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3장 - 답 없는 메아리(2)
*
“벨레몽의 기회주의적 습성은 예하께서도 능히 짐작하고 계시리라 믿었는데요.”
“그 기회가 지금은 우리에게 있으니 그자는 우리의 편입니다, 성하.”
열린 창문으로 풀벌레 우는 소리가 틈입해 귓전을 쟁쟁히 때렸다. 바람이 불어 살리오든의 땀에 젖은 이마를 식혔다. 그녀는 손가락에 맞지 않는 반지를 엄지로 굴리며 로덴치오를 향해 다시 말했다.
“게르스트 추기경의 올곧은 성정이야말로 국무원의 부원장 자리에 적합하지 않겠어요?”
“게르스트는 싸움닭입니다. 그런 이들은 늘 소수의 편에 서서 다수를 향해 칼을 겨누는 것을 즐기며, 거꾸로 소수가 우위를 점할 때는 다시 반대편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투쟁의 사명은 그들의 뼈에 새겨져 있으며 그 자신만이 운명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지나쳐, 상명하복의 원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자들이옵니다.”
“검사성성(檢邪聖省)의 수반에는 적합하겠군요. 그 자리는 시류에 맞서 용단을 내릴 수 있는 이에게 돌아가야 할 테니까요.”
로덴치오는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여 몇 가지 단어들을 꼽아보고, 지치지도 않은 듯 긴 호흡의 문장을 막힘없이 늘어놓았다.
“스스로를 속론에 맞서 폭풍우 속의 등불을 지키고 있다(*) 여기는 이들은 정당한 징벌을 핍박으로, 교화를 강압적 교정으로 각각 분간치 아니하고 혼동하니, 그가 과연 검사성성의 수반에 적합하다 하겠습니까. 무릇 참된 목자라 함은 주의 뜻 속에 거하지 않는 가지를 불사를 줄도 알아야 할 터인데, 게르스트는 화가 많은 만큼 눈물도 많은 자이니 본뜻을 곡해할 여지가 또한 다분하다 하겠습니다.”
“케드가 여기 앉아 있을 때도 늘 이런 식이었나요?”
나이로드의 이름이 교황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로덴치오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쏘기에는 충분하고 응사를 받지 않을 만큼 안전한 자리를 가늠했다.
“그 자리가 본디 그러한 자리이옵니다, 성하.”
“그럼 추기경 당신이 서있는 자리는 어떤 곳인가요? 교황을 구슬려 그 주위를 당신의 수족으로 채우는 그런 자리인가요?”
“교황 성하께서 무거운 사명을 짊어지시기로 결단하시었을 때에, 과람하게도 키를 이 미거한 늙은이에게 쥐어주셨습니다. 신은 위난을 맞아 창졸한 가운데서도 다만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버티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음 맞지 않는 이들과 함께 일하라 하시니 신이 성하의 뜻을 감히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를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로덴치오에게서 애태우는 이의 절절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빈틈없이 세운 말의 벽으로 살리오든을 가두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요. 키는 항상 당신께서 쥐고 계셨지요. 정작 당신이 선장으로 추대한 이는 선장실에 처박아두고서 말이에요.”
살리오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보급품을 실은 마차가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차 바퀴가 새겨진 저 길이 이제는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한번 열린 성문을 다시 닫아걸기란 결코 녹록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나이로드가 그토록 버텼던 까닭이 뒤늦게 명백했다.
살리오든이 한숨을 내쉬고 나직이 말했다.
“벨레몽 추기경을 국무원의 부원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검사성성의 장관은 고심이 필요하겠어요. 드로크만을 몰아붙일 만한 배짱이 있는 인물이 필요해요.”
“이미 궁벽한 곳에 갇힌 드로크만을 더욱 몰아붙인다면 잃을 것이 더 많을 터, 재고를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로덴치오가 손을 들어 잠시간 자신의 관자놀이 부근을 짚고 있었다. 살리오든의 귀에 성서의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법관기에 이르길, 아말롯 사람 위안은 헤임족(族) 대장을 손님으로 맞게 되었는데 성난 얼굴로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에게 새 옷과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고 또 술을 먹여 재웠다 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위안은 자기 딸을 시켜 동침하게 한 뒤 대장의 목을 베도록 했지요. 나는 어렸을 때 미사에서 그 얘기만 나오면 귀를 닫았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살리오든의 붉게 핏발선 눈이 로덴치오를 향했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선지자 예레미나는 그 일을 기록하면서도 딸의 입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로덴치오는 살리오든이 성서의 알레고리 속에서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키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제 추기경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있었다.
“성하께선 선택을 하셨습니다. 어찌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하려 하십니까?”
“당신은 그걸 선택이라고 부르는군요. 나라면 강요라고 부르겠어요.”
“두려움입니까? 성하의 총명함을 가리는 것이 과연 두려움이란 말입니까? 과오를 늦게 깨닫고 그 책임을 제게 미루시려 한다면 차라리 비천한 이 늙은이의 목을 베소서.”
“추기경 당신께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셨으면 됐을 일이에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당신은 언제나 뒤에 서기를 원하셨으니까. 비겁함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세요?”
로덴치오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랜시스 성당의 궁륭에 가득한 벽화 가운데 어디에도 그가 택한 길을 예언한 그림은 없었다. 아주 작은 암시조차 없었다. 이디나르가 박해자들에 의해 고난을 겪고, 고탄이 조각배에 몸을 실어 달아나는 모습들······. 그러나 그 모든 환난은 항상 영광을 예비하고 있었다.
로덴치오는 영광을 믿지 않았다.
“영화는 내 이루려는 바 아니니, 다만 오랜 말씀이 유구히 이어지기를 기원하노라. 신은 성직에 몸을 담은 이래로 단 한 차례도 부귀와 일신의 안녕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교단입니다, 성하. 오로지 교단을 보존하는 것만이 신의 노구에 아로새겨진 사명이옵고···”
“당신의 교단이겠죠, 로덴치오. 누구의 것도 아니라 바로 당신의 교단 말이에요.”
살리오든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떨궜다. 말뿐인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로덴치오에게는 허락된 말의 힘이 그녀 자신에겐 없었다. 살리오든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룬발트가 드로크만과 밀회를 가졌다고 들었어요.”
“그룬발트 추기경이 그 일로 제게 찾아왔으니 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추기경 당신께 말이지요.”
“그러하옵니다. 겁 많은 이들은 대체로 조심성도 많아 사람을 가리는 법이지요.”
아니, 겁쟁이조차도 당신이 실세라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살리오든은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고 체념한 어투로 물었다.
“그룬발트가 뭐라고 하던가요?”
“드로크만이 그룬발트더러 헬바르드 대공의 동태를 살피는 일을 맡으라고 한 모양입니다.”
“황제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는군요. 황제의 입김을 빌려 사면과 복권을 노리려 하다니, 도대체가, 드로크만은 교단 소속이 아니랍니까?”
“저 역시 그렇게 읽힙니다.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고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심산인 게죠. 그러나 헬바르드 대공의 반역 모의에 대해선, 신이 일전에 황제 폐하를 알현하여 말씀드린 바 있으니 합이 기묘하게 맞아들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로덴치오도 자신이 들은 말의 절반만을 전하는 그룬발트 추기경의 기이한 줄타기 감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정보의 공백은 로덴치오와 살리오든 모두에게 공평하게 존재했고, 방심 속에서 몸을 불렸다.
“그럼 그룬발트가 그 일을 맡도록 두자는 건가요?”
“드로크만의 하옥으로 이미 분개해 있는 교단의 보수파를 이 이상으로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룬발트의 체면을 살려줄 필요 또한 있고요. 그리고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내버려둬도 무방합니다.”
“스타니스와프 그룬발트라면 확실히 그렇죠.”
번지르르한 그룬발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시도가 실패한 듯 살리오든이 찌푸린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천천히 반추하던 그녀는 나지막이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좋아요.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
“살아있는 걸 보니 반가운데,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반가울 뻔했습니다.”
논리 구조 따위는 무시한, 뤼시앵의 조소 어린 인사를 들으며 케넌은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거뒀다. 돌로 포장된 바닥과, 바퀴 자국이 난 채로 눌어붙은 말똥하며, 어떻게든 그 지저분한 것을 밟지 않으려고 엉거주춤 걸음을 내딛는 행인들까지, 로스키르헨의 번잡한 생활상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을 구경하는 듯했다.
뤼시앵이 자리에 앉고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한 뒤 말했다.
“제가 로스키르헨에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여기 지부 사람들은 단장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마르셀은 좋았던 옛날을 믿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들은 복구 속에서 안정을 찾지.”
“다 내 손바닥 안이다? 그런 분께서 쫓겨나 도피 생활을 하신다니, 참 세상이 죽일 놈입니다그려.”
케넌은 신문을 접어 옆으로 밀어치우고 코끝에 걸쳐 놓았던 안경을 벗었다. 그는 뤼시앵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할 때까지 홍차에 브랜디를 넣어 섞으며 말없이 기다렸다.
“뭡니까? 불러낸 이유가 뭐냔 말입니다. 여기선 얌전히 지내겠다고 맹세하고 오는 길이니 괜한 일에 뛰어들도록 부추기진 말았으면 합니다.”
“괜한 일은 확실히 아니네.”
“위험한 일도 질색이긴 마찬가집니다.”
“의미 있는 일이지.”
뤼시앵은 뿌득 하고 소리 내어 이를 한 번 간 뒤, 케넌의 입에서 그 따위 말이 나오기를 벼르고 있었다는 듯 냉소를 퍼부었다.
“그렇게 많은 사냥꾼들을 잡아먹고도 아직도 입을 놀리시는 걸 보면 도피 생활이 아주 어렵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그놈의 의미 때문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냥꾼들이 죽었습니까?”
“자네는 왜 태어났나?”
하- 하고, 뤼시앵은 어이가 없다는 듯 짧게 웃었다. 그는 벗어두었던 장갑을 그러쥐고 케넌을 노려보았다.
“뭡니까, 갑자기? 철학자연하는 소리나 늘어놓을 거라면 먼저 일어나보렵니다.”
“우린 아무런 의미도 없이 내던져졌어. 그렇기 때문에 의미를 찾아야 하네. 우리는 내던져진 존재일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어디서 그럴싸한 글귀라도 읽고 대단한 감명을 받으신 모양인데, 저는 단장님이, 이젠 단장도 뭣도 아니지요, 케넌 당신은 남의 등을 떠미는 부류죠. 피투된 존재이자 기투하는 존재, 그 말이 사람 목숨을 쥐고 집어던지는 인간의 입에서 나오면 얼마나 우스운 줄 알기나 하십니까?”
“변명하지 않겠네. 내가 지금 하려는 일 또한 그와 같으니.”
뤼시앵의 앞으로 주문한 커피가 나왔고, 종업원은 쟁반 위로 손을 모아 쥐고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케넌이 외투의 주머니를 더듬어 값을 치렀다. 그는 종업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로스키르헨의 청소부들은 자네도 잘 알 테지.”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뤼시앵은 그보다 더 심도 있는 유착 관계를 맺었던 적 있었지만 자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밝힐 리는 없었다. 그는 잔을 들어 홀짝이며 눈을 피했다.
“됐어. 그걸로 충분해. 자네는 최근 로스키르헨 외곽에서 벌인 사냥 중에 맹폭충들을 잡았고, 이 사체는 몇 가지 경로를 거쳐 청소부들에게 닿았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런 적이···”
“끝까지 듣게. 별도의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한 이 사체들은 정체가 불분명한 일군의 괴한들의 손에 넘겨졌네. 자네는 이를 수상하게 여겼고 조사에 나섰어. 자네가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건······”
“그 괴한들이 공화주의자들이었다, 그겁니까? 공화주의자들 손에 녹색 화약이 넘어갔다니 황제가 들으면 좋아 죽으려고 하겠군요.”
“녹색 화약은 잊게. 그런 건 없네. 녹차 가루를 섞은 화약이 몇 부대(負袋) 있긴 하지.”
“그걸 녹색 화약이라고 믿는 얼간이들도 몇 부대(部隊) 있겠고요.”
케넌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음모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위험한 일은 결단코 싫다던 뤼시앵의 눈에도 점차로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넌의 다음 말에서 뤼시앵의 눈에 서렸던 이채는 공포의 빛으로 바뀌었다.
“목표는 마레지에 감옥. 일시는 팔월제를 전후해서. 이 정보가 누구의 귀에 들어가야 할지는 자네도 알겠지.”
“제국수색대, 그 광신도 집단하고는 얽히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밥 먹으면서도 신, 황제, 조국, 침대에서 그 짓을 할 때도 신, 황제, 조국··· 정신 나간 작자들이라고요. 저를 의심할 겁니다. 수색대는 대어가 잡혔다고 그저 기뻐할 순진한 무리들이 아닙니다. 그놈들은 정보의 출처를 밝혀내려고 저를··· 저를······.”
가쁜 숨을 몰아쉬는 뤼시앵을 대신해서 케넌이 말을 이었다.
“고문할 수도 있겠지.”
“알면서도 제게 맡기시는 겁니까?”
“나이로드 교황 성하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으니,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수 있지. 알고 있고,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걸세.”
“그렇게라도 공치사를 하고 싶으시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여튼 나이로드 엉덩이 닦아주는 솜씨는 알아줘야겠습니다.”
그 나이로드를 구출해내는 데에 일조했던 주제에 뤼시앵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껄였다. 케넌은 깍지 낀 두 손 위로 턱을 괴고 말했다.
“전선에 사냥꾼들이 나가 있네.”
“알고 있습니다. 안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제 귀에 대고 하는 소리가 그거니까요.”
“전쟁을 종결시켜야 해.”
뤼시앵은 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케넌이 말한 공화주의자들이 이십대의 철없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케넌은 그들의 시체로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널 생각이었다.
“그 방법이란 게 고작 학교에서 뭘 잘못 배운 어린애들을 부추겨서 사지로 내몰고, 그렇게 해서 생긴 빈틈으로 ‘진짜 역모’를 꾀하는 거란 말입니까?”
“나도 지금 택한 방법이 열쇠는 못 된다는 걸 알아. 하지만 곁쇠로 문을 따야 할 때도 있는 법이네. 그조차 여의치 않을 때는 지렛대로 문짝을 뜯어야 하는 법이고.”
“말이나 못하면······.”
“하겠나?”
케넌이 뤼시앵의 손목을 덥석 잡고 물었다. 뤼시앵은 손목 잡히는 일이라면 이제는 신물이 난다는 듯 케넌의 손을 떨쳐내고 말했다.
“안 하겠다고 하면, 이미 계획을 다 들은 마당에 살려둘 리가 없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케넌이 대꾸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자 뤼시앵은 결국 두 손을 들어 항복의 뜻을 표했다.
“하겠습니다. 한다고요. 당신들하고 얽힌 내가 미친놈이지.”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
- 작가의말
초기 설정과 가장 멀어진 인물이 있다면 케넌인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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