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1장 - 시체밭의 파수꾼(2)
13막 1장(2)
*
“페카야스트포본?”
“서명할 게 더 남았느냐고 묻는군요.”
게헤만 공화국 주재 베소니아 왕국 대사 드미트리 미하일로프가 남자의 말을 게헤만어로 옮겼다. 실케 슈뢰더 소장은 자유의 대가라면 무엇이든 치를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고 있는 남자와 본래 실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세스페르 의원을 번갈아 살핀 뒤 짧게 한숨지었다.
“아닙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실케의 말을 드미트리가 베소니아어로 통역해주었다. 드미트리가 해석해 준 말의 어절마다 남자는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에는 박수를 한 번 치고는 두 손을 마주 비볐다. 연기가 몸에 밴 듯 극적인 동작이었다.
실케는 드미트리가 남자에게 국경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서류와 대사관에 제출할 사본을 구분해 설명해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세스페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드미트리를 향해 물었다.
“범죄인 인도잖습니까. 이 서류들이 대체 왜 필요한 겁니까?”
“얘기가 다 된 줄로 알고 있었는데요.”
드미트리 미하일로프 대사가 행정가답게 엄숙하고 실속 없는 대꾸를 늘어놓았다. 그는 실케에게 뺏길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탁상 위의 서류들을 한데 모아 봉투에 넣었다.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이었다.
“슈뢰더 소장님. 위민위원회의 결정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책상 위에 꼰 두 다리를 편안하게 올린 채로, 세스페르가 손에 든 마편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 순간 소장실의 문이 벌컥 요란하게 열렸고, 세스페르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여자는 달려온 듯, 혹은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숨을 씩씩거렸다. 그녀는 방 안의 면면을 훑고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대뜸 물었다.
“놓아주는 겁니까?”
여자는 표적을 분명히 해서, 자세를 바로잡고 있는 세스페르를 향해 다시 소리 높여 말했다.
“중요 증인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거듭, 거듭, 또 거듭 말씀드렸잖습니까!”
여자가 ‘거듭’을 연거푸 말할 때마다 그녀의 흑발이 사납게 흔들리고 목에 선 핏대는 더욱 뚜렷해졌다. 세스페르는 귀가 따갑다는 듯 귓구멍을 후비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쾰러 변호사님, 참석을 요청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또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네요.”
“저는 조금도 반갑지가 않네요. 의원님이 제 말씀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이런 자리는 마련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쾰러라고 불린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세스페르 앞에 있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양철통에 담긴 펜들이 반 바퀴 돌며 바르르 떨었다. 실케는 세스페르를 윽박지르는 여자가 반역의 혐의를 받고 있는 슈테허의 변호사 마르티나 쾰러라는 것을 알았다.
“공모했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없이 저더러 어떻게 슈테허 장군을 변호하라는 겁니까?”
“이제 제게 피고를 변호하는 방법을 묻는 건가요, 마르티나? 저도 참 출세했네요.”
“농담이나 하자는 게 아닙니다, 의원님. 위원회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정작 벵크 검사는 이 건에 대해서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잖습니까. 무슨 거래가 있었던 겁니까? 이번에도 역시 제가 알면 안 되는 종류겠죠?”
세스페르가 마편의 끝으로 마르티나 변호사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엘레아노어 세스페르와 가까이 지내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마르티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런 무례는 충분히 대수로웠다. 마르티나는 세스페르의 마편을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세스페르가 항복이라는 듯 양 손바닥을 펴서 들어 보이며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말했다.
“마르티나, 마르티나. 내 말 믿어요. 벵크 검사는 당신만큼이나 분기탱천했어요.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죠. 아시다시피 벵크는 당신보다 더 점잖으니까요. 그리고 더 부지런하기도 하죠.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거라면 자신의 능력을 돌아볼 기회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단언하건대,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거예요.”
“법정에 세워야 한단 말입니다!”
“변호사님, 알렉세예프에 대해서는 우리 베소니아에서도 적절한 신문과 조사가 있을 겁니다. 요청하시면 그 내용도 서면으로 보내드릴 수 있고요.”
드미트리 대사가 중재에 나섰다. 드미트리의 옆에 앉아 있는 알렉세예프라는 남자는 자신이 이토록 열띤 언쟁의 중심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대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토메차노스티야.”
드미트리 대사가 굵은 두 눈썹을 찌푸려 붙이고 소리 없이 알렉세예프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었다. 세스페르와 실케는 베소니아어를 몰랐으므로 남자의 말과 대사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르티나는 달랐다.
“‘달아나지 않는 한’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어··· 알렉세예프 씨는, 그러니까 농담을 한 겁니다. 분위기가 좀 험악해야지 말이지요.”
드미트리가 황급히 변명했고, 알렉세예프는 감명 받았다는 것처럼 마르티나를 경외감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마르티나 쾰러는 알렉세예프를 향해 삿대질하며 방 안의 다른 이들에게 소리쳤다.
“이자는 유령이에요. 지금 놓아주면 연기처럼 흩어질 겁니다. 말릭 세르게예비치 알렉세예프는 유령 같은 작자란 말입니다!”
“과장이 심하시군요, 변호사님.”
“과장하는 게 아닙니다. 이자가 지난 삼십 여 년간 살아온 행적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보면, 의원님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말릭 어쩌고 하는 건 심지어 본명도 아닐 거예요. 공화국이 말릭이라는 유령의 혀끝에 놀아나고 있어요!”
말릭이라는 가명의 유령이 빙긋 웃었다. 그 은밀한 미소를 본 건 실케 슈뢰더 소장뿐이었다. 오래 전 요새에서 감옥으로 용도가 변경되고, 혁명이 발발하던 당시에는 잡범과 사상범이 구분 없이 수감되어 있던 기센하임 감옥에서는 이제 반역, 반혁명, 내란 선동의 죄목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실케는 혁명재판소가 끊임없이 밀어 보내는 죄수들이 점차 자신의 손을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같은 죄인의 범람에 책임이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스페르였다. 실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세스페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쾰러 변호사 개인의 의견은 공화국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미하일로프 대사님.”
“이해합니다. 어느 집단에나 튀는 인물들이 있는 법이죠. 저는 이만 일어나 봐야겠습니다. 나누시는 말씀 가운데 이미 결정된 사안 외에 새로운 내용이 있거든 제게도 알려주십시오.”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릭 역시 그를 따랐다. 쫓아가려는 마르티나를 향해 실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말릭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반 바퀴를 돌아 마르티나를 향해 섰다.
“제가 충고 하나 해드리죠.”
말릭의 입에서 유창한 게헤만어가 흘러나오자 방 안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드미트리까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말릭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공화국이 민중들에게 사법적 판단을 위탁한 이상, 진실이란 건 누가 더 많이 믿는가의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쾰러 변호사님, 더 늦기 전에 이렇게 외치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가장 놀란 건 물론 마르티나였다. 증인 신문에서 말릭은 게헤만어를 조금도 하지 못하는 이가 어떻게 슈테허와 내통했다는 것인지 의문을 자아낼 만큼 철저히 통역관을 통해서만 말했던 것이다.
“의회 만세, 인민 만만세!”
팔을 들었다 내리며 만세를 외친 말릭은 킬킬거리며 소장실에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드미트리를 따라잡으면서도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성큼성큼 계단을 밟는 드미트리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방금 발언은 아주 위험했소. 이런 식의 돌발행동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소이까?”
“입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빠진 얼굴들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지요.”
말릭의 베소니아어는 완벽했다. 그는 하임벤어를 모국어로 삼는 화자들이 주로 범하는 발음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임벤어 특유의 억양과 강세도 깨끗이 지워냈다. 드미트리는 말릭이라는 남자의 능력에 어쩔 수 없이 감탄하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요?”
“어디든 임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겠지요.”
“리카드 황제께선 복이 많은 분이오. 당신 같은 사람이 있으니.”
말릭은 고개를 꾸벅이고 총총걸음으로 감옥을 나섰다. 그는 드미트리를 앞질러 나아갔다. 햇살을 받아 희미해진 말릭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가운데, 드미트리 미하일로프 대사는 불현듯 자신이 더 이상 말릭의 얼굴을 명확히 떠올려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
“국경으로 보내달라는 거, 확실한가?”
“고집을 꺾을 수가 있어야지요.”
마르셀의 물음에 뤼시앵이 지쳤다는 듯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안체는 집무실의 양탄자 위를 뱅글뱅글 맴돌며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는 것처럼 부르쥔 두 주먹을 흔들었다.
“보내주세요. 거기에 마물들이 들끓는다면서요.”
“안체, 앉아 있거라. 아저씨 머리 아프다.”
마르셀이 마주 앉은 뤼시앵의 어깨 너머로 목을 빼고 말했다. 안체가 책상을 향해 걸어왔다. 집무실을 맴돌았던 게 문제였는지 그녀는 조금 휘청거렸다.
“제 몸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다 나았어요. 보세요!”
마르셀은 아직 실밥 자국이 남아있는 안체의 얼굴과 이질적인 오른쪽 눈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체는 어느새 꺼내 든 투창기를 책상 위로 짧게 휘둘렀다. 뤼시앵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마르셀은 펼쳐놓은 책의 고랑 위로 수줍게 안착한 꽃봉오리와 무탈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병을 보고도 별로 감명 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앉으래도.”
“아저씨도 똑같아요. 자기는 위험한 임무에 뛰어들면서 저는 어린애 취급하는 거요. 한 번 더 보여드려요? 이번에는 잎을 노려서···”
“앉아, 안체! 앉아!”
그러나 안체는 다시 한 번 투창기를 휘둘렀고, 칼끝은 보기 좋게 꽃병의 목을 때렸다. 격정적으로 공중제비를 돌며 날아간 꽃병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안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치울 거였어. 깨 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그 다음 벌어진 촌극에서 뤼시앵만이 배역을 맡기를 거부했다. 안체가 꽃병 조각들을 주워 담으려 들었고, 마르셀은 이를 말리다가 하인을 불러 치우게 시켰고, 안체는 다시 하인으로부터 쓰레받기를 뺏어 들다시피 넘겨받고 바닥을 쓸었다.
안체가 집무실을 나설 때 문설주에 어깨를 부딪는 바람에 쓸어 담았던 꽃병 조각이 다시 바닥에 흩어졌다. 마르셀은 그 장면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안체의 한쪽 눈에 맺힌 눈물도, 마르셀은 보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안체가 잠시 집무실을 나가자 마르셀이 입을 열었다.
“감옥에서 무슨 약을 찾았다던데.”
“별 거 아닙니다. 두통약이에요, 두통약.”
“그래, 아주 중독성 있는 두통약이었던 모양이지. 간수를 붙잡고 애원할 정도였으니 말이야.”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저야 그런 취급에 익숙한 사람이니까.”
간수들이 뤼시앵의 그런 부탁을 무시할 정도로 냉혹하다는 건 마르셀도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런 냉혹함이 뤼시앵의 재활을 도왔다는 것은 그가 알 리 없었다.
“나는 케넌하고는 달라. 불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몸도 성치 않은 자네들을 던져 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원래 소속되어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이고르가 먼저 가 있을 거야. 이고르를 도와서 그간 밀렸던 일들을 처리하게. 자네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의뢰를 맡아. 한 번 더 말하겠네. 자네들의 상황을 십분 고려해서 무리하지 말란 말일세.”
뤼시앵이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건방진 표정 아래에는 마물이 들끓는 국경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깔려 있었지만, 마르셀은 알아채지 못했다. 마르셀은 책상에 상체를 바싹 붙이고 뻗은 손으로 뤼시앵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케넌이 남긴 메모를 살펴보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자네의 근무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더군. 고쳤으리라 믿겠네. 만약 이번에도 안체에게 일을 떠넘기면 기필코 자네를 죽여 버릴 테니 명심하게.”
“예, 단장님··· 저도 죽기는 싫으니, 뭐······.”
“똑바로 답해.”
“이해했습니다. 저도 그간 심경에 변화가 있었고, 그런 일이 다시 있진 않을 겁니다.”
안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르셀이 뤼시앵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뤼시앵은 하얗게 손자국이 난 자신의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짐 싸. 로스키르헨으로 돌아간다.”
기대로 빛나던 안체의 눈에 실망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그녀는 입을 앙다물고 마르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책상의 모서리가 그녀의 허벅지를 아프게 할퀴었지만 안체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실망하실 거예요. 아버지께선 제게 불굴의 정신을···”
“울리히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면 그런 말은 못할 게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이 서로 부딪쳤다.
“저도 알아요! 다리를 다치시고 나서도 사냥에 나서셨죠. 그러다 감염되었고 동료의 손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거기엔 더······.”
뤼시앵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안체가 덧붙였다.
“알아요. 헬라이드 씨가 말씀해주셨어요. 그··· 손녀를 죽인 남자가 자기라고. 그래도 그건 아버지의 선택이었어요. 그리고 헬라이드 씨는 저를 구했어요.”
비록 마르셀은 손녀를 죽였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지만, 오펜하른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안체를 건져 올린 것이 웨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 그 얘긴 나도 들었다. 웨인은 훌륭한 사냥꾼이지. 안체, 내가 다른 훌륭한 사냥꾼들을 내버려두고 너를 위험에 빠트렸던 놈을 여전히 네 스승으로 두는 데에는 이유가···”
“스승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스승님의 지시를 어기고 무모하게 행동했어요.”
“그런 무모한 행동을 옆에서 막으라고 스승이 있는 거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로스키르헨으로 돌아가. 거기서 지금 몸에 익숙해진 다음, 파견 건에 대해선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지금 몸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전 예나 지금이나 안체 하르트만이라고요.”
“달라!”
수틀릴 때면 버럭 고함을 지르는 버릇은 마르셀이 결코 고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안체였으므로 그는 곧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후회했다. 그는 탈력한 목소리로 조곤조곤히 말했다.
“그걸 인정해야 해. 네가 강하다는 건 나도 안다. 약하다고 생각했으면 로스키르헨으로 돌려보내지도 않았겠지.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고 느꼈다면 미안하구나. 보육원 애들 상대하는 게 버릇이 돼놔서······. 뤼시앵을 네 스승으로 계속 두는 건, 그에게서 뭔가 배우는 게 있었으면 해서야.”
그 때까지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던 뤼시앵은 대화의 차례가 돌연 자신에게 넘어온 탓에 앞선 대화를 반추하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잠깐의 공백 덕분에 뤼시앵은 평소처럼 무심하게 답하는 대신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극복하려 들지 마. 그게 널 잡아먹고 말 테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어떻게 해야 제가··· 이걸, 이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데요?”
안체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눈을 가리켰다가 종내에는 펼친 손바닥으로 얼굴 전체를, 몸 전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안체의 투창은 오십 보 떨어진 거리의 표적을 맞히지 못했다. 그녀의 오른 어깨와 팔, 허벅지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은 남은 눈마저 잃고 어둠 속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뤼시앵이 눈을 잃은 적은 없었지만 그는 공포의 속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뛰어넘으려 할 때마다 더 높아지는 공포의 벽에 수십 번 머리를 부딪친 끝에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받아들여. 그게 뭐든 간에, 받아들이라고.”
- 작가의말
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리히의 죽음과 여기에 대한 안체의 이해를 쓰는 과정에서 중대한 실수가 있었습니다. 안체와 뤼시앵의 대사, 그리고 마르셀의 반응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 2018.12.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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