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3장 - 답 없는 메아리(1)
13막 찬탈
3장 답 없는 메아리
사명감도 있었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과 조건 따위를 잊고 가망 없는 싸움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복수심이었다. 짓무른 팔과 다리에서 풍기던 고약한 죽음의 냄새, 찢어진 배가 꾸역꾸역 토해내던 내장··· 그리고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던 전우의 마지막. 잊을 수 없는 풍경들에 등을 돌리면 그건 정말로 잊을 수 없게 되고 말 터였으므로, 뷔센은 싸움을 택했다.
펼쳐놓은 책의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 게으르게 뒤집어 놓으면, 책이 멈춘 시간을 기억하게 된다. 뒤집힌 책 위에 쌓인 시간의 무게가 용서 없이 책을 눌러, 펼쳐 들 때마다 멈췄던 페이지가 낯익은 얼굴로 기다리는 것이다. 뷔센은 그럴 수 없었다. 거기에 자신의 죽음이 적혀 있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예정되어 있든, 그는 페이지를 넘겨야 했다.
쇄도해오는 산성 용액, 헛디딘 발, 삭아서 힘없이 부서지던 지붕의 박공··· 그리고 추락의 감각.
겹겹의 허공이 등을 무섭게 때리고, 분음의 매 순간 자신과 결별하는 낙하의 감각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몸의 모든 장기가 잘게 쪼개어져 피부를 팽팽히 뚫고 나가려는 듯한 그 야릇하고 기이한 쾌감, 발이 아무것도 딛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오는 묘한 해방감, 그리고 허락되지 않은 비행의 대가로 몰아치는 격통.
뷔센은 땅에 허리가 닿는 순간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생생히 들었다.
“피로하신 듯하여 깨우지 않았습니다.”
소스라쳐 선잠에서 깬 뷔센을 향해 파트리크가 말했다. 뷔센은 외투의 안주머니를 더듬어 진통제를 꺼냈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어찌나 경이로운지, 이제 그의 혈관은 주삿바늘에 저항할 만큼 튼튼해져서 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살아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거 알아?”
뷔센이 빈 앰풀을 바닥에 던지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익숙한 몸짓으로 약물을 들이켰다. 꿀떡이는 소리를 연거푸 내던 뷔센은 머리를 떨며 말처럼 투레질했다.
“사람들은 언젠가 하늘을 날게 될 거야.”
“기술의 발전은 우릴 매번 놀라게 하니까요.”
파트리크가 엄숙하게 대꾸했다. 훤칠한 키와 짧게 깎은 금발, 그리고 파트리크라는 이름까지. 파트리크의 의도적인 오독에 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자연스럽게 굵은 음성 때문에 그녀의 정체는 쉬이 읽혔다.
“그때가 되면 누구도 떨어지지 않겠지. 떨어지면··· 많이 아프니까······.”
말을 끝낸 뷔센이 몸을 들썩이며 웃는 바람에 파트리크는 대꾸하지 못했다. 뷔센은 검을 짚고 일어나려다 수중에 검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휘청거렸다. 그는 바닥에 얌전히 누워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빗발이 미쳐 씻어내지 못한 반원형의 둥근 칼끝이 피와 기름에 절어 번들거렸다.
“오늘이 며칠이지?”
“7월 22일입니다.”
“그럼 아직 건너뛰지 않았군.”
파트리크는 익숙한 문답이 의식의 빈 부분을 확인하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다. 약에 취해 곧잘 헛소리를 지껄이곤 하는 이 사냥꾼에겐 목숨을 잃는 일보다 자신을 잃는 일이 더 두려울 터였다. 바로 그 때문에 뷔센은 죽을 것처럼 싸웠다. 마물을 상대하는 뷔센의 모습에는 사냥에 잔뼈가 굵은 파트리크마저 섬뜩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르투로와 합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파트리크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엇갈릴 수도 있어. 기다리면 돼.”
또 다시 의미 불명의 말을 늘어놓은 뷔센은 손차양을 하고 먼 곳을 응시했다. 하늘엔 온통 먹구름뿐이었기에 그가 손으로 가린 건 햇살이 아닌 빗살이었고, 시계가 어둡고 흐려 별 효용은 없었다.
“왕자님이 백마를 타고 오시는군.”
파트리크도 뷔센의 시선을 따라 그가 발견한 것을 곧 찾아냈다. 빗발을 뚫고 말을 내달려 오는 사람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하얀 말이 진흙길을 박찰 때마다 두 갈래로 땋은 갈색 머리칼이 채찍처럼 들썩였다.
“증명.”
뷔센이 검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대며 말했다. 파트리크도 쇠스랑의 갈라진 끝을 맨손으로 잡고 섰다. 말을 타고 도착한 카챠도 두 사냥꾼의 조용한 의식에 참여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탄환을 뷔센에게 던져 주었다.
탄환의 재질과 펼쳐 든 카챠의 손바닥을 확인한 뷔센이 말에 올라탔다. 안장의 용수철이 삐걱거렸다.
*
“잔베르에서 몇 마리를 잡았다고?”
기진맥진해서 진흙 속에 반쯤 파묻힌 채로 뻗어있는 아르투로가 물었다. 땅은 빗물과 핏물로 잔뜩 질어져 있었다. 이븐은 젖은 담배의 매캐한 연기 때문에 콜록거리다가 목을 가다듬고 답했다.
“아흔 마리 정도.”
“맙소사.”
“열흘 동안이었지. 이런 식이었다면 나도 거기서 죽었을 거야.”
“하지만 살아 있잖아.”
이븐은 자신이 올라타 앉아 있는 시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쉰까지 헤아렸을 때 그는 마물들의 숫자를 파악하는 일을 관뒀다. 불을 놓아 모조리 태워버리고 야영지를 옮겨야 할 성싶었다.
“그때야 혼자였고,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때는 이런 몸도 아니었고. 이븐은 시체귀가 할퀴어 놓은 팔뚝이 흔적 없이 아문 것을 보고 속으로 뇌까렸다. 카챠가 원군을 요청하러 떠난 뒤에 그들은 두 차례의 습격에 맞서 싸웠다. 마물들의 위력과 질은 떨어졌지만, 이븐과 아르투로가 지쳤던 탓에 길항하는 두 편 사이에는 묘한 균형이 유지되었다.
아르투로가 팔을 들어 이븐을 향해 내저었다.
“감사 인사는 접어둬. 내 일이라서 한 건데, 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함께 싸워줘서 해낼 수 있었다는 자네 말에 대한 겸양이야.”
“그런 말 한 적 없어.”
아르투로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븐은 정말 그런 말을 했을 터였다. 다만 상대의 손에 들린 패를 읽어내는 도박사처럼 속내를 들추는 그의 버릇 앞에선 그런 마음도 가셨다. 아르투로의 실없이 킬킬거리는 소리가 점차로 잦아들었다.
“제기랄.”
아르투로의 때아닌 욕지거리에 이븐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어진 아르투로의 목소리에서는 모른 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명한 울음기가 묻어나왔다.
“억울해.”
아르투로의 어깨가 닿은 물웅덩이 위로 파문이 일었다. 이븐은 웅덩이 속으로 잉크처럼 퍼져 나가는 피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븐의 접근을 깨닫지 못한 듯이 아르투로는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이로드가 옳았어. 로즈, 헤인체, 안톤, 이고르··· 비앙카 개잡놈들 전부 지옥에나 떨어지라지. 억울해 죽겠어. 우리가 여기서 마물들을 잡는다고 전쟁이 멈출 것 같나? 아냐, 우리가 외려 돕고 있는 거지. 인간의 우둔함을 얕봤어. 인간은, 인간은, 염병할 인간들······.”
아르투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꼈다.
“내가 지키려는 세상이 나를 죽이려 들고 있어.”
이븐이 아르투로의 목깃을 쥐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르투로가 기겁하며 이븐을 뒤로 밀쳤다.
“저리 꺼져! 놓으라고!”
이븐은 아르투로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옷깃을 헤쳤다. 단추가 뜯겨나가 이븐의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이븐은 볼 수 있었다. 목과 어깨 사이에 점점이 찍힌, 타원형의 상처를, 그 비밀을 머금은 불결한 잇자국을.
아르투로가 벌떡 일어나며 당혹해 있는 이븐을 뒤로 밀쳤다. 이븐은 경황이 없는 중에도 아르투로의 배를 걷어차 그를 멀찍이 날려 버렸다. 아르투로의 잇새에 걸린 찢어진 옷과 살갗을 발견한 것이 먼저였고, 왼 팔뚝의 고통을 느낀 것이 다음이었다.
진창 위에서 비척거리며 아르투로가 쥐약 삼킨 개처럼 캑캑거렸다. 그는 이븐의 살점을 뱉어내고 절망적으로 지껄였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어, 이븐. 믿어줘.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고.”
이븐은 몸을 일으키며 외투의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나 그는 권총의 손잡이를 쥘 수 없었다. 쥐더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방아쇠를 당기더라도··· 맞힐 자신이 없었다. 이븐은 빈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의 입에서 확인 사살이 가해졌다.
“물렸군.”
*
“충분하겠어요?”
“본퍼머트에 있는 광산이 문을 닫았습니다. 이건 피에르벤에서 급하게 끌어온 거예요. 메이츠니르 엽사님, 이게 최선입니다.”
코리나의 말에도 스타샤는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는 듯 손가락을 세워 눈썹을 긁적였다. 그녀가 내려다보고 있는 네모난 가방 속의 은괴들은 도열해 있는 짐마차들처럼 보였다. 알렉이 웨인과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서 입을 열었다.
“코리나 말이 맞아요, 스타샤. 저 혼자였다면 반도 못 채웠을 겁니다. 다 코리나가 피에르벤으로 달려가 줬던 덕분이죠. 아래에 깔린 은괴들은 반데인 은행에서 빌려온 건데, 그쪽에서도 회수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하는 듯싶으니 마음껏 쓰십시오.”
알렉은 말을 마치고 코리나를 향해 한쪽 눈을 깜박여 보였으나 그 장면을 본 건 스타샤뿐이어서, 그녀는 지극히 그녀답게 혀를 빼고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코리나가 장갑 낀 손 위로 맨손을 포개고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엽사님도 아시다시피 교단은 가공하지 않은 은괴를 사냥에 사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단은 머저리 똥자루들의 집합소죠.”
“본인도 교단 소속이라는 걸 잊고서 하는 말이오. 이해해주시오.”
웨인이 옆에서 점잖게 거들었다. 알렉이 스타샤의 손에 들린 은괴를 조심스럽게 뺏어 들고 가방을 닫았다. 스타샤는 알렉이 탁자 밑에 내려놓은 가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이게 먹혀야 할 텐데요.”
“은에 내성을 갖춘 마물 같은 건 없어. 회복력이 뛰어나서 그렇게들 착각하는 것뿐이지.”
“수영 좀 한다고 물에 빠져 죽지 않는 건 아니란 말이군요.”
제법 기발한 비유라는 듯 웨인이 스타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걸 백작의 주둥이에 처박을 수 있겠냔 건데······.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요, 영감님?”
“에카르트는 녹여서 들이붓는 방법을 썼더군.”
코리나가 손수건을 꺼내 벌게진 코를 감쌌다. 웨인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사과했다.
“미안하오.”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든 잊히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요. 막스도 친구들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편을 좋아할 거예요.”
스타샤는 강철처럼 강인하고 무뚝뚝해보이던 코리나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의아해진 표정이 되었다. 코리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뒤로 바싹 당겨 앉은 알렉을 지나쳐 자리를 떠나며 그녀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따라갈 거라면 지금이에요.”
스타샤의 말에 알렉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는 주점의 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코리나가 죽을 뻔했던 상황에서 막심이 구해줬던 일이 있어요. 그리고 막심도 죽기 전에 코리나한테 은괴를 구해달라고 했었고··· 생각이 많이 날 겁니다. 좋은 친구를 잃었죠. 지금도 속절없이 잃어가고 있고요. 웨인······ 이 모든 것에 끝이 있기나 할까요?”
“알 수 없소.”
웨인의 확신 없는 태도에 답답해진 듯이 스타샤가 끼어들었다.
“왜 몰라요? 이쪽이 끝나든가 저쪽이 끝나든가 둘 중 하나겠죠.”
그토록 확고하고 간명한 세계가, 노인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웨인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여전히 알렉을 상대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정답을 찾으려고 싸우는 게 아니오.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마물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말이오.”
웨인이 고개를 젖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취기가 서렸다. 술잔의 바닥에 늙고 지친 사냥꾼의 초상이 담겼다.
“우리가 싸우는 건,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오.(*)”
*마르틴 루터,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 작가의말
업로드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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