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4. 애국자(1)
막간극4. 애국자
막사 안에서 토르스텐 베르펠은 혁명 원년 사관학교의 생도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벌였던 때를 떠올렸다. 제복을 입고 긴장된 얼굴로 모여 앉은 생도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인지 확신이 없다는 듯, 거듭 문을 힐끗거리던 젊은이들. 아직 답을 찾지 못해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답을 품은 이들의 면면을, 베르펠은 기억했다.
그는 시대정신과 공화국 시민의 의무에 대해 말했다. 혁명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 그 고랑마다 피가 고여 새로운 시대의 싹을 틔우는 일에 대해 웅변했다. 그는 혁명이 더 나은 방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음을 겸허히 인정했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길게 변명하지 않았다.
‘내가 제군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 하나다. 잠들어 있지 말 것. 자리를 깔고 누워 있기만 하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다. 왕당파에 가세해도 좋다. 역사의 변증법 속으로 두려워 말고 투신하라. 제군들이 잃을 것은 겁쟁이라는 꼬리표밖에 없다.’
생도 가운데 하나가 손을 들었다. 베르펠은 생도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질문의 내용이 무엇일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이 불린 생도는 조금 당황해서, 그러나 곧 정신을 수습하고 질문을 던졌다. 군인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의무가 암초처럼 솟아올랐다. 좌중 가운데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더러 보였다.
‘이렇게 가정해보겠다.’
베르펠은 뒷짐을 지고 교단 위를 서성거리며 뜸을 들였다.
‘세상이 거꾸로 서 있다고 가정하자. 이런 세상에서 중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군들이 거꾸로 선 세상에서 바로서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상 유지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생도들의 시선이 곧게 세운 베르펠의 검지 끝에 모였다.
‘우리는 하늘에 왕과 귀족들이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오래 묵은 기만과 날조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떠받쳐야 할 것은 바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뿐이다.’
앞줄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생도 하나가 느릿느릿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파문(波紋)처럼 박수소리가 반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베르펠은 교단에서 내려와 생도들을 뒤로 하고 교실을 나왔다. 사흘 뒤 그는 여전히 왕당파가 다수인 게헤만 육군사관학교로부터 해임을 통보 받았다.
소신을 가지고 상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군인의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인 주제였다. 더욱이 그 주인공이 젊고 잘생긴 데다가 다재다능하여 작가로서의 명성도 제법 얻은 인물이었다면, 누구나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고대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해임에 자극 받은 베르펠 중위는 얄팍한 소책자를 하나 썼다. 문답 형식으로 꾸민, 왕정주의자인 아버지가 공화주의자인 아들에게 설득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장군이 쓴 책은 잘 읽어봤어요.’
엘레아노어 세스페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군의 조직 체계와 계급에 대해 무지했다. 베르펠은 피 비린내 나는 선동가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저는 장군이 아닙니다.’
‘무슨 상관이에요?’
세스페르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내가 곧 그렇게 만들어 줄 텐데.’
칼 슈테허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리고 로덴치오 추기경 역시 파악하지 못했지만, 베르펠은 바인라이히에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보급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세스페르의 추천이었고, 그는 영관 계급으로 도약했다. 베르펠은 정치군인의 딱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징표였다.
“다 모였습니다.”
부관이 막사의 장막을 들추고 말했다. 베르펠은 연설문의 마지막 문단을 고쳐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입 밖으로 혀를 빼고 목을 풀었다. 부관이 별 이상한 광경을 다 본다는 듯 목을 뒤로 뺐다. 베르펠은 연설문을 주머니에 접어 넣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베르펠은 빠른 걸음으로 그를 위해 마련된 연단을 향해 다가갔다. 연단의 옆에는 게헤만군의 명목적 총사령관인 린데만 장군이 앉아 있었다. 늙은 장군은 의자 위에서 이따금씩 몸을 꿈지럭거리며 최소한도의 생존을 증명했다.
연단은 보급품 상자를 쌓아올려 만든 것이었다. 베르펠은 연단의 조악한 만듦새에 만족했다.
“다들 앉으십시오.”
병사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서서 들을 만큼 대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편하게들 앉으세요.”
앞에서부터 하나둘 앉기 시작하며 대열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대단치 않은 얘기라는 말의 인상을 강화하려는 듯 베르펠은 병사들이 모두 앉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도 연단에 걸터앉았다.
“뒤에 잘 보입니까? 저도 좀 앉겠습니다.”
베르펠은 다리를 조금 경박하게 앞뒤로 흔들며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칠월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어 하나같이 우거지상들을 하고 있었다.
“이 전쟁이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혁명이 당최 무엇이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요. 또 혁명이면 혁명이지 전쟁은 뭣 하러 일으켰느냐 묻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전부 맞는 말입니다.”
진심으로 공감한다는 것처럼 베르펠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제 병사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고, 베르펠은 그것이 성공적인 연설의 단초이자 징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날도 더운데 싸워 보기도 전에 쓰러질 순 없으니까요. 여러분들은 제 말투가 슈테허 장군이나 다른 장군님네들의 말투와 다르단 것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이게 혁명입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아니 그것들일랑 역사 속으로 치워 버리고서 이제는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서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그는 연단에서 내려가 앞줄의 병사 하나를 이끌었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병사와 함께 베르펠은 다시 연단에 올라섰다.
“저도 귀족 출신이긴 합니다만, 조부께서 원체 노는 걸 좋아하는 양반이라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 꼴 보기 싫어서 사관학교에 들어갔고요. 열심히 살았고, 지금 여기까지 와서 여러분들을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뭐죠?”
“저··· 케빈입니다, 장군님.”
“좋습니다, 케빈. 자, 모두들 보십시오. 우리가 다릅니까?”
베르펠은 케빈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얼굴과 병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제가 조금 더 잘생기긴 했지만 그것 말고 다른 점이 뭐가 있습니까?”
가벼운 웃음이 좌중을 훑고 지나갔다. 베르펠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결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왜 여태 깨닫지 못했습니까? 왕과 귀족들이 우리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내려가도 좋습니다, 케빈.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자기들 핏줄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고 거짓부렁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공기를 넣어 부풀린 배로 발성을 받치고, 힘준 턱으로 단어들을 하나씩 씹으며 베르펠은 대열의 끝까지 닿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테레도르 왕의 목을 쳤을 때, 맞혀 보십시오, 무슨 색깔의 피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제기랄, 빨간색이었습니다! 몇몇 혁명가들 덕분에, 그리고 다수의 선량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와 국왕들이 나서서 우리를 과거로 돌려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베르펠은 군인이었지만 전쟁은 항상 결과일 뿐 어떤 수단으로도 기능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치르게 되어서 치르는 것이 전쟁이었다. 전쟁이 결과를 낳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단지 미리 정해진 선택지가 전쟁의 과정을 거치고 실현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말이었다. 폭풍을 일으키는 것은 비둘기처럼 고요한 언어였다.(**) 말이 빚은 화덕 속에서, 사람들은 도기처럼 구워지고 단단히 여물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나 평등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계속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제국 놈들 엉덩이를 걷어차야지!”
대열의 후미에서 누군가 소리 높여 외쳤다. 베르펠이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지켜야 합니다. 돌아갈 수 없다면 나아갈 뿐입니다! 누군가 길을 막고 서 있다면 뚫고 나갈 뿐입니다! 돌파합시다! 돌파할 때 ‘왕을 위하여’라고 외치는 편이 더 입에 붙는다면 그렇게 외쳐도 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돌아갈 고향이 왕과 귀족들이 다스리는 곳이라면 싸울 힘이 나지 않을 겁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왕국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앞줄의 병사가 손을 들었다. 베르펠은 그를 지목했고, 병사는 일어나서 뒤를 돌았다.
“삼 대째 부쳐 먹는 땅에서 쫓겨났수다! 나는 양(羊)만 못 한 삶을 살기는 싫단 말이오!”
이 연극적인 사연은, 그러나 그것이 지닌 보편성에 힘입어 최대의 효과를 발휘한 듯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성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베르펠은 울분에 찬 병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발언을 했던 남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뒤면 그는 베르펠로부터 약속된 대가를 받을 것이었다. 군중 속에 미리 합을 맞춘, 이른바 바람잡이를 심어두는 것은 세스페르에게서 배운 요령이었다.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싸웁시다! 우리가 피를 흘린다면! 왕이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 아들딸을 위해 흘리는 겁니다! 이제 왕들의 목을 칩시다!”
베르펠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테레도르 왕이 처형되던 날을 상기시켰다. 베르펠은 그날 광장의 흥분을 끌어와 지금 모여 있는 병사들에게 끼얹었다. 정해준 자리에 앉은 병사들 몇이 목청 좋은 환호성을 올렸고 곧 함성으로 번져 나갔다. 베르펠은 변하지 않는 집단의 생리에 감사하며 연단에서 내려왔다.
*
슈테허가 베르펠로부터 받은 인상과는 달리, 그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베르펠은 슈테허의 휘하에 있던 이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갈아 치우는 멍청한 짓거리를 저지르지 않았다. 슈테허의 참모들은 노련한 군인들이었고, 과거에 왕당파였든 아니든 간에 전쟁터에 온 이상 베르펠과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실질적 사령관이자 실제로 참모장이기도 한 베르펠은 참모와 지휘관 들이 그의 지시를 받기 싫어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척후를 풀어 얻어낸 정보를 통해 당면한 과제들을 하나씩 짚었고, 해결에 자신감을 내비치는 이들에게 작전을 입안해 올릴 것을 주문했다.
병사들을 모아 놓고 부르짖었던 돌파의 구호가 무색하게, 베르펠은 병참 기지의 증축과 보급로 확보에 골몰했다. 실질적인 전투에 관해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가 있다면 포병대의 운용이었다. 베르펠이 배치한 포병대는 1275년 7월 5일 모랄레스 장군이 이끄는 멜레란데 4군단과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데에 일조했다.
한 전쟁사학자는 이 날 오베르지엔에서 게헤만 군대가 거둔 승리를 다음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요약했다; 포병은 두들겨 뭉개고 기병은 뚫고 보병은 쓸었다. 게헤만 의회는 이 승리에 힘입어 계류 중이던, 징병제의 한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국방을 위해 시민이 지니는 의무에 관한 법안’을 통과, 국민개병을 정착시켰다.
오베르지엔 전투를 분수령으로 게헤만군은 연이은 승전보를 올리기 시작했다. 베르펠은 적을 깊숙이 끌어 치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7월 말엽에는 뢰헤로 전해지는 연승 소식에 의회가 의심을 품고 조사관을 파견할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들 조사관은 조사관으로 불리지 않았으며 승전을 축하하는 명목을 가면처럼 뒤집어썼다.
파견되었다가 뢰헤로 돌아온 조사관이 숨찬 목소리로 남긴 말은 그로부터 파장이 시작되어 결국에는 역사의 물길을 틀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자면, 관용적인 어구의 지각 없는 사용으로 진부하고, 심지어 과장된 찬양 조 때문에 희극적이기까지 했다.
“게헤만이 직면한 위기 속에서 두려움이 앞선다면 토르스텐 베르펠을 보라. 그야말로 용기의 화신이다.”
그러나 용기의 화신은 의회에 모인 공화주의의 화신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작가의말
제가 역사나 전쟁에 대해 문외한인 수준을 넘어 젬병이기까지 해서, 이번 글에는 유독 자신이 없네요. 마지막에 조사관이 한 말은 데이비드 레터맨이 9.11 테러 이후 루돌프 줄리아니 당시 뉴욕 시장에 대해 했던 말에서 따왔습니다.
어쩌다 보니 하워드 진을 두 번째로 인용하게 되었는데, 제가 그의 이념이나 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작중 인물의 성격이나 그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진이 했던 말을 끌어오는 것이 유용하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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