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4장 - 섶을 지고 불 속으로(2)
13막 4장(2)
*
“난장판이었지.”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타구를 당겨 침을 뱉었다. 그녀는 들쑤셔 놓은 듯 정돈되지 않은 금발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자작 나부랭이하고는 차원이 달랐어. 아니, 어쩌면 그것도 늑대사냥개가 힘을 빼놓은 덕분에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교수는 수첩을 빠르게 넘겨 앞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는 펜을 놀려 몇 글자를 구석에 끄적거리고 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걸 뭐라고 하지? 시체랑 피가··· 그래, 시산혈해. 내가 문자하고는 친하지 않아서. 말 그대로 시산혈해였어. 비가 퍼부은 뒤라 발은 푹푹 빠지지, 마물들은 끊임없이 튀어나오지······. 키 큰 사냥꾼이 먼저 죽었어. 이름이 뭐였더라?”
교수는 수첩의 한 장을 펼쳐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이름과 생몰년이 기록되어 있었고, 옆모습의 간략한 스케치도 함께 있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거야. 처음부터 얘기했잖아. 난 이름 외우는 거엔 젬병이라고. 여하튼, 좀 이상한 인간이긴 했는데, 열심히 싸웠어. 정말로.”
창밖은 사냥꾼의 전당을 증축하는 공사 소리로 시끄러웠다. 기존 전당의 지붕을 덜어내고 그 위로 한 층을 더 올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여자는 돌 깨는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술회를 이어갔다.
“죽을 것같이 싸웠지. 그때야 누가 안 그랬겠느냐마는, 이런 게 사냥꾼이었구나, 싶었지. 파스귄트에서도 사냥꾼들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땐 그래도 여유가 있었어. 뭐 엄청나게 여유를 부렸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적어도 마물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저렇게 막아야겠다 하는 계산, 그래, 계산을 할 수 있었어. 내가 그랬다는 게 아니고, 사냥꾼들이 그런 것처럼 보였단 거지.”
“국경에선 그렇지 않았습니까?”
여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기 중에 돌가루 냄새가 배어 있었다. 교수는 펜을 들어 수첩에 무덤만이 몸을 불리누나, 라고 적었다. ‘몸을’ 위로 가로줄을 긋고 ‘배를’이라고 고칠 때쯤 여자가 답했다.
“국경에서의 싸움엔 그런 게 없었어. 모든 일들이 동시에 일어났지. 행동이 생각을 앞질렀고, 반대로 추월당하면 그 순간 죽어 버리는 그런 싸움이었어.”
여자의 천성이 허락하는 진중함은 거기까지였던 듯, 그녀는 해죽 웃으며 진지하지 못하게 덧붙였다.
“방금 그 말 꽤 멋있지 않았어? 적어두라고. 다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
교수는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여자를 향해 수첩을 내밀었다. 여자는 수첩에 적힌 아홉 개의 이름을 눈으로 훑다가 교수가 손가락으로 짚고 있는 이름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크게 다쳤지. 화상을 입었을 거야. 그런데도 계속 싸웠어. 엄청 아팠을 텐데 말이지. 그 사냥꾼은 요즘 어떻게 지내나 몰라. 안 보이는 걸 보면 은퇴한 것 같은데.”
“죽었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일이지요.”
“그럼 저 밖에 있는 관 중 하나에 들어가 있겠군. 나야 저길 별로 가지 않으니까. 괜히 울적해지기만 하고.”
교수는 여자가 한 말을 받아 적고 또 다른 이름을 가리켰다.
“내 오랜 친구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냥꾼이 됐을 텐데······. 이런 말 들어봤어? 죽음이 정해져 있다면 그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그 친구가 해준 얘기야. 그게 아마 국경으로 가기 이틀 전이었나 사흘 전이었나 그랬을걸. 멜레란데 출신의 사냥꾼이 꼭 그 짝이었지.”
교수가 손가락을 옮겨 이번에는 아르투로 에밀리오 가리도 페르난데스라는 이름을 짚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죄 미친놈들뿐이었어. 그래서 싸울 수 있었던 건지, 아니면 싸우다가 그렇게 된 건진 알 수 없지만. 그때 백작 표정을 당신도 봤어야 하는 건데.”
교수가 말없이 여자를 응시하자 그녀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나도 미쳤지. 기왕 미칠 거면 제대로 미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여자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부들이 내뱉는 거친 욕설과, 와르르 하고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저 소리 들려?”
인부들이 다시 합심해서 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고, 좀 더 귀를 기울이면 공사를 위해 외부로 옮겨둔 석관 사이를 거닐며 그들의 생애를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해주는 이의 나직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십오 년이 지났는데도 우린 여전히 싸우고 있어. 그래, 물론 상황은 달라졌지.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빠져 죽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게 전부라는 생각도 들어. 멈추면 가라앉겠지. 근데 그렇게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어 봐도 떠있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너무 억울해.”
“말씀 속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멈추면 가라앉겠지.”
여자는 자신이 했던 말을 반복했고, 다시 번복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 느껴본 적 있어? 수면 위로 얼굴을 겨우 내밀고 숨을 쉬는데, 불현듯 발밑으로 뭔가 미끌미끌하고 음침한 물체가 느껴지는 거야. 맞아. 시체를 딛고 서 있었던 거지. 그냥 시체도 아니고, 시체로 쌓은 거대한 탑을 딛고······.”
여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손끝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다시 뜬 두 눈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얼마나 더 쌓아야 우리가 앞으로 갈 수 있을까? 아예 시체로 길을 놓아야 하는 걸까?”
“희생은···”
“희생은 불가피하다. 그런 얘기라면 질리도록 들었어.”
교수는 차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옷깃으로 문질러 닦고 말했다.
“아뇨, 희생 또한 삶의 방식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선택한 삶의 방식 말입니다.”
“이봐, 교수 양반.”
여자가 품 안에서 꺼낸 쌈지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뒤적거렸다.
“아니, 작가 양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그녀는 씹는담배를 입안에 쑤셔 넣고 질겅거리며 물었다. 여자의 다음 말에서 슬로언 드웬다이크 교수는 대담의 끝을 직감하고 수첩을 덮었다.
“책은 언제 나오나? 거기에 나도 나오겠지?”
“늦어도 내년쯤이면 나올 겁니다. 출간되면 한 질 보내드리지요.”
슬로언은 일어나 여자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한때는 용병으로 돈을 쫓다가 지금은 사냥꾼이 되어 교황청에서 신입 사냥꾼들을 훈련시키는 여자의 손이 단단하고 거칠었다. 방을 나서려는 슬로언의 등을 향해 그녀가 말했다.
“우린 인간이었어. 그걸 써줘. 감염됐던 그 사냥꾼도 인간이었고.”
슬로언은 대꾸하지 않고, 다만 뒤돌아 빙긋 웃었다. 처량하거나 담담하거나. 슬로언은 자신의 웃음이 둘 중 어디에 더 가까운지 알지 못했다.
*
눈앞에서 먹잇감들이, 아니 사냥꾼들이 모질게 저항하고, 아니 싸우고 있었다. 입에 허리띠가 물려진 채로 아르투로는 자꾸만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끈적한 살의를 눌러 죽였다. 그러나 살의의 방향을 다잡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마물들이 아니라 사냥꾼들의 움직임을 쫓았다.
거칠고 사납게 뛰는 그들 사냥꾼의 심장이, 그리고 몸의 곳곳으로 뻗치는 혈류가 눈에 선했고 갓 도축한 신선한 고기를 마주한 듯이 배 속에서 허기가 들끓었다. 품고 있는 은괴들의 각진 모서리가 몸을 눌러 구토가 치밀었다.
아르투로는 몸을 뒤틀어 어깨로 입가를 닦았다. 이제 그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의식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과, 간신히 붙잡은 의식을 놓치고 발을 헛디디면 마침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는 유혹이 교미하는 한 쌍의 뱀처럼 물고 물렸다.
마물들과 얽혀 싸우는 사냥꾼들의 틈에서 온다, 온다, 하는 소리가 처음에는 숨죽인 가운데 비명처럼 새어나오고, 점차 확신에 가득 찬 경고로 화해 울려 퍼졌다. 아르투로는 전장을 뒤로 하고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이븐은 아르투로의 몸을 결박하고 있던 허리띠들을 끌러 풀었다.
“준비됐어?”
“보시다시피.”
아르투로가 손목을 주무르며 답했다. 이븐은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던 그의 말뚝창을 들고 돌아왔다. 창대를 잡은 아르투로의 손이 검게 썩어들자 이븐이 장갑을 벗어 건네주었다.
“기분은?”
“끝내줘.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고. 그 기분 알아? 즐거운 두려움 말이야. 목숨이 걸린 판이야. 이기나 지나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이븐은 외투의 품을 뒤져 굵직한 앰풀을 꺼냈다. 그는 아르투로의 허벅다리에 앰풀의 바늘을 꽂아 넣었다. 아르투로의 떨림이 앰풀을 쥔 손날 아래로 전해져 왔다. 아르투로가 더운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빚이 걱정이야. 고향에 누이가 하나 있는데······.”
“세상이 자네에게 빚을 졌으면 졌지, 그 반대는 아닐 거야.”
아르투로가 실없이 웃었고, 이븐도 소리 없이 따라 웃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말이 서글프게 우스웠다. 누렇고 탁한 용액이 몸속으로 흘러들자 아르투로는 기분 좋은 포만감이 몸을 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젠 얘기해줘도 되겠지. 그 약은 대체 뭐야?”
“인육 농축액.”
“설마.”
이븐의 표정을 본 아르투로는 질문을 멈추었다. 이븐은 아르투로에게 손을 건네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븐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가서 기다려.”
이븐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기 때문에, 아르투로도 이븐이 말한 목적지가 전장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지.”
이븐이 길을 열었다. 마물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덜떨어진 두 동족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븐은 주먹을 내지르듯 권총으로 마물들의 턱을 올려쳤고, 이은 격발에 꿰뚫린 머리에서 뇌수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이븐의 뒤로 쓰러지는 마물들을 창끝으로 걷어치우면서, 아르투로의 표적은 오로지 하나였다. 검은 군복을 입고 사냥꾼들을 죄 녹여버릴 기세로 몰아붙이는 백작의 모습이 더디게 가까워졌다. 길게 늘어져 휘두른 백작의 팔이 뷔센의 몸을 사선으로 긋고, 뷔센은 그러나 고통에 무감했으므로 몸이 녹는 와중에도 반격을 감행했다.
“피해, 미친 자식아!”
스타샤가 뷔센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뒤로 잡아끌었다. 파트리크가 둘을 엄호하기 위해 쇠스랑을 내질러 백작의 몸을 찍었다. 백작의 몸이 돌연 아래로 푹 꺼졌다. 액체로 화한 몸이 파도처럼 일어 파트리크의 뒤를 점했고, 이븐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탄환을 퍼부었다.
아니, 소용없지 않았다. 이븐의 권총이 형성한 탄막 속으로 조명탄을 던져 넣은 것은 웨인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백작은 파트리크의 등을 녹이는 데 그치고 물러났다. 공기 중에 살이 타는 역한 냄새가 퍼졌다. 파트리크의 옷이 살갗에 눌어붙어 보는 눈이 쓰렸다.
마물들의 시체를 딛고 도약한 올가가 곡도를 송곳니처럼 그러쥐고 백작의 양 어깨를 내리찍었다. 세 조각으로 나뉜 백작의 몸이 곡도가 바닥을 찍는 그 즉시 다시 합쳐졌다. 녹아내린 올가의 칼이 힘없이 부러졌다.
스타샤가 달려들어 휘청거리는 올가의 몸을 어깨로 밀쳤다. 그녀는 백작의 양팔을 잘라내고 목을 노렸다. 불에 달궈 시뻘겋던 칼날은 백작의 목을 치고 금세 녹아 쇳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백작의 신체들이 발아래서 흐르며 한데 모였다.
“네놈들 다 합친 게 그 사냥꾼 하나만 못하다는 거 알고 있나?”
그렇게 말하는 쿼그마이어 백작의 표정에는 아직도 여유가 있었다. 반면 사냥꾼들은 연이은 대규모 습격으로 지쳐 나가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짜낸 힘을 불어넣은 몸은 헛돌았고, 공격과 회피의 모든 동작에 휘청거리는 몸짓이 저주처럼 따라붙었다.
파트리크가 쇠스랑으로 찍어 올린 마물의 시체를 백작에게 던진 것은 그때였다. 사냥꾼들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고, 수상쩍은 낌새를 느낀 백작 역시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회피와 동시에 다음 공격 대상으로 노린 이는 칼집에 칼을 넣은 채 무방비하게 서 있던 스타샤였다.
“진짜는 이거야, 병신아.”
스타샤가 던진 성냥이, 바닥에서 뒹굴며 기름을 뱉어내고 있던 수통에 닿았다. 폭발음은 마치 총성처럼 들렸다. 마물의 시체를 태울 때 사용하는 기름 담긴 수통을, 저마다 하나씩 집어던지기 시작하자 불길이 삽시간에 몸집을 불렸다.
이븐이 백작의 몸을 겨눠 총탄을 쏟아 부었다. 사냥꾼들이 성가시게 덤벼들던 마물들을 도륙해 나갔고, 백작이 수포가 부글부글 끓는 몸으로 불길 속에서 뛰쳐나왔을 때 남은 마물은 그 하나뿐이었다.
아직 취약한 때를 노려 일격을 가하고자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파트리크였고, 그녀는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그륵··· 그르륵······.”
쇠스랑을 놓친 파트리크가 목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백작은 어깨부터 옆구리를 모로 관통한 쇠스랑을 빼내며 이를 갈았다. 돌연 백작의 고개가 뒤로 젖혔다. 카챠의 사격이 이마에 적중한 것이었다. 백작의 몸이 이전보다는 느리게, 그러나 여전히 액체로 변해 바닥으로 꺼졌다.
- 작가의말
공지로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자꾸 휴재 하면 버릇이 될 것 같아, 늦게나마 써서 올리기로 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일은 정상적으로 업로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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