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1장 - 밤의 절벽(1)
종막. 불멸(不滅)
오래 전에 끝냈어야 할 이야기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못내 질질 끌었다는 느낌, 골수와 창자와 오물로 뒤범벅이 된 손으로 나를 대신할 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 가족이 될 수도 있었던 이들을 깡그리 죽이고 끝내 이름 없는 내 아이까지 한 줌 핏덩이로 짓이겨 놓았다는 죄악감, 그리고 그런 주제에 행복한 결말을 바랐다는 몰염치까지. 끝내야 할 이유는 많았고 버텨야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가 다른 모든 이유를 압도했다.
- 이븐 베르자크의 유서에서 발췌
어둡고 분명한 나날들. 물러서는 일은 생각할 수 없었다. 불에 달군 송곳으로 어둠의 정중앙을 찌르기 위해 투그린 가운데,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자자이 귀에 꽂혔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멸이다.
- 블라트 슈바르츠, 「지워지지 않는 이름」
1장 밤의 절벽(*)
병실의 공기는 무겁고 습했다. 지는 해의 누런 빛 속에서 티끌들이 철없는 군무를 벌이고 있었다. 이븐은 문득 만약 길을 잃는다면 어둠 속이 아니라 빛 속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향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방향을 알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게 되리라고, 그래서 눈을 감으면 오히려 발을 내딛는 일이 더욱 쉬워지리라고,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빛이 비스듬히 도달한 병상에 뷔센이 태무심하게 앉아 있었다. 이븐은 병상 옆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누군가 방금 일어났던 자리처럼 앉은 곳이 볕에 데워져 따스했다. 유령이 다녀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령에게도 체온이 있나? 이븐은 피식 하고 웃었다.
“뷔센.”
“장을 잘라다가 다시 기워놨어. 이젠 내 몸인데도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 다른 환자의 수술 내용을 읽어줬어도 그냥 듣고 있었을 거야.”
소독약의 알싸한 냄새 때문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븐을 보는 뷔센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이븐은 어쩐지 자신이 유령의 몸 위로 포개어 앉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기르던 개가 있었지. 어느 날 보니까 눈이 탁해져 있더군.”
“백내장이군요.”
“그렇다더군. 수의사한테 보이니까 너무 늦었다는 거야. 수술을 할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눈이 멀어버린다더군. 눈이 먼 개는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지. 그때 대답을 아직도 기억해. 힘들 겁니다. 그래도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눈먼 개의 심정을 느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뷔센이 코를 들썩이며 훌쩍거렸다.
“눈이 멀었는데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 계속 살아갈 수 있고, 계속 살아갈 수 있으면···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거겠지. 그걸 이해할 수 있나?”
이븐은 적절한 대꾸가 없을까 입을 반쯤 열고 망설이다 뷔센의 다음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에이델, 자네는 그걸 이해할 수 있어?”
이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래 전 개가 잃어 버렸던 눈의 영혼이 비집고 들어온 듯이 닫힌 눈꺼풀 안이 비좁았다. 그림자극처럼 오펜하른에서 죽은 에이델의 묘비가 눈꺼풀 뒤에서 어른거렸다. 내일의 해를 띄우기 위해. 이븐은 입술을 달싹여 묘비명을 소리 없이 읽었다.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부는데 밖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군.”
뷔센이 병상 위에서 몸을 비틀어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븐도 뷔센의 시선을 따라 고정액 속에 담근 듯 누렇게 물든 채 굳어 있는 풍경을 보았다. 뷔센이 듣고 있는 바람의 음산한 휘파람 소리와 유리창 떨리는 소리를, 이븐은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읽었다.
“우리는 모두 바람을 맞으며 자랐지. 데릭은 휘어지는 법을 모르는데 저렇게 서 있다가 꺾이기라도 하면······.”
시체는 누가 찾지, 하고 뷔센이 들릴 듯 말 듯 잦아든 음성으로 읊조렸다. 시체는, 시체는 하고 되뇌던 뷔센이 아득한 꿈속에서 방금 깨어난 듯이 이븐을 쳐다보았다. 이제 초점이 맞았다.
“당신은 누구지?”
초점이 맞아서, 그는 이븐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뒤에서 소맷자락을 붙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븐은 어리둥절해져 있는 뷔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희극이거나 비극이래도 아주 잘못된 비극이었다.
끊어낸 혀를 뱉어내듯 이븐이 답했다.
“아무도 아닙니다.”
*
“방금 그게 무슨 뜻이야?”
“메이츠니르 씨.”
피로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로지아가 앉은 자리에서 이마를 손으로 괴었다. 이븐은 로지아가 건네준 명단을 접어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는 스타샤 쪽을 보고 멋쩍게 말했다.
“문 뒤에 있는 줄 몰랐는데.”
“난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는 거야. 대답이나 해. 기증자들 어쩌고 한 게 무슨 뜻이냐고.”
“들으신 대로예요.”
로지아가 답했다. 스타샤는 한 발 앞으로 내밀어 다가가려다 멈춰 섰다. 로지아에게 다가갔다가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러니까 그 기증자라는 게 도대체 뭔데! 저 자식한테 시체라도 떠먹였다는 거야? 그게 감염된 몸을 지금껏 버티게 해준 비법이고? 그리고 이젠 그것도 약발이 다 떨어져서 죽으러 가기 전에 기증자들 이름이나 알아두겠다는 거야?”
“알면서 묻는 건 저를 괴롭히실 요량 때문인가요?”
차라리 발뺌을 해. 당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수차례 터졌다 아문 고막이 문제인 것 같다고 나를 비웃어. 이븐은 스타샤가 이를 갈며 눌러 죽인 목소리를 들었다.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잔베르에서 네가 방법이 있다고 해서 살려둔 거잖아!”
로지아의 말갛고 작은 얼굴이 변명도 뉘우침도 없이 무방비해서, 스타샤는 헛웃음을 쳤다.
“제기랄, 너나 교단이나 똑같아. 결국 이용해 먹을 심산이었던 거잖아. 너희 교단 것들은 우릴 항상 졸(卒)로 여기지. 뭐야, 죽었어? 그럼 다음. 죄다 공모자야. 누구는 산 채로 온몸이 녹아서 뒤져 가는데 뒤에 숨어서 주판이나 튕기고 있지.”
“저라고 안 슬픈 줄 알아요? 아르투로, 파트리크, 그리고 그 용병까지··· 저는 남겨져서, 뒤에 남겨져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집어치워. 넌 아무것도 몰라. 우리가 뭐랑 싸우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고.”
이븐은 스타샤를 데리고 나가리라 다짐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로지아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따갑게 날아들었다.
“그럼 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알아주길 원하는 거예요? 당신의 고통을? 하지만 저는 모를 거라면서요! 순교자가 되고 싶은 거라면 최소한 의연한 척이라도 하세요. 지금 이러는 건 흉터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걸로밖에 안 보이니까요.”
“책임지지 못할 목숨이라면 애초에 희망도 주지 말았어야지! 그게 너희들 비겁자의 전략이겠지. 희망을 미끼로 던져주고 거기 낚인 불쌍한 인간은 몸이 걸레짝이 될 때까지 구르다가 결국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뒤지는 거야.”
“그만들 하지.”
스타샤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이븐의 두 손을 걷어치웠다.
“넌 가만있어. 병신 머저리 같으니라고. 그 썩은 피가 뇌를 잠식해서 사고 기능이라도 잃은 모양이지. 내가 맞혀볼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마지막으로 크게 한 건 하고, 죽어도 그 다음에 죽으라고 하겠지. 이번엔 제대로 죽어야 할 거야. 왜냐면 어중간하게 죽기라도 하면 저 교단의 갈보가 무슨 약물이며 기계 장치며 모조리 동원해서 다시 일으켜 세울지도 모르거든. 그러다 네가 뒤지기라도 하면? 교단은 잃을 게 없는 거야. 안 그래도 그 자식 눈빛이 맛이 가던 차였는데 잘됐지 뭐. 그렇게 털고 일어나 어디 또 생기다 만 늑대인간을 찾아다니겠지.”
이븐과 로지아가 거의 동시에 고함을 질렀다.
“스타샤!”
“이 비루먹은 망아지 같은 여자야!”
그건 스타샤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독설은 그녀의 전유물이었으므로. 그러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로지아의 독설은 어딘지 애처로운 데가 있었다.
“나라고 사람들을 사지로 내모는 일이 즐거운 줄 알아? 내가 뭐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당신들 부려먹는 줄 아느냐고! 나도 괴로워. 마음이 찢어진다고!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는 걸 어떡하느냔 말이야.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칼을 쥐고 돌격해봐야 먹잇감이 될 뿐인데, 내가 그러길 바라는 거야?”
“왜 못 해? 나는 뭐 배 속에서부터 칼 쥐고 태어난 줄 알아?”
“스타샤, 그만.”
“당신들, 사냥꾼들, 고맙지, 고맙다고. 이렇게 하찮은 나를 대신해서 목숨 걸고 싸워줘서 고맙고 또 너무 고마워서 죄스러울 지경이야. 그래서 뭐? 창을 들 수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싹 끌어 모아서 말에 태워다가 창기병 여단 돌진이나 외칠까? 그래야 당신의 그 망할 피해의식이 뜯어 고쳐질까? 아니, 스타샤, 아니야. 넌 그러면 누구는 너무 늦게 돌진했고 누구는 너무 빨리 말에서 떨어졌고··· 안 죽은 연놈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작당 모의해서 무고하고 용맹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주장할 거야. 그리고 그 억울한 이들 중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은 누가 뭐래도 스물한 살 때부터 대마 항쟁에 뛰어들어 몸 성한 곳이 없는 가련한 비극의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메이츠니르겠지.”
이븐은 말리는 것도 잊고 로지아가 쏟아내는 악에 받친 장광설을 들었다.
“말해 봐, 스타샤. 말해 보라고. 내가 죽지 않고 당신을 만족시킬 방법을 하나라도 대 보라고!”
스타샤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나가 뒤져.”
“그것 봐! 없지!”
그렇게 소리를 지른 뒤 성큼성큼 문 앞으로 다가간 로지아는 문을 닫고 나가기 전에 잊고 있었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당신들, 하나도 안 불쌍해.”
불쌍하게 여긴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큰 모욕이 될 테니까. 경첩이 덜거덕거리며 로지아가 닫고 나간 문이 무섭게 흔들렸다. 나는 누구의 인형도 아니야. 이건 내 선택이고, 거기에 연민은 필요 없어. 이븐은 몇 가지 말들을 속으로 꼽아보다가 내뱉지 못하고, 그 대신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나스타샤라고?”
“너도 뒤져 버려.”
스타샤는 좀 더 세게 문을 닫고 나갔고 경첩에서 떨어져 나온 못이 바닥을 구르다가 이븐의 발치에서 멈췄다.
*
이븐은 랜턴 든 손을 뻗어 묘비를 비췄다. 헬레나 브라운. 1242년생, 1274년 사망. 이븐은 명단과 묘비를 번갈아 살피고 땅에 랜턴을 내려놓았다. 묘비 위로 흙먼지 더께가 엉겨 붙어 있었다. 이븐은 손으로 묘비를 쓸고,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에 낀 때를 파냈다.
묵념을 끝내고 다음 묘비를 찾으려는 맡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네가 여기 있을 거라고 로지아가 말해줬어.”
이븐은 스타샤가 로지아를 성으로 부르거나 이름 뒤에 ‘그 여자’를 붙이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차리고 문득 의아해졌다. 저녁의 언쟁 뒤에 이븐이 알지 못하는 사건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스타샤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 사람들이야?”
“그래.”
“이제 와서 궁상맞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븐이 걸음을 옮겨 다음 묘비에 적힌 이름과 명단을 비교하며 대꾸했다.
“그렇게 보여?”
“아니.”
이븐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스타샤를 바라보았다. 로지아와는 화해했을지언정 이븐을 용서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처럼, 스타샤의 표정이 여전히 사나웠다.
“죽으려고 묫자리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여.”
“그럴 리가. 이리 와서 찾는 거나 좀 도와줘.”
스타샤는 팔짱을 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븐을 도우면 저 어둠 속에 숨어있던 괴물의 당도를 앞당길지도 모른다는 듯이, 죽기도 전에 유품을 정리하는 일을 거들 생각이 그녀에겐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예 유서라도 써두지 그래?”
이븐은 대답하지 않고 스타샤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그 죄지은 듯 면목 없다는 태도에서 속내를 읽어낸 스타샤가 발끈했다.
*기형도, 「폐광촌」. 제목 위의 인용문 역시 해당 시의 구절을 일부 차용함("쉽사리 물러설 수는 없었다. ... 어둠의 잔등에 시뻘건 불의 구멍을 뚫곤 하였다.").
- 작가의말
장면을 끝냈어야 했는데, 힘에 부쳐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의 끊어진 장면은 다음 글에서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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