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2장 - 매듭을 끊다(1)
13막 찬탈
2장 매듭을 끊다
“병이 낫기 전에 열이 제일 심하게 끓는다.”
헝겊으로 곡도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올가가 말했다. 헝겊은 죽은 들개인간의 옷에서 뜯어낸 것이었다. 펠햄의 자경단이 의뢰를 맡기며 그들에게 전해준 목격담은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경단은 주민들을 습격한 마물이 늑대인간이거나 그보다 더 사악한 무언가임에 틀림없다고 두려움에 떨며 설명했다.
그러나 올가와 앰버가 잔뜩 긴장한 채로 야영지를 정탐한 끝에 마주한 실상은 들개인간 네 마리가 전부였다.
“그걸 이기면 완쾌되고 거기서 지면 죽는다.”
앰버에게는 이를 반박할 만한 의학적 지식이 없었으므로 잠자코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관용적 표현의 다양한 변주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무방했을 테지만, 그걸 지적할 만한 문학적 소양 또한 앰버에게는 없었다.
올가가 간략하게 얘기를 마무리했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술통에 구멍을 내 버린 거야. 가만히 뒀으면 조용히 익어갔을 술이 이제는 온 사방에 다 흘러넘치게 된 거지. 파스귄트에서 있었던 일이랑 비슷해. 내버려두는 게 최선이었는데 참을성 없이 굴고 말았던 거야.”
사냥꾼들이 군주들의 군주라는 노블 다이스를 줄기차게 공격해 약화시킨 결과로 마물들은 오히려 더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책 없는 확장을 통제할 힘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올가는 고향인 베소니아의 역사를 떠올렸다. 강력한 중앙 집권 세력이 사라지면 그 진공 속에서 지방의 군벌들이 세력을 형성했다.
“그 일은 우리 잘못이다.”
“역시 그렇지? 신부가 우릴 의심했을 때 그냥 떴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오지도 아직···”
“거기 사람들과 거래한 거. 그렇게 했으면 안 됐다.”
감염된 사람들을 헛간에 가둬놓은 마을을 발견했을 때, 삼인조의 용병이 가장 먼저 보였던 반응은 노다지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위협적인 종류의 마물도 아니었고, 포상금 액수를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 낭독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앰버를 비롯한 용병들은 거래를 제안했다. 치료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주민들을, 오스왈드는 문제의 치료법이 나타날 때까지 상태가 나쁜 감염자들을 추려내 처리하겠노라 설득했다. 물론 치료법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용병들끼리만 있을 때 오스왈드는 이 거래를 연금이라고 표현했다.
“그 사람들이 원했던 거래였어.”
“최선을 다해서 최악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그걸 도왔고 욕심 때문이었다.”
“올가, 언제부턴지는 모르겠는데, 아니 알겠어. 그 사냥꾼 때문이지. 아무튼 그때부터 넌 자꾸 설교를 하려고 들어. 가장 성가신 점은 네가 우리말을 제대로 못 한다는 거고, 또 생각해보면 그게 제일 다행스러운 부분인 것 같기도 해.”
앰버가 쌈지에서 씹는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다른 용병들이 맡기를 거부한 의뢰는 방역관으로부터 포상금을 받고, 의뢰자로부터 웃돈을 받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남는 장사였다. 앰버는 씹는담배를 입 안에서 굴리며 들개인간들의 머리통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죽었다가 살아나면 사람은 때때로 바뀐다. 난 너희들을 만나서 좋게도 나쁘게도 바뀌었고, 막심 때문에 예전 생각이 났다. 사냥꾼 되려고 했을 때.”
“막심은 죽었잖아.”
“오지도 죽었다. 난 둘 다 고귀하게 죽었다고 믿는다. 죽음이 정해졌다면 그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아냐, 난 살 거야. 저번에 널 버리고 도망쳤던 거, 내가 왜 아직도 사과 안 하는지 알아?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똑같이 행동할 거니까.”
올가가 입에 손가락을 넣어 휘파람을 불었다. 말이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불안하게 흘기며 천천히 다가왔다. 올가는 머리통이 든 가죽 주머니를 안장에 묶었다.
“안다. 난 솔직한 네가 좋다.”
수풀에서 수상한 헐떡임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올가는 등자에 걸었던 발을 얼른 다시 내리고 곡도를 뽑아 들었다. 말이 달려온 방향과 반대쪽이었고 앰버 역시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철창을 겨눴다.
“도와주세요!”
달려온 여자의 첫 마디였다. 모래색의 풍성한 머리는 땀에 젖어 얼굴과 목에 달라붙어 있었고 금이 간 안경이 코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달리기 위함인지 치맛자락은 찢어 버렸고 맨발은 흙과 상처로 덮여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마물이 출몰하는 야산을 배회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행색이었다.
그리고 물론 앰버의 반응은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마! 물러나라고!”
“마물들이에요! 마물들이 저를 쫓아···!”
자신이 달려 나왔던 수풀 쪽을 가리키던 여자는 거기서 정말로 시커먼 형체가 불쑥 튀어나오자 허겁지겁 물러나다가 찢어진 드레스 자락을 밟고 바닥에 뒹굴었다.
“그년 잡아··· 잡으라고!”
뒤이어 튀어나온 인물도 여자였는데, 아마도 앞선 여자의 추격자였던 듯 마찬가지로 숨을 헐떡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올가는 말안장에 매달린 각등 덕분에 추격자의 행색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두 번째 여자 역시 땀에 절어 있었지만 피가 더해져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여자와 달랐다. 뒤로 질끈 묶은 붉은 머리칼이 걸어올 때마다 흔들렸고 손에 든 긴 칼은 칼집에 보관된 상태에서도 살기가 등등했다. 올가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알고 있었다.
“절 죽일 거예요. 살려주세요!”
“이거 안 놓으면 내가 죽일 거야.”
앰버가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여자를 떨쳐내며 말했다. 추격자는 하나가 아니었던지, 수풀에서 한 명이 더 튀어나왔고 이번에도 역시 올가가 아는 인물이었다. 노인은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힌 채로 숨을 색색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쥔 손으로 허공을 내저으며 말했다.
“죽이진 마시오.”
그제야 조력자로 착각했던 이들이 추격자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여자가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달아나려는 여자를 향해 앰버가 철창을 내질렀다.
“아악-!”
여자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붉은 머리칼의 추격자, 스타샤가 다가와 여자의 팔과 다리를 밧줄로 묶었다. 여자가 손을 내저으며 저항하자 스타샤가 모질게 발길질을 해댔다.
“문제 있나?”
앰버가 철창을 든 채로 멍하니 서있자 올가가 물었다. 앰버는 철창의 끝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물이 아니야······.”
스타샤가 포박한 여자를 질질 끌고 갔다. 웨인이 여자의 몸을 나무에 묶었다. 이 과정에서 또 한 번의 폭력이 동원되었다. 여자의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올가가 사냥꾼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웨인이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 바닥에 늘어놓은 도구들은 처음 보는 이도 용도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볼 만한 광경은 아닐 걸세.”
웨인이 묶인 여자의 손가락 사이에 죔틀을 끼우며 말했다. 스타샤가 여자의 상의를 찢어 입에 물렸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고, 눈물과 콧물이 어둠 속에서 번질거렸다. 웨인이 죔틀의 나사를 조이자 여자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자의 얄캉한 몸피가 무섭게 뒤틀렸다.
올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앰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앰버의 몸을 뒤로 밀며 고개를 저었다.
*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네요.”
“우려했다는 건 예상했다는 뜻이기도 하지. 노블 다이스를 몰아붙일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어.”
“국경에 누가 가있죠? 이븐이랑 뷔센은 저도 알고요.”
“아르투로, 카챠, 파트리크. 실력 있는 친구들이니 승산은 있어.”
“그야 그렇겠죠. 실력이 없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테니까.”
집게에 묻은 피를 닦던 웨인이 멈칫했다. 땅에 꽂아 넣은 인두가 식었는지 확인하던 스타샤가 웨인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얼른 말을 고쳤다.
“아니, 실력이 너무 좋아도 죽어 버리죠. 영감님이나 저나 적당히 사는 법을 아니까 목숨이 붙어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정말 이븐 말대로 세상이 멸망할 모양이에요. 노블 다이스가 헤레틱스와 손을 잡다니.”
공작이 헤레틱스가 내민 손을 마침내 잡았고, 백작은 전선의 사냥꾼들을 공격해 길을 열도록 명 받았다. 그것이 바로 야밤의 때아닌 추격전과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는 방법들을 총동원한 끝에 얻어낸 정보였다.
이븐이 교황청에서 난리를 치르는 동안, 스타샤와 웨인은 쿼그마이어 백작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스타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물들을 잡아 ‘족치는’ 방식으로는 백작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터였고, 그렇다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다. 세력을 잃고 절박해진 노블 다이스가 헤레틱스와 접촉했을 거라는 전제가 이 새로운 접근법의 근간을 이뤘다.
로지아와 헤레틱스의 연결점을 작전에 이용하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 것은 웨인이었고, 스타샤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로지아는 자신이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의 죽음을 알지 못한다는 가정 아래 여러 차례 그와의 접선을 시도했고, 결국 헤레틱스 쪽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스타샤는 내심 페르디낭 랭데 같은 거물이 걸리기를 기대했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난 건 그의 제자라는 마델라인 델라포어였다. 웨인과 스타샤를 본 마델라인은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들 두 사냥꾼은 그녀를 쫓기 전에 그녀가 이끌고 나타난 호위병들과 먼저 싸워야 했다. 물론 호위병은 완곡한 표현이었고, 실제로는 피츠독슨의 저택에서 본 것과 같은 실험체에 가까웠다.
“희망이 남아 있다면 공작의 속내를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거야. 우리 사냥꾼들이 시기적절하게 난입한다면 켈레넨스크의 일을 재현할 수도 있어.”
“마물들을 흔적도 없이 싹 쓸어버리는 거요? 희망 사항이죠. 재수 없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세상이 마물로 뒤덮이고 우리도 그 중 하나가 되는 거예요.”
스타샤도, 그리고 물론 웨인도 헤레틱스가 열망하는 ‘문’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이라는 것이 열렸을 때 그것에 접근하는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켜 버릴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토록 증오해온 마물이 되고 마는 것.
그러므로 난제를 해결할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스타샤와 웨인은 그게 누구일지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에게 드리워진 불길한 운명을 소리 내어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필요해서 했다지만 뒷맛이 좋지 않군.”
웨인이 나무에 기대어 늘어져 있는 마델라인을 보고 말했다. 스물하고도 대여섯 살쯤.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몇 가지 ‘기술’이 들어가자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술술 풀어놓았다. 스타샤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치아들을 발로 굴렸다.
“제가 사냥꾼 노릇을 하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미친 인간은 마물보다 더 지독하다는 사실이에요. 마물 죽일 때도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조금도 안 드는데 그보다 더 악질인 놈을 고문한다고 새삼 죄책감을 느껴야겠어요?”
스타샤는 그녀답게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했다. 이를테면 매듭을 푸느라 진땀을 빼는 대신 칼로 내리쳐 끊어 버리는 식이었다.
“단검 줘요. 제가 끝낼게요.”
“아냐, 스테이시. 내가 하지. 자넨 젊잖아.”
그게 당최 무슨 상관이냐는 듯 스타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끔찍한 짓을 자네보다 갑절은 더 저질러 왔어. 거기에 하나 보탠다고 달라질 건 없지.”
“떨리는 손으로 잘도 한 번에 끝내겠네요. 이리 줘요.”
스타샤가 웨인의 손에서 단검을 뺏으려고 옥신각신하는 동안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올가가 다가왔다. 올가가 곡도를 빼 들었을 때까지도 둘은 그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허윽- 헉······.”
마델라인의 입가에 피거품이 끓었다. 죽은 몸의 열린 구멍에서 고약한 액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올가는 피 묻은 곡도의 끝을 시체의 옷깃에 문질러 닦고 물었다.
“국경으로 가나?”
그녀가 이어서 한 말은, 앰버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충분한 상의를 거친 끝에 나온 것은 아닌 듯했다.
“우리도 돕겠다.”
- 작가의말
스타샤를 주인공으로 라노벨을 쓴다면(물론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제목은 ‘붉은 머리 사냥꾼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해내고도 어쩐지 뿌듯해서 그냥 적어봤습니다.
“편자”를 “등자”로 고쳤습니다. 이런 실수가 제법 빈번하네요. - 2019.2.10.7:21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