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4장 - 섶을 지고 불 속으로(1)
13막 찬탈
4장 섶을 지고 불 속으로
1275년 7월 24일, 황제와 대공 사이의 ‘변함없는 우애를 확인하기 위해’ 헬바르드 대공의 영지로 떠난 그룬발트 추기경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즉, 일을 한다고 말한 뒤 실제로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추기경의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했다면 그는 분명 분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굉장히 간단해 보이는 이 ‘일’에도 상당한 수준의 숙련된 요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핵심은 일을 두 층위로 분리해내는 데에 있었다. 그 하나는 분주하게 약속을 잡고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추기경 자신이 얼마나 바쁜지 몸소 보여주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막대한 양의 서류 작업이 의례처럼 따라붙었다. 이 서류들에는 응접에 사용된 찻값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를 꼼꼼히 살펴볼 만큼 부지런한 자가 있다면 추기경의 부족한 수면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정작 밝혀냈어야 할, 가장 내밀한 중핵은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다양한 기술들이 동원되었는데, 주로 말과 다른 표정에서 드러나는 진의를 모른 체하기, 입수한 중요 문건을 실수로 분실하기, 칼끝으로 활자를 섬세히 긁어 날짜 조정하기 등이 그것이었다.
“추기경 예하.”
백조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발로 물장구를 쳐야 한다는 얘기는 실행력이 남다른 생물학자에 의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관용적 표현으로서의 효력을 너그러이 인정한다면 그룬발트 추기경이 영지에서 벌인 일련의 조사들은 뒤집어진 백조라 불릴 만했다. 다시 말해, 그는 수면 위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수면 아래서는 유유자적했다.
“그룬발트 추기경 예하!”
그룬발트의 머리가 그를 위태롭게 받치고 있던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책상을 찧었다. 그는 아픈 이마를 문지르고 눈을 껌벅이며 자신을 깨운 이를 향해 사과했다.
“미안하오. 내가 잠시 졸았구려. 지금이 몇 시지?”
그는 흐트러졌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세실 뒤로 놓인 괘종시계를 넘겨다봄으로써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점심때가 다 됐구먼. 식사는 하셨소? 아직 안 하셨으면 바람도 쐴 겸 나랑 같이······.”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좀 전에 식사를 마쳤습니다.”
세실은 말을 마치고 자신의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때까지 최대한의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던 그룬발트는 허옇게 번진 침을 소매로 문질러 닦고 객쩍게 중얼거렸다.
“밖에서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시종도 잠시 졸고 있더군요.”
“이해해주시오. 과로가 겹쳐 쪽잠이라도 자둬야 일을 할 수가 있는 형국이니 말이오.”
그룬발트가 아랫것의 부덕을 감싸 안는 자애로운 상사를 연기하며 말했다. 그는 세실의 화장기 없이 창백하고, 또 묘하게 사람을 빨아들이는 얼굴을 흘깃거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 주변에서 에케메니아 음식을 기가 막히게 내놓는 근사한 식당을 하나 알아 놨는데 정말 같이 가지 않으시려오?”
“대공께서 추기경 예하와 말씀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지금?”
세실이 빙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룬발트는 머리를 매만지고 눌린 자국이 남아 있는 볼을 문질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세실이 문을 열고 선 채로 말했다. 그룬발트는 그녀를 지나쳐 가며 코를 킁킁거렸다. 세실에게서는 입고 있는 옷에서 나는 잘 마른 빨래의 청결한 냄새 외에는 어떤 것도 맡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의 인물이었고, 이 특색 없는 특성이 그룬발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느새 추기경을 앞질러 복도를 걷던 세실이 대뜸 물었다.
“와서 직접 보시니 어떻던가요? 정말 폐하의 말씀대로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던가요?”
“불온한 기운이라니, 폐하께선 그런 출처 불명의 터무니없는 소문을 믿으시는 분이 아니오. 이 기회에 우애를 더 돈독히 하고자 저를 보내신 게지요. 만일 의혹이 있거든 씻어내고 가자는 것이기도 하고요. 폐하께서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그룬발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폐하를 둘러싼 모리배들이 대공을 시기해서 어떤 꼬투리를 잡아내고 중상모략을 일삼을지, 나도 참 걱정이 많이 되오. 어떻게 잘, 오해가 없도록 풀어나가야 할 텐데 나한테 무슨 힘이 있어야지, 원······.”
그는 진심으로 염려스럽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세실 쪽을 힐끔거렸다. 기대하던 반응이 얼른 튀어나오지 않자 그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나와 함께 온 이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뭐, 물론 부분적으로는 내 탓도 있소. 내가 밤낮으로 부려먹으니. 그래도 철저히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위로가 될 만한, 그··· 저··· 이런저런 포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있다면 눈을 흐리던 피로도 말끔히 걷히고 그러면 진상도 보다 명확히 조사할 수 있겠고, 그것이, 에, 또······.”
“대공께서도 추기경 예하의 수고로움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예하께서 겪고 계신 갖은 애로 사항도 헤아리고 있지마는, 보답을 해드리는 일이 혹 예하의 높으신 이름에 누가 될까 염려하시어 망설이고 계신답니다.”
그룬발트는 꿀꺽 침을 삼키고 조바심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문자를 섞어 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나 스타니스와프는 그런 것에 괘심하는 이가 아니오. 다만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 시대를 개탄할 뿐이오. 과전불납리라 하였건마는, 견문발검하는 세태에선 의인도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지. 돌려 말하자면, 결국 양심의 문제라는 거요.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가.”
그룬발트는 문 앞에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연설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대공께 말씀 전해 놓겠습니다. 들어가 보시지요.”
무안함을 헛기침으로 무마하고, 그룬발트는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헬바르드 대공 지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물론 그가 예상했던 바였으나, 그녀 옆에는 의외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아니, 그 존재는 충분히 짐작했건만 이토록 쉬이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룬발트 추기경, 오랜만이오. 신수가 훤하니 보기 좋습니다.”
그룬발트는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남자의 앞에 허둥지둥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자는 땋은 은발을 등 뒤로 넘기고 말을 이었다.
“내가 교황청으로 돌아가 묵은 것들을 청소해내면 국무원장 자리가 비는데, 추기경은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룬발트는 고개를 들어 오만하게 빛나는 나이로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뒤에는 어깨가 떡 벌어진 장신의 남자가 커다란 망치를 짚고 서 있었다. 그룬발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로크만이 그를 종용해 여기까지 보냈으나 대주교에겐 재기의 희망이 남아있지 않았다.
미친 중늙은이 따위, 감옥에서 썩으라지. 그룬발트는 눈앞에서 흔들리는 새로운 밧줄을 덥석 붙잡았다.
“신이 성하의 곁에 서지 못한 것은 상황이 그러하여 피치 못하게 삿된 무리의 발호에 휩쓸렸던 까닭일진대, 어찌 진정으로 역심을 품어 그리했겠나이까. 지난날 신이 범했던 과오는 몸이 멀어 성하의 옥음이 닿지 못한 탓이었으나, 흑암 속에서 헤매다 주께서 허락하시어 존안을 마주하니 기쁘기 한량없사옵니다.”
나이로드의 뒤에 서 있던 베른트가 추기경의 청산유수에 감명 받은 표정이 되었다. 대공은 박수라도 칠 양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룬발트는 유창한 언변을 비장한 어투로 끝맺었다.
“청컨대 하명하소서. 신이 견마지로를 다해 받들겠나이다.”
나이로드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무신경하게 대꾸했다.
“쉬운 말로 다시 하시오. 내가 요즘 머리가 복잡해서 말이오.”
*
단일 작전으로는 최대 규모의 인원이었다. 사냥꾼 여섯에 용병 둘이 여기에 더해지고, 마지막으로 감염된 사냥꾼 하나가 추가되면서··· 앞의 모든 인원들이 다 부질없어졌다. 스타샤는 장화의 코로 진흙 바닥을 하릴없이 찔러댔다. 모인 이들의 허리띠를 각출해 묶어둔 아르투로는 이븐의 감시하에서 진창 속에 몸을 처박고 있었다.
때아닌 순회 재판에서 검사 역을 맡게 된 스타샤는 변호인 카챠를 추궁했다.
“그러면?”
“이븐이 가져온 약 덕분에 난폭하게 굴지 않고 있어. 차도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통제는 된다는 거야.”
“그래서?”
“아르투로가 바라는 대로 싸우다 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그랬다가?”
스타샤는 기꺼이 악랄한 심문관을 자임해서 모두가 입 밖으로 내기를 꺼려하고 있던 가능성을 내뱉었다.
“그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비단 비유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전장이었다. 믿을 수 없는 아군만큼 위험한 것이, 전장에는 없었다. 웨인이 마치 증인 선서라도 하듯 벗어 든 보울러햇 위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말했다.
“오펜하른을 떠올려 보게, 스테이시. 그때도 비슷한 상황이었어.”
“그땐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되돌릴 수 있었잖아요. 우린 루퍼트를 죽였어요. 그걸 떠올려 보세요, 영감님.”
파트리크가 스타샤의 말에 묻힌 함의를 깨닫고 물었다.
“루퍼트가 감염돼서 죽었습니까?”
“왜, 놀라워?”
스타샤가 고개를 홱 돌려 파트리크를 보고 쏘아붙였다. 파트리크는 황소처럼 순한 눈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슬픕니다.”
파트리크의 반응은 너무나 정상적이라서,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다. 뷔센은 즐거울 것 하나 없는 상황에서 흐흐 하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렸고, 스타샤는 짜증을 가득 담아 자신의 머리를 들쑤셨다.
카챠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지를 추어올렸다. 그녀는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지만, 그 즉시 스타샤의 반론에 막혔다.
“그럼 아르투로를 잔베르로 데려가서 그 연구원이 살펴볼 수 있도록···”
“내 말 잘 들어. 난 저 인간이 감염되고 치료를 받을 때까지 함께 있었어. 그런 식의 억제가 가능했던 이유는 모든 게 신속히 이뤄졌기 때문이야. 아르투로가 감염된 게 며칠째지?”
“이틀 됐어.”
파트리크가 끼어들어 카챠의 말을 고쳤다.
“사흘째입니다.”
“그런 건 좀 넘어가.”
카챠가 도대체 누구 편이냐는 듯 파트리크를 흘겼다. 앰버가 조심스레 다가와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밧줄을 건넸다. 그녀는 요령 좋게 허리띠를 대체해 자신의 허리를 둘러맨 밧줄을 가리켜 보였다.
웨인이 앰버를 향해 외투를 들춰 멜빵을 보여주며 손을 내저었다.
“감염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이븐이 조치를 취하지 않았네. 이븐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 게 아녜요. 제가 예전에 이상한 소릴 해서 저러는 거지 싶어요.”
스타샤는 오펜하른에서 이븐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답했다. 이 년 전 잔베르에서 이븐을 죽이려 했던 자신은 틀렸다는 말. 그러나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는단 식의 자기부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소신은 마물들을 척살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건 물론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스타샤!”
스타샤가 그녀답지 않게 화들짝 놀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방금 자신이 보인 빈틈을 모른 체할 것을 주문하듯 일행에게 차례로 시선을 준 뒤 걸음을 옮겼다. 스타샤를 불렀던 이븐은 그녀가 다가오자 손으로 제지했다.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었다.
스타샤는 엎어져 있는 아르투로를 내려다보았다. 팔과 다리, 목과 몸을 허리띠로 결박해둔 아르투로는 정신병원에 구금된 위험한 광인처럼 보였다. 거의 회색빛을 띠고 있는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고 검푸른 핏줄이 잎맥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어떻게 죽일지 말씀들은 잘 나누셨나?”
“말만 해. 지금이라도 죽여줄 수 있으니까.”
스타샤가 칼의 손잡이 위로 손을 얹으며 응수했다. 아르투로는 예리한 치아 사이로 침을 흘리며 킬킬거렸다. 그는 웃음을 멈추고 코를 들이켰다가 흙탕물이 들어갔는지 한동안 콜록거렸다.
“은괴를 가져왔다고 했지?”
아르투로의 물음에 스타샤가 얼른 이븐을 노려보았고, 이븐은 턱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아르투로가 바닥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걸 내게 줘. 몽땅, 전부! 판돈을 나한테 다 걸란 말이야! 내가 엄청난 패를 손에 쥐고 있거든.”
들어나 보자는 듯이 스타샤가 턱짓으로 아르투로를 재촉했다. 광인들 사이에는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지, 이 암울한 상황 속에서 웃고 있는 건 뷔센만이 아니었다. 아르투로는 숫제 하얀 이를 다 드러내고 히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백작의 품으로 뛰어들 거야.”
- 작가의말
인생은 그룬발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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