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2장 - 매듭을 끊다(2)
13막 2장(2)
*
해골과 진주, 왕관과 검. 이븐은 누렇게 손때 탄 카드에 검은 잉크로 인쇄된 문양들을 눈으로 훑었다. 검이 가장 낮고 진주가 그 다음이었다. 왕관이 진주보다 높았지만 같은 격수에서 경합을 벌일 때는 검이 왕관을 이겼다. 그러나 그 모든 문양들도 해골 앞에서는 뼈도 추리지 못했다.
아르투로가 쥐고 있던 카드들 가운데 두 장을 탁자 위로 내려놓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카프리초스. 내가 이겼군.”
“그래, 축하해.”
이븐은 자신이 내려놓았던 카드를 더미 속으로 밀어 넣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잠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르투로가 잽싸게 이븐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는 이븐의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들고 탁자 위의 카드들과 맞추어 보았다. 아르투로는 곧 매섭게 이븐을 추궁했다.
“타우로마키아잖아. 왜 해골 6을 안 꺼낸 거야?”
“무슨 마키아라고?”
“타우로마키아. 같은 숫자 한 쌍에 같은 숫자 세 개. 타우로마키아가 카프리초스보다 높다고.”
“내가 그걸 몰랐군. 잊어 버렸어.”
이븐은 연기에 성의를 곁들일 걸 그랬다고 곧 후회했다.
“일부러 그랬군. 고의로 져준 거야.”
“뭐? 아냐. 그럴 리가. 난 최선을 다했어.”
“한 판 더 해.”
이븐이 내쉰 한숨에 탁자 위의 카드들이 흐트러졌다. 그는 자신이 국경으로 오기 전까지 아르투로를 상대했을 카챠에게 존경심이 들었다가, 카챠 성격에 한가로이 카드나 쳤을 리 없다는 데에 곧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아르투로의 괴벽을 부채질했을 거란 생각에 이르러서는 카챠가 미워지기까지 했다.
“자네가 이길 때까지만 하자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제대로 이길 때까지야. 이런 비열한 수작은 용납 못 해.”
“규칙을 숙지하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것도 실력이지. 자네가 실력으로 이긴 거야.”
진심으로 자신의 패배를 상대에게 납득시키려 노력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븐은 얼른 탁자 위의 카드들을 모아 고집스럽게 품에 안았다. 물론 아르투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내가 이겼으니까 한 판 더 해. 승자의 권리로 말하는 거야.”
“아르투로 자넨 떼쟁이야.”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군. 집념이라고 해두지. 이리 줘. 내가 섞을 거야.”
이븐은 카드를 던져주고 담배를 빼 물었다. 도박판깨나 드나들었을 법한 아르투로였지만 담배 연기라면 질색을 했다. 언젠가 큰돈이 걸린 판에서 진 적이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대가 담배 연기로 정신을 사납게 했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르투로는 손으로 연기를 날려 보내며 이븐의 몫으로 카드를 나눠 주었다.
또 다시 높은 패를 쥐게 된 이븐이 절망하던 차에 막사의 천으로 된 문이 젖혔다.
“나와 봐.”
“카챠, 내 구세주시여.”
이븐은 얼른 더미 속으로 자신의 패를 집어넣고 카챠의 뒤를 따라 막사 밖으로 나갔다. 카챠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은 전선 쪽이 아닌 서녘이었다. 이븐은 카챠가 건네준 단망경에 눈을 대고 먼 곳의 어둠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뭔 것 같아?”
이븐은 카챠의 음성에서 긴장한 기색을 읽었다. 긴장이 팽팽하게 내려앉은 고요 속에서 먼 곳의 불길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마치 길게 누운 밤의 식도가 어둠을 삼켜 연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떼 지은 마물들이 벌레같이 들끓으며 내달려 오고 있었다.
“확실히 병사들은 아냐. 네발로 뛰어다니진 않을 테니까. 말을 탔다고 하기에도 높이가 낮고··· 뭐든 간에 엄청나게 많은 건 분명해 보이네. 적어도 스물, 넉넉잡아 서른.”
이븐의 눈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형체를 식별해낼 수 있었지만, 그들 정체를 항마연구원이 애써 명명한 분류법 가운데 위치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다 이븐은 문득 마물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죽일 놈, 처죽일 놈, 잘근잘근 씹어 죽일 놈이 그것이라는 데릭의 선구적인 분류법을 떠올렸다.
이븐은 카챠의 손에 들린 조준경 달린 사냥총을 보고 물었다.
“거리가 닿겠어?”
“아직은.”
“정말로 삼십 마리쯤 된다면 둘러싸이는 건 시간문제야. 놈들이 저길 넘으면 카챠는 올라가서 엄호해줘. 이븐이랑 내가 버티고 있을 테니까 우리는 안에서, 너는 밖에서부터 깎아나가는 거야.”
막사에서 나온 아르투로가 빠르게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막사의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문을 여미고, 다른 제안이 있느냔 뜻으로 이븐과 카챠에게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카챠가 나무통 위에 사냥총을 올려놓고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오기 전에 다섯 마리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
“들었지? 이븐, 얼른 이쪽으로 와. 시야를 밝혀야지.”
아르투로가 손짓으로 이븐을 불렀다. 그는 야영지의 한편에 놓여 있던 나무 궤짝을 들어 옮겼다. 뚜껑을 열자 톱밥 속에서 주먹만 한 포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투로는 하나를 꺼내 이븐에게 건네고 발아래를 가리켰다.
그들의 발치에 놓인 기구는 대포를 축소해 놓은 듯한 모양새였는데, 이븐은 그렇지 않아도 그 용도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르투로는 용도를 상세히 설명해주는 대신 실전에 필요한 내용만 빠르게 읊었다.
“장약하고 탄을 잰 다음 다시 밀어 넣어. 끈을 당기면 탄이 날아갈 거야.”
이븐은 별 수 없이 소형 대포의 꽁무니를 당겨 아르투로의 지시대로 탄을 넣었다. 이븐은 실린더처럼 밀려 나온 꽁무니를 다시 넣고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아르투로는 계측기에 눈을 대고 마물들을 응시하다가 빠르게 말했다.
“이백. 눈금 이백에 맞춰. 각도는 건드리지 말고.”
눈금과 각도. 이븐은 원리를 이해하는 대신 필요한 것만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피뢰침의 원리를 이해한다고 번개를 더 잘 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아르투로가 돌연 벼락처럼 소리쳤다.
“당겨!”
끈을 당기자 탄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탄은 바닥에 떨어져 잠시간 굴렀다. 그제야 이븐은 시야를 밝힌다는 아르투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바닥에 구르던 탄에서 화염이 흘러나오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던 것이다.
불을 둘러싸고 벌이는 악마들의 집회처럼, 마물들의 형상이 드러났다.
탕-
카챠의 사냥총에서 탄이 쏘아져 나가고 선두에 섰던 마물이 고꾸라졌다. 카챠가 사용하는 사냥총의 원리 또한 이븐이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챠는 한 발을 쏘자마자 약실을 꺼내 갈았는데, 이븐은 대구경의 탄을 정확하게, 그리고 동시에 신속하게 쏘기 위한 방법이리라 짐작했다.
“백오십. 십 도 정도 올려서.”
“정도라고?”
“그냥 십 도 올려. 당겨!”
다시 한 번 먼 곳의 어둠 속에서 화염이 치솟고, 이어서 카챠의 사냥총이 불을 뿜었다. 마물들은 이제 좌우로 산개하며 속도를 더 높이기 시작했다. 카챠는 빈 약실을 집어 던지고 또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아르투로의 지시가 다급해졌다.
“백. 각도는 적당히 알아서 해. 이제 대충 보일 것 아냐. 당겨!”
적당한 각도로 쏘아 올린 조명탄이 이번에는 허공에서 발화해 마물들의 머리 위로 화염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제 곧 마물들이 당도할 터였다. 적은 한 종류가 아니었다.
탕-
“카챠!”
“알아!”
아르투로의 재촉에도 카챠는 자리를 뜨지 않고 다시 한 번 마물들을 겨눴다. 그녀는 허공으로 도약한 유귀 한 마리를 거꾸러뜨리고 나서야 이동할 채비를 했다. 사냥총을 어깨에 멘 그녀는 품 안에서 우의 같은 망토를 꺼내 얼른 몸에 둘렀다. 카챠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 우리 차례군. 불을 밝혀.”
카챠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아르투로가 등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븐은 궤짝 속에 남아 있던 조명탄 하나를 꺼내 던지고 총구를 겨냥했다. 화광이 눈을 찌르고 사위의 어둠이 펄쩍 뒤로 물러났다.
“그런 방법도 있겠군.”
마물들이 내뿜는 거친 호흡이 지척에서 들렸다. 이븐은 부릅뜬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다가 필살의 확신이 서는 그 즉시 발포를 시작했다. 여우나 개 따위를 쏘아 맞힌 듯 마물들의 기다란 주둥이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르투로는 말뚝창을 두 손으로 쥐고 몸을 뒤로 물린 채, 마물들이 충분히 다가올 때까지 신중히 기다렸다. 그의 창이 노린 첫 번째 제물은 이제 북부에서 찾기 힘들어진 늑대인간이었다. 아르투로는 응축한 힘을 폭발적으로 발산하며 창을 내질러 늑대인간의 턱 아래를 꿰뚫었다. 징이 박힌 장화로는 지면을 단단히 붙들고, 오른손으로는 말뚝창의 장치를 조작했다.
투쾅-
창의 끝에서 말뚝이 쏘아져 나가며 늑대인간의 머리가 분리되어 날아갔다. 식도 따위가 함께 뜯겨나가 허공에서 도는 마물의 머리통은 마치 심지를 길게 늘어뜨린 대포알처럼 보였다. 아르투로는 창의 자루를 휘둘러 접근한 마물들을 물림으로써, 긴 무기 사용자답지 않게 포위전 또한 문제없음을 증명했다.
오히려 총을 든 이븐이 접근한 마물들을 처리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권총에는 떨어뜨렸던 것을 이고르가 주워서 다시 돌려준 역사가 있었다. 회전식 연발 권총의 약실에 후추통이라는 별명이 있었다면, 이 산탄 권총의 약실은 가히 술통이라 이를 만했다.
탕-
달려든 아귀의 머리가 썩은 호박처럼 터져 나갔다.
“내기할까?”
이븐은 등 뒤에서 아르투로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냥을 위험한 유흥쯤으로 여기는 것은 긴장과 피로로 점철된 생을 제정신으로 버텨내기 위해 사냥꾼들이 택하는 방식이었다. 사냥꾼들에게서 유달리 이해하기 힘든 기벽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것 역시, 유혈이 낭자한 생애를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내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이븐은 총열로 흑표귀의 머리를 갈기며 마주 소리쳤다.
“뭘 걸고?”
“포케르 열 판!”
“내가 이기면?”
“다섯 판으로 줄여주지!”
이븐이 적절한 욕설을 찾아 혀로 입천장을 더듬는 동안 아르투로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이븐은 재빨리 다음 마물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아귀의 목이 옆으로 꺾이며 뇌수가 쏟아졌다.
“승자가 우리 둘 중에 나올 것 같진 않은데?”
이븐의 말을 확인시켜주듯 카챠의 엄호 사격이 이어졌다.
*
해가 짙은 구름 뒤에 가려 마물들의 시체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븐은 머리 없는 사체의 두 다리를 잡아끌어 무더기 위에 쌓았다. 야영지에 당도하기 전 카챠가 저격으로 제거한 마물까지 도합 스물네 마리였다. 아르투로는 잔뜩 지쳐서 이븐이 시체를 처리하는 양을 지켜보며 힘없이 말했다.
“부정 출발이야. 인정할 수 없어.”
“카챠, 승자의 권리로 한 마디 해줘.”
카챠는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다가 둘의 눈치를 살피고 영민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카드놀이 금지.”
“아무도 날 이해 못 해. 난 답을 찾으려고 카드를 치는 거야. 확률의 신성한 기하학··· 너희들은 다 한패야. 한패··· 한 판··· 한 판?”
이븐은 주저앉은 채로 멋대로 중얼거리는 아르투로를 내버려두고 카챠의 옆에 다가붙었다. 그는 쌓아놓은 마물들의 시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잡다하게 섞였어.”
그 마물들은 썩은 시체에 홀리는 부류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고기를 탐내는 족속이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카챠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븐의 머릿속에 있는 것과 동일한 결론을 도출했다.
“지시를 받은 거야.”
이븐이 그런 유의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마물에 대해 언급하려던 찰나, 카챠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또 온다.”
“뭐? 잘못 봤다고 말해, 당장.”
아르투로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르투로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 카챠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이븐은 박명 속에서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물들에게서 지리멸렬한 동시에 효과적인 전략을 읽어냈다.
“파상 공세로군. 지치게 할 심산인 거야.”
이븐이 얼굴을 때리는 물방울의 감각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카챠가 재빨리 어깨에 메고 있던 사냥총을 거꾸로 들었다. 이븐은 내뻗었던 손을 거두고 주먹을 쥐었다. 손 주름 사이로 물기가 잡혔다. 상황을 정리하고 지시를 내린 건 이번에도 역시 아르투로였다.
“카챠, 뷔센한테 도움을 요청하러 가. 지금 당장. 이븐, 총 없이 싸울 수 있나?”
“얼마든지. 문제는······.”
이븐은 카챠가 날렵하게 말에 올라타는 것을 지켜보며, 마물들의 등장으로 끊어졌던 사고를 재개했다. 다양한 종류의 마물을 군사처럼 부려 공세를 퍼붓도록 할 수 있는 이는, 이븐이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노블 다이스가 사냥꾼들을 노리고 있다.
“뷔센이 있는 쪽도 우리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단 거야.”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