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막 5장 - 해 뜨는 집(1)
13막 찬탈
5장 해 뜨는 집(*)
“인간의 모습일 때 백작에겐 녹이는 힘이 없다.”
올가가 사냥꾼들을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물로 변했을 때는 다르다. 닿는 모든 걸 녹인다.”
“물?”
“액체.”
이븐의 물음에 앰버가 표현을 고쳐주었다. 올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설명을 이어갔다.
“액체일 때 백작은 의지와 상관없이 녹인다. 지나간 자리에 녹은 흔적이 남는다.”
“내가 알고 있는 바와 같아. 하지만 백작에겐 자신이 녹여 몸속에 품고 있는 것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능력도 있지. 그게 은에도 적용이 된다면?”
스타샤의 지적이었다. 그녀에겐 이 년 전 오펜하른에서 백작과 대적해본 경험이 있었고, 그 경험은 달아났던 앰버와 일방적으로 당했던 올가보다 훨씬 제대로 된 전투에서 얻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븐은 은괴의 무게로 늘어난 아르투로의 외투를 보며 말했다.
“한계치가 있길 바라야지.”
“아마 있을 거다. 없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기 녹여 해제시키는 것. 하지만 백작은 그러지 않고 몸을 공격한다.”
이번에는 올가의 지적이었고, 이븐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타샤와 뷔센을 통해 알아낸 백작의 전투 방식은 은으로 된 칼날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대신 날을 상하게 하거나, 한 부위만을 녹여 끊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건 인간을 상대로 할 때면 흔적 없이 녹여 버리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럼 액체 상태로 변하는 걸 유도한 뒤에······.”
“내가 거기에 뛰어들면 된다는 거군.”
이븐의 말을 아르투로가 넘겨받았다. 이븐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답하지도 못했다.
*
추모와 애도는 필요한 일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파트리크의 무릎이 꿇리고 바닥에 머리가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뷔센이 백작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검의 끊어진 대가리가 진창에 떨어졌다. 뷔센의 고통을 잊은 무모함은 마물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지언정, 백작에겐 실효가 없었다.
뷔센의 몸이 산성 용액으로 변이한 백작의 팔에 꿰뚫리고, 올가가 그를 밀쳐냈을 때는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녹은 몸 위로 물집이 흉하게 번졌다.
“올가!”
그건 호명보다 비명에 가까웠다. 쇄도하는 앰버의 철창을 비웃듯, 백작의 몸이 다시 액체로 화해 올가를 덮쳤다. 웨인이 간신히 빼낸 올가의 몸은, 그러나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새빨간 얼굴의 눈꺼풀이 지워져 부릅뜬 두 눈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븐이 숫제 백작의 몸에 들이박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백작의 몸이 다시금 액체로 변하고, 이븐은 그를 비껴 지나쳤다. 등 뒤에 따라붙었던 아르투로가 뛰어들었다. 백작과 그의 몸이 겹쳤다가, 분리되었다.
“겨우 이거였나?”
뒤로 물러난 백작이 비웃듯이 말했다. 그는 사뭇 즐거운 표정으로 아르투로를 노려보았다. 백작이 미처 다 녹이지 않은 아르투로의 외투의, 그 구멍 난 틈으로 은괴가 하나둘씩 쏟아져 내렸다.
“너희들이 숨기고 있었던 비장의 패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느냔 말이다.”
백작은 아르투로가 품고 있던 은괴가 자신의 몸에 닿는 순간, 공격을 거두고 물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백작뿐 아니라 사냥꾼들조차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건 맛보기였어.”
아르투로는 은으로 된 말뚝을 거꾸로 쥐고 자신의 배를 갈랐다. 드러난 내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떨어진 은괴를 주워드는 아르투로의 의도를 알아차린 백작이 뒤늦게 저지하고자 달려들었고, 그는 다시 이븐에 의해 가로막혔다.
빗나간 탄환이 다른 사냥꾼을 맞힐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이븐은 순전히 산탄 권총의 저지력만으로 백작으로부터 아르투로를 지켰다. 탄환이 다하자 이븐은 온몸으로 잡히지도 않는 산성 용액을 막았다.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가 코를 쑤셨다.
그 사이 아르투로는 떨어뜨린 은괴를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갈라진 배의 틈이 입을 대신했다. 은괴에 닿은 살갗과 속살과 내장이 모조리 검게 타들어갔다. 아르투로는 한 손으로 갈라진 배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말뚝을 쥔 채 백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마침내 백작을 끌어안는 데 성공했다. 아르투로는 백작을 안은 채로 진흙탕 위에서 뒹굴며 악다구니를 썼다.
“녹여 봐, 개자식아! 녹여 보라고!”
빠져나온 백작의 팔이 액체로 변하는 순간, 아르투로가 용서 없이 품속에서 은괴를 꺼내 짓눌렀다. 은괴와 아르투로의 손이 함께 녹아들었다. 액체로 변했던 백작의 팔은 화상을 입은 듯 끓어올랐고, 스타샤의 칼끝에 잘려 나갔다. 땅에서 뒹굴던 백작의 팔이 돌연 물집처럼 터져 나가며 살점이 튀었다.
백작은 아르투로에게 붙잡힌 채로 그를 뒤집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쳤다. 이븐은 백작의 등에 달라붙어 그를 위로 들고 있는 아르투로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가장 처절한 밑바닥에서 인간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나병 환자처럼 얼굴이 녹아내리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중에도 그는 백작을 놓지 않았다.
올라탄 아르투로의 몸을 뒤집는 데 성공한 백작이 돌연 땅 속으로 꺼졌다. 아르투로의 몸을 녹이는 대신, 바닥을 녹여 달아나려는 심산이었다. 흙바닥 위로 두더지가 지나가는 듯한 흔적이 새겨졌다. 앰버가 가장 먼저 흙 속으로 철창을 찔러 넣었고, 웨인이, 스타샤가, 그리고 뷔센의 검을 집어든 이븐이 가세했다.
“끝내야지.”
파트리크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달려온 카챠가 비척거리는 아르투로를 일으켜 세웠다. 아르투로가 카챠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는 엄지만 남은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카챠는 백작이 땅 속에서 솟구치길 기다렸다가 아르투로를 내던졌다. 산성 용액의 기둥 속으로 아르투로가 빨려 들어갔다.
치이익-
백작은 황급히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지만 이제 그의 몸은 스스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듯이 보였다. 부종을 앓는 듯이 부풀어 오른 몸이 진물을 내뱉으며 터져 나가고, 백작은 무너져 진흙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잇새에 걸린 음식물처럼 아르투로의 남은 몸이 백작의 살가죽 위로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졌지만, 우린 이겼어. 이건 전쟁···”
탕-
카챠가 쏜 총탄이 백작의 머리를 날렸다. 그녀는 약실을 내던지고 한 발 앞으로 다가가며 장전한 총으로 또 다시 백작을 겨눴다. 한 발걸음마다 한 발씩, 그녀가 백작의 앞에 당도했을 때 이제 그 고깃덩이는 형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뷔센은?”
“숨은 붙어있어.”
이븐의 물음에 스타샤가 답했다. 이븐은 차라리 그가 크게 다쳐서 사냥을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함부로 생각했다. 그러나 옆구리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신 피의 양을 보건대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목숨 한번 모질군.”
이븐은 그렇게 내뱉고 웨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십니까?”
지팡이칼을 짚고 서있던 웨인의 몸이 앞으로 털썩 넘어졌다. 그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구토했다. 웨인은 안과 밖을 뒤집어 놓을 듯 맹렬하게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토사물에 피가 섞여 있었다.
“너무 늙었어.”
웨인이 입가를 닦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파트리크를, 그리고 올가의 시신을 감싸 안은 채로 중얼거리고 있는 앰버를 차례로 보았다. 웨인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었어야 했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이븐이 웨인의 팔을 둘러메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노인의 몸이 불안할 정도로 가벼웠다.
“그게 노인들이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이라더군요.”
*
팔월제 전야는 말릭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뻔했다. 이레 전 눈가리개를 한 채 수색대 본부로 인도되어 온 사냥꾼은 자신이 사냥 중에 알아낸 정보를 털어놓았고, 말릭은 이것이 반역 도당을 일거에 궤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말릭은 그 즉시 헬바르드 대공의 영지에 머물고 있는 그룬발트에게 연락을 넣어 대공뿐 아니라 공화주의자들의 동태 또한 보고하도록 주문했다. 그룬발트 추기경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일개 수색대 계장인 —그마저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릭의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따랐다.
그룬발트가 숨 가쁘게 보낸 서신에는 대공의 저택에 체류하고 있는 수상쩍은 무리들 사이에서 ‘갇힌 동료들’, ‘기둥과 벽의 재질’, ‘일종의 선전포고’ 같은 말들이 오고갔다고 적혀 있었으며, 추기경 자신은 여기에 ‘거사의 조짐’이라는 사견을 더하며 앞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었다.
비록 그룬발트는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말릭은 공화주의자와 폭발물에 해박한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밀월의 기운 또한 특기할 만하다고 여겼다.
말릭은 부하들 몇을 마레지에 감옥에 배치시키는 한편, 입수한 정보의 교차검증에 심혈을 기울였다. 감시 대상 가운데 하나인 놈팡이에게 친동생의 손가락이 담긴 소포를 보낸 덕분에, 7월 27일에는 녹색 화약의 일부를 증거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시험 삼아 터뜨려 본 녹색 화약은 과연 끔찍한 발명품이었다.
최초 정보 제공자인 뤼시앵 드메스포르라는 시건방진 사냥꾼 —녹색 화약 표본 확보에도 기여한— 에 대한 조사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포상금을 운운하며 성가시게 굴던 사냥꾼은 말릭의 주먹에 코뼈가 박살난 뒤로는 설설 기었다. 그는 요구하지도 않은 녹색 화약에 대한 항마연구원의 보고서를 빼돌려 건네주었고, 그 덕분에 말릭은 폭약 설치 지점을 특정할 수 있었다.
“얘기와 다르지 않소? 이건······.”
유일한 흠결이 있다면 수도방위사단이 공을 나누고자 체포 작전에 슬쩍 발을 들이미는 것을 막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거기에 치안청이 도로 통제를 운운하며 뻔뻔스럽게 자기 몫을 주장했고, 황궁경비대까지 소요가 번질 위험이 있다며 배치 지역을 세심히 설정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경비대에게도 임무 지역을 할당하라는 압력이 여기에 가미되었다.
말릭은 ‘동문 쪽에서 일시적 소란이 있을 것이나 이는 양동’이라는, 손가락 부족한 동생을 둔 놈팡이를 사흘간 고문한 끝에 얻어낸 정보를 다른 부처에도 공유할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만약 이 정보를 알리지 않는다면, 무슨 대령과 무슨 경무관이며 또 무슨 소령이라는 세 멍청이가 한눈을 파는 동안 공을 독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말릭은 결국 자신만이 알고 있던 정보를 공유하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차기 수색대장으로 발돋움하는 데에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동문 쪽으로 가봐야 하는 것 아니오?”
그리고 그 이타적인 결정은 말릭의 최대 실수로 판명되었다.
“그 사냥꾼은?”
말릭은 얼이 빠진 브루네크 대령과 샤피에르 경무관의 물음을 모조리 무시하고 근처의 부하를 윽박질렀다. 말릭의 그을음 번진 손 틈으로 불에 탄 차(茶) 가루가 흩날렸다.
“네?”
“그 아편쟁이 사냥꾼 말이야!”
조악한 방독면을 뒤집어쓴 채 무릎 꿇려진 폭파범들이, 아니 폭파미수범들이 말릭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감옥의 외벽을 긁는 데 그친 폭발의 위력에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조금 전에 계장님께서 동문을 살펴보라고 하셨다면서 자리를······.”
말릭은 부하의 어깨를 밀치고 비틀거렸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두서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당장 전 병력을 집결해서··· 이건 위장이고··· 폐하를··· 지금 황궁으로··· 추기경, 사냥꾼이······ 한통속이고 기만해서··· 대공이······.”
말릭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망 없는 사실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연이은 국경에서의 패배에 자극받은 리카드의 무리한 수도 병력 감축과, 이미 중심부로 쏟아져 들어왔을 대공의 병사들과, 인질로 잡히고도 남았을 황실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빌미를 제공한 자신의 판단 착오까지.
말릭은 권총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신, 황제, 조국. 그 신성한 삼위일체가 한꺼번에 말릭을 내쳤다. 방아쇠에 걸린 검지에 힘이 들어가고, 말릭은 마지막으로 부르짖었다.
“황제 폐하 만세!”
*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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