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2장 - 의인은 없나니(1)
종막. 불멸
2장 의인은 없나니
나이로드는 몸을 낮춰 돌바닥 위의 탄흔을 손끝으로 쓸었다. 흑사병을 앓기라도 한 듯 피 먹은 바닥이 짙었다. 방문객을 질식시킬 정도로 걸쭉한 향내가 되레 의뭉스러웠다. 변장이 과해 정체가 들킨 진범처럼, 향취는 죽음의 입을 틀어막지 못했다.
나이로드는 몸을 일으켰다. 탄흔은 천장에도 있었다. 사냥꾼의 전당이 자아내는 고적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나이로드의 뱃속은 참담한 심정으로 뒤틀려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에카르트가 여기 묻혔고, 그 다음이 메리쿠르. 맙소사, 막심은 자기 옆에 아블린이 묻힐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자한, 여러모로 아까운 사냥꾼이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그리고 다르몽, 본슈타트 교구 전체가 슬픔에 잠겼겠군. 에스트룀 부단장,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너무 늦었어. 히스터스, 올해로 스물셋이었던가? 아니지, 스물넷이군.”
석관 사이를 거닐던 나이로드가 줄을 바꾸었다. 그는 없는 이름을 확인하고 로덴치오를 슬쩍 거들떠보며 말을 이었다.
“안톤 그 친구는 용케 목숨을 건진 모양입니다. 가리도, 유쾌한 친구였는데. 마이스터, 본명이 파트리치아였군. 그리고 이건 올가 이바노브나, 올가라, 올가··· 아, 그 용병.”
나이로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어느 틈엔가 혼잣말로 바뀌었던 말을 다시 대화로 돌려놓았다.
“부고르스카야 엽사는 대부님도 아실 테지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크라벤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으니까요. 바스케즈 단장이 그렇게 물었답니다. 하지만 이자는 사냥꾼이 아니지 않나? 카챠가 답하길, 아뇨, 그녀도 우리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해서 올가 이바노브나도 여기 묻히게 된 겁니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군, 이케돈.”
“대부님, 대부님. 잠깐만이라도, 정말 잠시 동안만이라도 죽은 사냥꾼들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이 처치할 수 있었던 마물들과, 구할 수도 있었던 생명들을 떠올려 보시란 말입니다.”
본인부터 그렇게 해보겠다는 듯 나이로드가 사냥꾼들의 묘 사이에 서서 묵념했다. 추모는 창을 닫고 비질하는 일과 비슷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덧없는 먼지들이 허공을 부유하고, 다시 고개를 들면 먼지는 가라앉아 쌓였다. 그렇게 죽은 이들은 죽은 채로 영겁의 시간 동안 남겨져 있을 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나이로드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까?”
“대변인은 진의의 가장 큰 적이지. 대변자를 자처하는 자네를 저들이 달갑게 여기진 않으리라 보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스스로 딛고 선 땅 위에서 하게. 죽은 이들의 이름을 빌리지 말고.”
“제 심장은 언제나 이들과 함께 뛰었습니다.”
다시 입을 여는 나이로드의 언성이 조금 높아져 있었다.
“대체 뭐였습니까? 뭐가 대부님으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겁니까?”
“교단이지. 언제나 그랬어.”
“존속만을 위해 정의를 내버린다면, 그런 교단 같은 건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야지요. 주여, 꿀 속에 나뒹구는 버러지들을 불로 벌하소서. 의로운 자들은 믿음으로 살 것이니······.”(*)
성직자들이 곧잘 하는 것처럼 예고 없이 화살기도를 던진 나이로드는, 그것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는 듯이 다시 나긋한 음성으로 돌아왔다. 물기를 머금은 나이로드의 두 눈이 먼 과거를 더듬었다.
“저는 선각자들을 좋아했지요. 기억나십니까? 대부님께서 무릎 위에 저를 앉히고 성서를 읽어주시던 때 말입니다. 성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으면서도 이디나르의 말씀을 전파했던 이들의 모습이 어린 저의 가슴에 불을 놓았지요. 제가 그들을 좋아했던 건 결국 그들이 이겼단 사실 때문입니다. 옳기 때문에 박해 받았지만, 바로 옳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의 말씀을 거울삼는 것이겠지요.”
“예언자의 말은 모호할수록 위대해지지.(**) 하지만 신열에 들떠 늘어놓은 소리들은 대체로 헛소리로 치부되고, 훗날 맞아떨어지는 예언만이 계시인 양 떠받들어지는 일이 허다해. 자네가 스스로를 투영하고 있는 선각자들은 확실히 옳았지. 하지만 그들이 기록되는 건 그만큼 희귀한 경우였기 때문이야. 대체로 우리 같은 이들은 헛소리하는 예언자에 불과하네.”
“모든 진리는···”
“모든 진리는 조롱받고,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고, 마침내 자명한 것으로 인정된다.(***) 아니, 이케돈, 그 말은 심히 틀렸을뿐더러 틀린 자신을 합리화하라고 있는 말도 아닐세.”
나이로드는 로덴치오를 바라보았다가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언제쯤이면 로덴치오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해보기라도 하는 듯이.
“어쨌거나 교단은 존속하게 됐습니다. 대부님의 손이 아니라 제 손에 의해서 말입니다. 지젤 황제나 베르펠 통령 모두 숨 돌릴 틈을 마련하는 데 교단이 근사한 핑계가 되어주고 있지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대가는 천천히 치러나가야겠지만 말입니다.”
“일시적인 것이지.”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들립디다.”
그렇게 말한 나이로드는 철없는 소년처럼 해죽 웃었다.
“지젤 황제가, 아니 당시엔 대공이었지요. 헬바르드 대공이 제게 대부님께서 보내셨던 서신을 보여주더군요. 나이로드가 손을 내밀더라도 맞잡지 말 것. 대공의 야심을 얕보셨군요.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서신이 도착한 날짜가 재미있더군요. 대강 역산해보면 제가 황제를 파문하겠다 말했던 날 대부님이 보내셨던 걸로 사료됩니다.”
“예측할 수 있지만 막을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그때부터였습니까? 저를 쫓아낼 궁리를 하신 게?”
나이로드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로덴치오를 쏘아봤다. 힘준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잇새에서 억눌린 말이 천천히 새어나왔다.
“결국은 지배욕이었던 거죠. 데트로스 전 교황도 그래서 쫓아내신 것 아닙니까? 교단의 존속이니 뭐니 거창한 이유를 들이대시지만, 파헤쳐 보면 결국 당신의 손을 벗어나는 걸 지켜볼 수 없으셨던 거죠. 하지만 이젠 대부님이 물러나실 차례입니다.”
“함부로 선언하고 함부로 명명하는 게 젊음의 특권이라면, 확실히 그렇겠지.”
나이로드는 로덴치오의 말에서 아직도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젊은 날의 치기쯤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늙은이의 특권일 터였으므로 나이로드는 그 이상으로 말을 보태지 않았다.
“살리오든은 벌하지 말게. 내가 시니안을 속였어. 이케돈 네가 말을 듣지 않으니, 분위기만 조성할 거라고 했지. 시니안 살리오든은 교단에 필요한 인물이네.”
“그럴 겁니다. 다만 시간을 좀 가져야겠지요. 시니나 저나 지금으로선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도 힘든 형국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누굴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리로댕 놈도 마음 같아선 때려죽이고 싶지만 황제의 측근과 남매라니 엉덩이나 흠씬 걷어차 주고 끝내야지요.”
“드로크만은···”
“주여 맙소사, 대부님. 끝까지 저를 조종하실 생각입니까? 당신도 참, 이렇게 말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지긋지긋하군요.”
못 말리겠다는 듯, 나이로드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내둘렀다.
“히셀 그 양반은 요양이 필요해 보이더군요. 어디 한적한 시골에나 처박아둘 생각입니다.”
“드로크만은 살아있다면 언제라도 다시금···”
“하지만 요즘엔 안전한 곳이 있어야지요. 마물들의 습격으로 객사하는 일도 부지기수라서 말입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안드로스 단장을 붙여두긴 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케넌도 일선에서 물러나 앉은 게 수 년 전이니 실력이 녹슬었다고 해도 그를 탓할 순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이로드와 로덴치오 모두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반쯤 진심을 담아 나이로드가 덧붙였다.
“대주교가 사고라도 당하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일 겁니다.”
전당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짜’ 근위병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동정을 살폈다. 나이로드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근위병들이 다가와 로덴치오의 팔을 잡으려 했다. 저항 없이 따르겠단 뜻으로 맥혼 로덴치오 평신도가 손을 가만 들어 보였다.
“대부님.”
근위병들의 호송을 받아 전당의 밖으로 나가는 로덴치오를 나이로드가 불러 세웠다. 나이로드는 여느 때보다도 유난히 왜소해 보이는 로덴치오의 움츠러든 등을 향해 물었다.
“바다는 좋아하십니까?”
고개 돌린 로덴치오의 주름 많은 얼굴에 얼핏 미소가 스쳤다. 허허로운 대꾸가 날듯이 가볍게 전당의 공기 속으로 섞여 들었다.
“자네가 어디 도망가는 걸 좋아해서 그 날 줄행랑을 쳤겠나. 다 허락되는 대로 사는 것이지.”
나이로드는 품 안에 넣었던 손을 뺐다. 손바닥에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바지에 땀을 문질러 닦는 팔이 떨렸다. 품속에서 권총의 손잡이가 천천히 식었다.
*
“자네들은 그만 돌아가 보게.”
케넌이 말 머리를 돌려 뒤따라오던 병사들을 가로막았다. 어리둥절해져서 서로 표정을 교환하는 병사들을 향해 케넌이 참을성 있게 다시 말했다.
“여기서부턴 내가 모실 테니 돌아가 보라고 했네.”
병사들이 말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정지가 불안한 듯 드로크만이 타고 있던 노새가 힐끔 뒤를 살폈다. 병사들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던 케넌은 말의 배를 차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양을 몰듯 케넌은 앞선 노새를 말발굽 소리로 부추겼다.
반 시진 동안 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케넌은 과묵했고, 드로크만은 어떤 말도 부질없을 것임을 알았다. 드로크만의 몸이 술 취한 사람처럼 노새 등 위에서 흔들렸다. 케넌이 헛기침으로 드로크만의 방향을 고쳐 주었다.
드로크만은 노새를 멈춰 세우고 흙길 위로 시선을 두었다가 케넌의 인도에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내리십시오.”
“벌써 다 왔나? 길이 짧은 건가, 아니면 자네 성질이 급한 건가?”
케넌이 말에서 내리고 안장 뒤에 매어놓았던 꾸러미를 풀었다.
“둘 다 아니라면 내 명줄이 짧은 거로군.”
케넌이 허구리를 두드리자 그의 말이 멀찍이 물러났다. 말은 주인이 꾸러미에 들었던 날붙이들을 엮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기다란 갈고리처럼 생긴 날이 세 개. 드로크만은 그 모양새가 무엇을 흉내 낸 것인지 알았다.
“그건가? 사고사를 위장할 도구 말일세. 조야하기 짝이 없군그래.”
드로크만이 땅 위에 섰다. 노새가 자신 없는 걸음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드로크만은 수갑 찬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권총으로 머리를 쏘게. 그렇게 죽게 해줘. 이 아픈 머리를 갖고 천당에 들고 싶진 않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케넌의 대꾸가 중의적으로 들려서, 드로크만이 힘없이 웃었다.
“움직이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마물을 흉내 내다니, 사냥단장의 방식으로는 너무 구차하지 않나.”
“당신께 어울리는 죽음을 드리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늘어뜨린 케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천천히 갈고리를 쥔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케넌은 내려치지 못했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이 그의 팔을 휘감았던 것이다. 휘감긴 쇠사슬의 끝에는 낫이 매달려 케넌의 머리를 노렸다.
츠컥-
낫을 막은 케넌의 왼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케넌은 재빨리 쇠사슬을 뿌리치고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수풀을 겨냥했다. 후속 공격은 그가 예상했던 방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탕-
나무 위에서 떨어진 형체가 케넌의 팔을 꺾어 탄환이 맥없이 허공을 갈겼다. 케넌이 왼팔로 상대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피에 젖은 왼손이 미끄러워 상대는 힘들이지 않고 물러났다. 케넌 역시 뒤로 물러나며 재빨리 뼈를 맞췄다. 그는 허리에 찬 칼을 빼 들고 상대를 겨눴다.
그건 흡사 나병 환자 같은 모양새였다. 누더기 같은 옷의 틈새로 친친 감은 붕대가 드러났다. 짓무르고 일그러진 얼굴을, 케넌은 알아볼 수 있었다. 두 개로 갈라진 아래턱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났다. 케넌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거슬리는 쇳소리로 상대가 말했다.
“늑대사냥개에게 흡혈귀를 처리하는 법을 가르쳐야겠더군. 다음번엔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말이야.”
다모크의 머리 위에서 사슬낫의 추가 빙글빙글 돌았다.
*W. H. 오든, 「루터」.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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