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1장 - 밤의 절벽(2)
“써뒀기만 해봐. 내가 찾아다가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까.”
부르쥔 스타샤의 주먹이 어둠 속에서 작은 짐승처럼 떨었다. 이븐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다음 묘비를 찾았다. 이제 이븐은 자신이 찾는 묘비들의 간격이 가진 규칙성을 찾아낸 듯싶었다. 기증자는 두 달 또는 세 달에 한 번꼴로 나타났고, 노환으로 죽었거나 사고를 당해 죽은 이들의 묘비가 그 사이를 채웠다.
변칙이 출현했을 때 이븐은 명단을 다시 확인했다가 곧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1274년 가을엔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븐은 눈을 감고 로지아의 벗은 다리를 떠올렸다. 그 움푹 파인 자리가 이븐의 가슴을 후볐다.
“오늘도 로지아를 죽일 뻔했어.”
이븐의 말에 스타샤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백작과의 싸움에서 재생력을 무리하게 끌어다 썼고, 그게······ 이걸 앞당긴 것 같아.”
스타샤를 향해 이븐이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일순간 손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고 검은 털이 손등을 뒤덮었다가, 변장한 범죄자처럼 인간의 것으로 돌아갔다.
“손발을 묶어 뒀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로지아의 목을 물어뜯었을 거야.”
로지아가 애써 막고 있는 것은 감염이 아니라 변이였다. 충분한 인육을 섭취하지 못한 마물은 대체로 변이를 통제할 수 없었고, 그와 같은 불수의적 변이는 무분별한 살의를 동반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감염의 진행을 늦출 순 없었지만 변이를 억제하는 것은 가능했고, 최소한의 인육 공급을 병행한 덕분에 이븐은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피부 위로 수만 마리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에선 이대로 변이해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끈질기게 고개를 쳐들지. 난 그걸 억누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런 억제가 조금이라도 풀어지면 너도 방금 봤다시피······.”
스타샤의 색색대는 숨소리를 들으며 이븐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목에 뻣뻣이 힘을 넣었다. 그는 꾸준히 등장하는 기증자들의 묘비 앞에서 속에 든 것을 모조리 게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묻혔을 때부터 뼈만 남아있었을 당신들, 당신들의 신념은 무엇이었지?
“내 목숨만큼 값진 게 무엇일지 생각해봤어.”
이븐은 아르투로를 떠올렸다. 지금이라면 그의 시신도 마일스아이렌에 당도했을 것이었다. 아르투로와의 짧았던 만남은, 그러나 그 어떤 만남보다도 거대하고 강렬했다. 아르투로는 백작 정도로 만족했을까?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그게 최선이었을 터였다.
적어도 그 점에서 이븐은 아르투로보다 상황이 나았다. 목숨 값을 후려치기 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븐은 스타샤를 보고 씩 웃었다.
“세계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스타샤에겐 이븐이 던진 문자 그대로 필사의 농담이 재미있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함부로······.”
떨리는 음성. 그건 분노 때문이거나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때문이었을 테지만, 이븐은 후자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떨기의 불꽃이란 표현으론 그녀를 형용할 수 없었다. 스타샤는 화마였다. 슬픔과 오욕(汚辱)과 두려움과 때로는 기쁨마저도 남김없이 태워 세상을 집어삼킬 분노의 불을 키우는 것. 그게 이븐이 이해한 스타샤의 방식이었다.
끝이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하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노라 아프게 선언하는 일이었다.
“함부로 다가서고, 함부로 입 맞추고, 함부로 품에 안고, 함부로······ 함부로 사랑하지 말았어야지.”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이븐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미안하다고 말했더라면 그를 죽이는 건 공작이나 헤레틱스 따위가 아니라 스타샤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븐은 미소 짓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야. 그건 모독처럼 느껴지니까. 좋든 싫든, 바라든 바라지 않든, 결말은 찾아올 거야.”
부인하는 대신, 이븐은 사랑을 자백했다.
“그때까지 네 옆에 서있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과욕이겠지만, 어느 사랑이 과욕이 아니겠어?”
스타샤가 이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고개를 조금만 더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면 이븐은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들이박으려 한다고 믿었을지도 몰랐다. 그게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는 듯 담담히 서 있는 이븐의 품으로 스타샤가 와락 안겨들었다. 이븐은 고개 숙여 스타샤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듣지 않겠지.”
품속에서 스타샤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지가 굽어보는 잔베르 교구의 불빛이 흐리게 번졌다. 이 년 전 그가 지켜냈던 저 조촐하고 외로운 교구가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이븐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함께 죽지 못했다면 누군가 하나 먼저 죽는 것은 숙명이라는 듯이.
스타샤의 또렷한 음성이 이븐의 얼굴을 울려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네 곁에 서있을게. 네가 선택한 결말이 뭔지 나도 봐야겠어.”
스타샤가 고개를 들어 이븐을 마주했을 때, 이븐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사실은 자신이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에 빠졌다.
“돌아가자. 끝을 맞이하러.”
비를 예비하는 듯 낮게 깔린 안개가 수의처럼 묘지를 뒤덮고, 침묵만을 품고 있는 불모의 땅은 비어 있어서 아늑했다. 이미 죽은 세상을 염하거나, 죽을 때까지 죽이거나, 끝까지 살아 있거나. 그 모든 삶과 죽음의 방식이 하나로 모이고, 의지가 그 아래로 피처럼 흐를 것이었다.
*
“이런 식으로 끝날 전쟁이 아니었는데.”
페르디낭 랭데가 붉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젤 황제와 베르펠 통령 사이에 이루어진 극적인 타협은 들끓던 전장을 일순간 소강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난 전쟁의 참화는 국경에 집중되었고, 그 때문에 휴전 협상에서 영토를 두고 분쟁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지젤은 포로를 석방하는 것에 동의했고, 베르펠 역시 게헤만의 서부에 발이 묶여 있던 살바도스 제국군의 안전한 퇴로를 보장했다. 두 지도자 사이엔 자국 내의 분란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각자의 사정에 대한 이해와 합의가 있었고, 이것이 협상의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시도라 여왕과 비요른 왕은 애만 끓다가 끝나버린 전쟁이 도무지 마음에 들 리 없었지만 살바도스와 게헤만의 양국 사이에 낀 자신들의 병사들 때문에라도 협상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화(戰火)에 자국의 영토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제국의 동부 국경으로 병력을 보냈던 교묘한 술수를 뒤늦게 후회할 뿐이었다.
칸테리의 안드린 왕 또한 전쟁이라는 돈놀이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그에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돌연 독립을 선포한 살바도스의 생트바이룬 지역이 지젤 황제의 말에 따르면 ‘통제 불가’라서 칸테리의 보급대가 지나가는 일에 ‘과민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은 중단되었다.
기필코 전쟁을 막아내고 말겠다던 한 남자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심과 오판과 권모술수와 중상모략과 그 모든 것들이 빚어낸 어리석음에 의해서. ‘참주’ 지젤 황제의 권좌에 대한 갈망이 맹주 역할을 하던 리카드의 정복욕을 꺾어 버리고, 게헤만 의회의 급진파가 꾸몄던 음모가 정확히 반대로 자신들의 목을 찌른 끝에, 눈 뜨고 보기 한심한 수준의 평화가 찾아왔다.
때로는 극에 달한 어리석음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 못할 때 인간은 최고로 현명해지는 법이니까. 그 현명함이 우리에겐 독이 됐다는 건 슬픈 일이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임계점은 넘었어. 켈레넨스크 때를 가뿐히 상회해.”
아리아나 파르사드는 땅에 꽂아 넣었던 막대처럼 생긴 기구를 뽑아 수치를 확인하고 말했다. 땅의 체온이라도 재려는 것처럼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페르디낭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전쟁터에 깔린 시체들을 향해 두 손을 흔들었다.
“전염병을 좀 퍼뜨릴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이 여기서 나자빠지게끔 하는 거지.”
“됐어. 그만둬. 무력감은 좋은 재료가 아니야. 오히려 불순물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켈레넨스크에서의 반작용이 그것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 절망, 순수한 살의, 고통, 죽음, 그리고 짙은 피의 향기······.”
아리아나는 피로 물든 땅의 악취를 한껏 들이켜며 음미했다. 들이켠 숨을 내쉬고 아리아나가 빙긋 웃었다.
“마지막 건 문학적인 표현이었어.”
“게라르도 녀석이 했던 얘기 기억나?”
문학적이라는 아리아나의 말에서 어느 봄날의 저녁 만찬을 떠올렸는지 페르디낭이 다소 회한에 젖은 목소리로 울적하게 말했다.
“인간은 무한하고 그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절망 또한 무한하다고 했었지. 그놈은 확실히 선구자였어. 뭐 결국 그놈의 독자적인 연구가 문을 여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땐 별수 없었지만 말이야.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려고 하는데 잡음을 넣어선 안 되지.”
“아, 의미 있는 희생이었지. 함께 할 순 없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 에드가드도 마찬가지야. 그 곰 같은 녀석이 자기 연구 성과에 취해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 마지막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를테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는 행운이 우리에게도 주어졌단 거지.”
에드가드 바이스게르버의 덩치를 감안한다면 페르디낭의 표현은 비단 은유적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기도 했다. 인간과 마물 사이의 유사성에 천착해 합일의 길을 제시한 공로만큼은 에드가드에게로 돌려져야 마땅했다.
아리아나의 연구는 문 뒤에 가려진 것들을 실체화하는 방법에 집중되어 있었고, 페르디낭은 그런 실체화가 대량 학살의 장에서 보다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들, 자존심과 아집으로 뭉친 학자들이 기꺼이 수장으로 인정하는 이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금지된 지식에 대한 열망과 탐구심의 병(*)으로 마물의 근원에 최초로 발을 내디딘 자. 문을 열어 그 뒤의 심연을 들여다 본 인간. 경계를 넘어 경계를 지우고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심연의 인도자가 될 인물.
“서펜트.”
아리아나가 그의 이름을 불렀고, 페르디낭이 이어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충분한 것 같나?”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
매부리코의 끝에 걸쳐둔 안경을 바로잡으며 서펜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두 세계의 완전한 융합? 아니, 불충분해. 합일의 초석? 충분하고도 남지.”
“마물의 왕국은 몰라도 도시는 세울 수 있다는 거군.”
“마물이 아니지.”
서펜트가 페르디낭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페르디낭은 얼른 과오를 깨닫고 재바르게 표현을 고쳤다.
“새로운 인류.”
느릿느릿하게, 서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인류가 영위할 새로운 세계에서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터였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 지난 사반세기를 얼렸던 추위가 녹아내린다면 피아는 눈이 꺼지듯 사라질 것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듯이.
우리가 그들을 당겨 우리들이 될 테니까.
“그럼.”
서펜트가 고개를 쳐들고 운을 뗐다. 혀가 입안의 공기를 말아 올리며 더듬다가 가장 정확한 말을 찾아 찔렀다.
“끝을 시작하지.”
*‘탐구심의 병’은 《블러드본》의 플레이어가 단어들을 조합해 바닥에 남길 수 있는 어구. 작중 등장하는 비르겐워스의 학자들을 설명하는 구절로도 잘 알려져 있다(“탐구심의 병이다.”).
- 작가의말
최근에는 Mike Oldfield의 〈Nuclear〉를 들으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이 노래를 들으면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최종장이라는 느낌이 물씬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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