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극4. 애국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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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고성을 배회하는 유령이나 베소니아의 침엽수림에 살면서 아이들을 납치한다는 털북숭이 괴물을 목격한 바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권력을 마주하면 저절로 수그러드는 어깨를, 프란시스는 갖고 있지 않아 그의 눈에는 세상이 너무 명백하다는 뜻이었다.
가령 그는 사람들이 성인(聖人)의 머리 위에 둘러쳐진 광휘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 화상으로 짓무른 성인의 두 손과 그 고통을 느꼈다. 그는 세상을 보는 대로 그림에 담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프란시스의 그림에서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불쾌감을 받았다. 프란시스는 그 명명할 수 없는 불쾌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건 날것의 냄새였다.
“늙은 쥐가 애가 타는 모양이군.”
프란시스는 황제의 입이 움직일 때 그 주위에서 요동치는 빛의 무늬에 주의를 기울였다. 젊고 미숙한 화가가 저지르기 가장 쉬운 실수는 빛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조도와 광원을 분별없이 따라가면 결국 공들여 망친 그림을 얻게 되기 마련이었다.
반면 숙련된 화가가 곧잘 발을 헛디뎌 빠지게 되는 실수는 —적어도 프란시스가 믿는 바에 의하면— 빛을 붙잡아 고정시켜두고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배경에 인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수인 까닭은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을 그리게 되는 때문이었다.
“뒷수습에 정신이 없을 텐데 황궁까지 달려온 걸 보면 말이야. 아, 카림, 그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니 괘념치 말게.”
뒤르발 백작 카림은 여부가 있겠느냔 듯 목을 앞으로 빼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비위를 맞춰야 할 때 으레 동원되곤 하는 리듬감 갖춘 끄덕임이었다. 프란시스는 곁눈질로 백작의 턱살이 여러 겹으로 접혔다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순수한 경이를 느꼈다. 말 그대로 빛을 삼켰다가 놓아주는 장면이었다.
“폐하, 이쪽을.”
프란시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말수 적은 이들의 고질적인 잠긴 목소리 때문에 애써 예의를 갖춘 폐하의 호칭은 헛기침과 분간되지 않았다. 백작은 익숙해지지 않는 화가의 무례에 놀라 아랫입술을 빼고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정작 리카드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맙소사, 아직도 얼굴을 그리고 있나? 카림 자네가 보고 얘기해주게. 이 게으른 장인(匠人)께서 그림을 완성하려면 얼마나 더 소요되겠나? 아니지, 이렇게 얘기하는 게 더 낫겠군. 백지를 일, 액자에 담아 벽에 거는 걸 십으로 두면 지금 어디쯤 와있나?”
백작은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눈을 찌푸리는가 하면, 그렇게 할 때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처럼 목을 뒤로 길게 빼고 프란시스의 붓놀림을 눈으로 쫓기도 했다.
프란시스의 그림 속에서 리카드 황제는 거만하고 형형한 눈동자를 가진 젊은이로 묘사되고 있었다. 쉽게 흥분하는 성정의 반영인 듯 불그스레한 뺨은 턱을 향해 날카롭게 모였고,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물어 우쭐거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한대도 군주들의 전신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법이었다.
가장 기이한 것은 짙은 파랑으로 조형된 두 눈동자였다. 프란시스는 다른 화가들이 그러는 것처럼 선하고 조금은 얼빠진 듯이 보이는 눈을 그려 넣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그린 건 수챗구멍의 소용돌이처럼, 보는 이를 집어삼키는 눈이었다.
구석구석을 뜯어본다면 화가의 섬세한 손길과 그것이 구현해낸 핍진한 묘사에 가장 무딘 이의 경탄도 얻어낼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한자리에 모여 만들어낸 것은 다름 아닌 진실의 과잉이었다.
“글쎄요. 다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그림도 한참이나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붓질 몇 번에 몰아치듯 완성하고 서명할 자리를 찾는 이들도 있지요.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는데 영지에 찾아온···”
“그만, 그만. 자네는 어찌 숫자 하나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그리도 요란한 사설을 덧붙인단 말인가. 보아하니 둘이 아주 죽이 잘 맞겠어.”
“오나··· 육쯤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폐하.”
“그거 아주 안 좋은 버릇이야.”
리카드가 오른손에 쥔 홀로 백작을 가리키며 부연했다.
“대충 중간쯤 되는 자리를 찾아서 애매하게 답하는 것 말일세. 말해보게. 드로크만이 자네더러 나이로드를 쫓아내자고 했을 때도 그런 태도로 답했나?”
“나이로드를 혼쭐내 주는 일은 폐하의 뜻일진대 어찌 제가 뭉그적대었겠습니까만, 이 그림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사실 신은 폐하께서 이 불쌍한 화가의 그림에서 불온성을 발견하시고, 그 가련한 엉덩이를 걷어차시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되는 바이옵니다.”
백작의 말에 리카드는 고개 젖혀 웃었다. 그가 홀 쥔 손으로 탁자를 짚었을 때 소맷자락에 걸린 왕관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불온성이라니 기대되는군. 두게, 이건 내가 올려놓을 테니까. 각도가 이쯤이었나?”
프란시스가 붓을 내려놓고 왕관의 위치를 조정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는 그러고 나서도 그림이 있는 자리와 탁자 사이를 오고가며 과거를 복원하는 데 괴팍하리만치 엄격하게 굴었다. 그러는 사이 하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로덴치오 추기경이 도착했습니다.”
“프란시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추기경을 들여보내게.”
문을 열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하인이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리카드는 화구를 거두지 않고 있는 프란시스에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일단 착수한 그림에 대해서 저는 오직 한 사람의 명령만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폐하는 아닙니다.”
결국 자기가 그리고 싶을 때 그린다는 말이었다. 백작이 혀를 차고 말했다.
“허, 이런 무례한 작자를 봤나.”
“내버려 두게. 그런 오만방자함이야말로 구속받지 않는 정신의 증거라고 여기는 이들이 예술가 아니겠나. 내가 그것까지 빼앗아 올 수는 없지. 그럼 계속 그리게. 하지만 곧 이 방에 들어올 이와 함께 있을 때 내 표정이 과하게 일그러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반영하지 말게.”
“그 또한 폐하의 모습일 것입니다.”
“아, 제기랄, 마음대로 하게.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할 거야.”
추기경이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 리카드는 왼손으로 허리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홀을 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는 로덴치오 쪽을 슬쩍 보고 인사 아닌 인사를 툭 던졌다.
“나는 드로크만이 교황이 될 줄 알았는데.”
“저 또한 폐하께서 승리를 거두실 줄로 알았습니다.”
무신경하기로는 자리에 모인 넷 가운데 제일일 프란시스마저 움찔하고 캔버스에서 붓을 뗐다. 그는 붓을 바꿔 들고 망친 자리를 황급히 가다듬었다. 리카드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 아시오, 추기경? 날 열 받게 하려는 거였다면 성공이오. 선취점을 얻은 것에 경하 드리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할 텐데 말이지.”
리카드는 혀를 입천장에 붙였다 떼며 경박한 소리를 몇 차례 내다가 이어 말했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오. 게헤만이 요행으로 앞서나갔다 한들 결국에 이길 것은 우리 동맹이지. 이건 어린애도 알 만큼 자명한 사실이오.”
“소인은 어린아이와 의견이 같을 때, 아이의 총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스스로의 우둔함을 경계하라고 배웠습니다.”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위로 잔주름이 새겨졌다.
“프란시스, 두 번 말하지 않겠네. 아니, 벌써 두 번째로군. 화구를 챙겨서 나가게.”
백작이 다가가 프란시스의 고집스런 팔을 붙잡았다. 그는 화구를 재빨리 가방에 옮겨 담고 황망히 서 있는 프란시스의 손에 물통과 함께 쥐어주었다.
“여기 온 이유가 뭐요, 추기경? 돌연 삶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워진 거요?”
로덴치오는 화가의 뒷모습이 문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카드는 두르고 있던 어깨띠를 벗어 던지고 목을 조르던 옷깃을 풀어 헤쳤다.
“그보다 왜 당신이 온 거요? 살리오든은 너무 고귀해서 낯짝 비추기가 어려웠나?”
“교단과 황실 간의 유기적이고 긴밀한 관계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품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이해하고 계신 바와 같이, 이들을 자극하기에 이상적인 시기는 아니지요.”
살리오든 교황이 로스키르헨의 황궁으로 찾아올 경우 황실에 대한 교단의 종속적인 성격이 부각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황제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코끝으로 웃었다.
“맥혼 로덴치오, 당신이 그런 인물 아니었소? 그때 내게 뭐라고 했었지? 카림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나? 추기경이 나랑 나이로드를 화해시켜보겠다고 불렀을 때 말이야. 하늘의 왕국을 주관하는 어쩌고저쩌고······. 하늘의 왕국을 주관하시는 분이 황궁까지 행차하신 데엔 사연이 제법 있겠습니다그려.”
리카드는 장황하고 거만한 말 속에서 교황과 추기경의 자리를 교묘하게 뒤섞고 있었다. 그건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살리오든이 결국 허수아비 내지는 꼭두각시 아니냐는 지적이기도 했다. 추기경이 목을 고르고 천천히 말했다.
“폐하의 발밑에서 작당하는 무리들을 빛 아래로 끌고 나와 심판대에 세우고자 함이 알현을 청한 첫 번째 까닭이요, 변화의 국면에서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기율이 있음을 확인코자 함이 이번 예궐의 두 번째 목표입니다.”
“항상 느끼는 건데 추기경은 말이 너무 많소. 두 번째를 먼저 합시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이건 내가 아니라 뒤르발 백작과 나눠야 할 얘기인 것 같은데, 맞소?”
“폐하의 혜안에 진실로 탄복했나이다.”
“비꼬려는 게 아니거든 그런 의미 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 내가 얼마나 우둔한지 보여주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리카드가 의자를 당겨 앉자 백작도 물러나 앉았다. 백작은 육중한 몸을 기울여 팔걸이에 무게를 싣고 손바닥을 한 번 맞부딪쳐 보였다. 허벅지를 때려야 날 법한 소리가 들렸다.
“저는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교단과 백작 사이에 약속이 있었지요. 그 약속을 이행하는 주체는 ‘다음 교황’이었단 것을 분명히 하고 싶소이다.”
백작이 코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이다 결국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리카드도 따라 웃었다. 뒤르발 백작은 복잡한 문제를 교묘히 피해 가려는 로덴치오의 수법에 순수하게 감탄했다는 듯 이마를 손바닥으로 쳤다.
“그렇습니까? 저는 미처 몰랐던 사실입니다. 명민하신 추기경 예하께서 지적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영영 모를 뻔했습니다.”
“이 방에서 우둔한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지. 안 그런가, 카림? 추기경이 있어서 다행이야. 복되도다, 너 리카드여!”
리카드가 천장을 보고 찬미하듯 팔을 뻗었다. 로덴치오는 황제와 백작이 벌이는 즉흥극이 끝날 때까지 서서 기다렸다.
“다만 이 늙은이가 오활하여 겹겹의 계약과 구두로 된 약속을 다 전해 듣지 못하고 또 챙기지 못하였으니 누구를 탓하겠소.”
“조심하시오, 추기경. 받아낼 것에 대해서 카림은 빚쟁이보다 집요하니까.”
리카드가 가늘게 뜬 눈으로 로덴치오를 보며 말했다. 로덴치오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염려해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다만 소인이 하려는 말은 이제 약속의 내용에 대해서 뒤르발 백작의 증언에 오롯이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백작은 상체를 일으켰다가 반대편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은 채로 로덴치오를 한참 노려보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추기경 예하의 진심 어린 답변을 듣기를 원합니다. 콘클라베의 결과가 번복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백작 당신의 손에 달려 있소. 당신이 기꺼이 갱신되지 않은 계약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기약 없는 혼란이 애써 이룬 합의를 뒤집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엔···”
“반대의 경우엔?”
“우리는 미래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지요.”
미래라는 허황된 단어의 등장에 백작은 손끝을 붙였다 떼며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그가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동안 리카드가 끼어들어 정리를 시도했다.
“결국 성당을 굴리는 건 돈이 아니던가. 성직자들이 자문회의랍시고 우르르 몰려갔던 것도 지방 유력 인사들의 후원이 끊겼던 때문이고. 그치들이 드로크만에게 기대하고 있던 걸 추기경 당신이 해줄 수 있다면 누가 볼멘소리를 하겠소, 안 그러오? 하지만 신의에 대한 내 평소의 지론이 발목을 잡는데. 대주교의 이적행위라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소인이 폐하의 용단을 더욱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살리오든 교황 성하의 입지가 확고해지는 것은 또한 폐하께도 복일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런 거요? 난 그 여자··· 교황이 뭘 하건 별 관심이 없는데. 물론 길을 내준 건 고맙지만 그건 사실 드로크만이 내게 약속했던 일이었거든.”
드로크만이 교황의 자리에 앉기 위해 벌인 막후교섭은 로덴치오조차 기함할 수준이었다. 귀족들을 꾀어 성당에 대한 지원을 끊게 하는 한편, 성직자들에게 찾아가서는 해결사를 자처해 지지를 약속 받았다. 황제에게는 게헤만으로 향하는 교황령의 길목을 열어주겠노라 장담했고, 마지막으로는 주교 시절부터 반목해온 로덴치오에게까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일은 허사가 되어 드로크만 대주교는 이적행위의 혐의를 받고 교황청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증거 인멸의 여지가 다분하다는 이유였다. 물리적 위력에서 가장 위협적이었을, 대주교를 지지하는 사냥꾼들이 모두 베르자크의 손에 죽은 뒤였기에 일은 수월했다.
“말씀드린 알현의 첫 번째 이유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로덴치오는 자신이 앞서 말했던 방문의 두 가지 목적을 리카드가 떠올려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순간만큼은 로덴치오도 미사여구로 말을 꾸미는 대신 담백하고 간단하게 털어놓았다.
“나이로드가 헬바르드 대공에게 붙었습니다.”
- 작가의말
로덴치오가 어린아이의 의견에 대해 하는 말은 빌 마허가 Real Time을 진행하면서 했던 말에서 따왔습니다. (“만약 열네 살짜리가 당신과 같은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면, 그건 그 애에게 재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아이 수준의 지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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