오늘 치러진 탓에 마르셀은 이미 취해 있었다. 이븐은 부연되기 전까지는 희미한 연관성만을 가진 주제들이 자꾸만 마르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에 피로감을 느꼈다. 이런 피로감을 알 리 없는 마르셀이 말을 이었다.
“마물과 대적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에 가까워졌어. 우리는 불이 나면 양동이부터 찾아 드는 인간들이 아니지. 그보다는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집을 헐어 버리는 족속들이야. 뱀에 물린 손가락의 독을 입으로 빨아내는 대신 손목을 잘라 버리는 부류라고. 그리고 그런 유의 과단성이 용인되었던 건, 단지, 오로지 그 상대가 마물이었기 때문이야.”
마르셀은 잔을 들고 고개를 뒤로 꺾어 급하게 술을 들이켰다.
“로즈플뢰르에게 자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이븐이 의문을 담아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한 로즈플뢰르의 아들딸을 보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장례식에 낯을 비치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 더 몰염치하리라 결론 내린 탓이었다.
“로즈플뢰르 다르몽. 자네가 전당에서 죽인 여자 사냥꾼 말일세.”
“몰랐습니다.”
하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이븐은 로즈플뢰르를 다시 죽일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아마도 다모크가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 순간, 혹은 그보다 더 전에 이븐은 이미 선을 넘었다. 건너온 다리가 불타는 열기로 등이 뜨거웠다.
“제게도 연인이 있습니다. 그게 죽어서는 안 될 이유라면, 로즈플뢰르 대신 제가 살아있는 걸 탓하실 순 없을 겁니다.”
“그런 얘길 하자는 게 아닐세. 자네가 부수적 피해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사실은 살아있는 인간들이었단 얘기야. 마물을 죽이기 위해 고안된 무기로 사람들의 머리통을 터뜨리면서도,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그건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븐의 손아귀 속에서 술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유리의 파편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상처에 술이 흘러들어 화끈거렸다. 피는 멎고 상처는 아물었다. 이제 이븐의 몸은 더 이상 그 자신의 정신에 귀속되지 않은 듯 제멋대로 부상을 회복했다.
“로즈플뢰르도, 그 젊은 사냥꾼도, 그리고 지금 병실에 누워있는 사냥꾼도 죄다 그런 무기들을 하나씩 들고서 맞섰단 말입니다. 제기랄, 여기 있는 이고르도 그렇고요! 내 평생 그렇게 커다란 칼은 처음 봤습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제가 죽었어야 했단 겁니까? 제 몸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마물 잡는 무기로 마물을 잡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이븐은 마르셀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에 박혔던 마지막 유리 파편이 재생되는 살갗에 밀려 나왔다. 이븐은 랑게 교구장이 데릭에게 씹어뱉듯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거기 없었지. 이븐은 거기에 자신의 뒤늦은 깨달음을 덧붙였다.
쉽게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당신이 최선의 세계에서 최악의 세계를 내려다보기 때문인 거야.
“그게 아니라면, 중립적인 척 가장하면서 사실은 대세에 편승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전쟁을 원하는 이들이 드로크만을 내세우고, 로덴치오는 여기에 영합해서 교황을 내쫓았습니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면 달리 뭐가 문제겠습니까? 아뇨, 단장님을 보니 하나 더 있군요. 문제 삼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식의 그 태도도 문제죠. 아래층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바닥이 뜨거운데 마르셀 단장님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 것을 주문하고 계십니다.”
마르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냥이 아니라 지저분한 정치적 다툼과 내분에서 죽은 사냥꾼들을 묻은 일만으로도 그는 진이 빠져 있는 듯했다. 이븐은 그가 다모크와 아블린의 시신도 인계 받아 함께 장례를 치렀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이고르가 종이를 받치고 책상 위의 유리 파편을 쓸어 담으며 입을 열었다.
“답이 없는 얘기야. 이븐 자네와 마찬가지로 에스트룀 부단장님께도 나름의 명분이 있었지. 거기에 나를 포함한 몇몇이 동조했고. 그런데 그것 아나, 이븐? 전당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나니까, 친구들 관을 내 손으로 옮기고 나니까 말이야, 여기 계신 바스케즈 단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해가 돼. 전부 이해가 된다고.”
이고르는 쓸어 모은 파편을 한곳으로 밀어 치웠다.
“손을 떼야 해. 이 괴물 같은 일에서 사냥꾼들인 우리는 손을 떼고, 더 이상 거들떠도 보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는 파괴하는 인간들이야. 우리가 손을 대면 상황은 항상 더 악화되고 말아. 자신 있다면 한번 말해보게. 자네 손을 거치고도 지금껏 멀쩡히 살아있는 게 몇이나 되나?”
이븐은 술잔의 파편을 노려보았다. 창밖에서 빗발은 더 굵어지고 있었다. 기억은 쓸려나가지 않고 규칙적인 소음 속에서 더욱 몸을 부풀렸다. 이븐은 촛불의 빛을 받아 노랗게 번들거리는 유리 파편 위로 끔찍한 생물의 잔해가 겹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양수와 피 웅덩이 속에서 몸을 뒤틀던 그 생물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묻어있었다. 그는 이 년 전 잔베르에서 맞았던 봄을 떠올렸다. 그 환절은 애초에 잘못되었다. 겨울에서 봄이 아니라 그 반대여야 했다.
마르셀이 이븐의 자학적인 회상을 끊었다.
“자네가 왜 다시 마일스아이렌으로 돌아왔는지 생각해봤네. 자네는 일전에 헤르돈 대교구에 다녀왔지. 교황청에서는 로덴치오 추기경을 만났고. 내가 하려는 말은 간단하네. 그만두게. 그게 무엇이든 간에, 교단 내의 알력에 빌미를 주지도 말고 개입하지도 마. 나이로드 교황은 존경할 만한 분이었지. 그 분을 안전히 모신 건, 그래, 내 감사를 전함세. 하지만 또 얼마나 한 혼란이 있을지··· 그럴 수만 있다면 생각을 멈추고 싶을 지경이야.”
마르셀은 주름진 이마에 뭉친 근육이라도 있는 것처럼 손을 들어 주물렀다. 밖에서 종소리가 길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이븐은 종소리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차대 교황이 선출된 것이다.
“이고르, 자네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죄를 묻지 않겠네. 위에서 뭐라고 하면 내 목이라도 내놓고 막을 테니까, 이제 다들 본업으로 돌아가게.”
어떤 말을 입안에 머금고 참는 듯이 마르셀의 두 줄기 검은 콧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결국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고 머금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우리는, 육시랄, 사냥꾼이야! 도대체 이 당연한 얘기를 몇 번을 더해야 다들 제정신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단 말이야!”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이븐의 말이 한 박자 늦었기에, 마르셀은 그 의미를 되짚어 보느라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드메스포르도 곧 꺼내줄 거야. 절차가 있어서 그래. 이븐 자넨 그웬돌라드로 돌아가서 그 헤레틱스라는 놈들을 주시하게. 자네 말대로 그놈들의 목적이 전쟁이라면 결국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있지 않겠나. 이고르는 로스키르헨으로 가서 용병들 중에 쓸 만한 놈이 있는지 알아보고 명단을 추려서 올려. 실력과 신용을 갖추고 있으면 돈 문제는 신경 쓰지 말게. 교단이 못 주겠다고 버티면 내가 줄 테니까. 나이로드 교황이었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마르셀은 그러나 곧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내재한 모순을 깨달았다. 나이로드는 물론 마물을 죽이는 일에 돈을 아끼는 위인은 아니었지만, 로스키르헨에서 사냥꾼을 빼온 것도 그였다. 그는 앞의 말을 뭉개기 위해 황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단, 정화사 놈들은 안 돼. 그 미친놈들이 불장난을 치고 있거든 불구덩이 속으로 떠밀어 버리게. 리카드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놈들을 로스키르헨에 들인 건지, 원.”
“저도 정화사와 상종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불구덩이는···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고르는 그렇게 답하고서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런 자리가 못내 불편했던 듯 일어난 이고르는 이제야 숨이 좀 트인다는 감상을 온몸으로 전하고 있었다.
이븐은 이제 교단 내의 파벌 싸움이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웬돌라드로 돌아가게 해준 마르셀의 결정에 감사라도 표해야 할지 고민되어 일어난 채로 머뭇거렸다. 이븐은 결국 고개를 꾸벅이고 이고르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그 날, 저를 말려줘서 감사했습니다.”
이븐은 이고르의 등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공연한 짓을 벌였다는 생각에 후회했다. 이고르는 뒤를 돌아 동료를 죽인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서워서 그랬어, 무서워서. 자네가 다 죽일 것 같았으니까. 그 망치 든 사냥꾼은 괜찮나?”
“베른트요. 살아있습니다.”
“다행이군. 자네한테 유감 같은 건 없으니 나한테도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어.”
이븐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고르는 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떴다. 그는 마주 다가오는 또 다른 이를 향해 넉살 좋게 알은체 하고 모퉁이 뒤로 사라졌다.
“이븐, 결과가 나왔습니다.”
슬로언이 성큼성큼 이븐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이븐은 급히 뛰어오느라 상기된 슬로언의 얼굴을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뇨.”
이븐은 그렇게 말하고 소매를 당겨 부옇게 김이 서린 창을 닦았다. 그는 빗발 속에 서 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쏟아지는 것이 비가 아니라 화산재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는 굳은 채로 서 있었다. 흙바닥을 쓸고 다닌 듯 남자가 입은 옷 끝자락은 진흙투성이였다.
예의 살인적인 두통이 도진 듯 남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휘청거렸다.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이븐은 창밖의 남자가 고개를 치켜들고 벌린 입으로 빗물을 망연히 받아내는 것을 지켜보며 덧붙였다.
“불똥이 튀기 전에 여길 뜹시다.”
12막 마침.
- 작가의말
다음 주에는 막간극 4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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