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2장 - 의인은 없나니(2)
“다모크.”
케넌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다모크를 나직이 불렀다.
“이럴 필요 없네. 자네의 상관은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어.”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
무심한 벌레처럼 다모크의 어깨 위에서 끈질기게 맴돌던 추가 불현듯 케넌을 향해 쇄도했다. 케넌은 몸을 틀어 추를 피했으나 그건 사슬낫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다. 허공에서 멈춘 추가 사슬을 잡은 다모크의 손끝에서 방향을 틀고, 케넌은 사슬에 목이 감겨 개처럼 끌려갔다.
한 차례의 접전. 케넌은 칼을 들어 낫을 막고,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다모크의 팔에 힘이 빠져 사슬이 느슨해지고, 케넌은 물러나 정비하는 대신 숫제 달려들어 다모크를 난자했다. 다모크의 몸이 엉망으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형상을 갖췄다. 낫이 케넌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고, 그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늦든 빠르든 사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거다.”
또 다시 추를 돌리며 예비 동작으로 돌아간 다모크가 말했다.
“감염되기 전에 죽였던 마물보다 감염된 후 죽인 마물의 수가 훨씬 많아. 복잡한 논리를 동원할 필요도 없어. 이건 효율성의 문제다, 케넌.”
“존엄성의 문제겠지.”
“베르자크를 봐라. 그가 존엄하지 않던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비탈길 위에 서지 않는 거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는 건너편에 도달해야 한다. 네가 택한 방법은 시체로 빈틈을 메워 비탈길을 고르는 것이었나?”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면 어떤 승리도 의미가 없네, 다모크.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자네는 헤레틱스와 다를 바 없는 걸세.”
파리한 안색으로 권총을 들어 올리려던 케넌은, 그 잠깐의 접전에서 다모크가 자신의 오른팔 인대를 끊어 놓았음을 깨달았다. 굳은 손가락에 간신히 걸려 있는 권총이 무력하게 땅을 겨누고 있었다.
사슬낫의 추가 다시금 날아들었다. 케넌은 온몸을 던져 피하고 그 과정에서 떨어뜨렸던 권총을 얼른 왼손으로 주워들었다. 이번에는 추가 아닌 낫이 쇄도해 케넌의 손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건 다모크의 실수였다. 징 박힌 장갑의 목이 낫을 막아내고 발포를 도왔다.
탕-
다모크의 몸이 넘어질듯 휘청거렸다가 다시 꼿꼿하게 섰다. 오른편 가슴의 거대한 구멍이 천천히 메워졌다. 그 경이로운 회복 속도는 케넌으로 하여금 약실의 탄환을 곁눈질로 확인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다시 입을 여는 다모크의 갈라진 목소리에 여유가 있었다.
“베르자크는 어떤가? 그는 네 견결하고 타협 없는 원칙에서 알 수 없는 은총을 받아 예외로 간주되었나? 그게 아니라면 필요한 만큼 취하고 빠르게 소모시켜 부끄러운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버리려는 심산이었나?”
“이븐을 알기에 그와 같은 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네.”
피가 흐르는 만큼 눈에 담긴 세상의 색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케넌은 호흡을 고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말했다.
“죽음에서 돌아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를 마셨나? 그들이 자네를 위해 기꺼이 피를 내어주던가?”
“베르자크가 날 죽일 뻔한 뒤로 행해진 흡혈은 강제적이었단 걸 인정하지. 그러나 그 이전의 흡혈은··· 이를테면 헌혈이었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승리는 이런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거지.”
“자네가 택한 건 편법이야, 다모크.”
“네가 편법이라고 부르는 걸, 나는 극약이라고 부르지. 그게 네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건가? 고결한 팔 인의 사냥꾼이 보기엔 우리가 너무 쉬운 길을 걸어가는 것 같아 심사가 뒤틀렸나? 네 아집이 다수의 불행을 양산하고 있어.”
우리? 케넌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이건 내 자존심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구차해질 수 있는지는 자네의 상관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지. 시대의 광기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네. 절박한 이의 눈엔 제정신으로는 결코 손대지 않았을 방법조차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이는 법이지. 난 선을 그으려 하네.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말일세.”
첫 번째는 사냥꾼들일 것이다. 상황의 시급성을 들어 논리의 빈틈을 메우면 마물의 몸을 가진 사냥꾼들 한 개 소대를 만들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븐이 될 수도 있었고, 다모크가 될 수도 있었으며, 혹은 루퍼트가 될 수도 있었다. 희박한 행운을 만나 최선이 허락된 덕분에 마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일궈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은? 불치의 병을 앓아 죽음이 예정된 이들이 한때는 금지되었던 가능성에 매달릴 것이고, 감염된 몸의 넘치는 생명력은 욕심과 어리석음을 부추길 것이었다. 고의적인 감염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지금도 이미 그런 정황들은 숱하게 포착되었다.
인간은 도축장을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족속이었다. 단지 거기서 신선한 고기의 냄새가 흘러나온다는 이유만으로.
“피차 불필요한 말이 많았군.”
다모크의 말에서 대화의 끝을 직감한 케넌이 칼을 고쳐 쥐었다. 날이 아래를 향하도록 거꾸로 쥔 칼은 곧 다모크의 목에 박히거나, 떨어져 구를 것이었다.
챙-
날아든 추를 막은 케넌의 칼이 맑게 울렸다. 케넌은 그대로 달려들어 다모크의 목을 노렸다. 다모크는 칼이 자신의 목을 깊숙이 찌르도록 내버려두고 낫으로 케넌의 얼굴을 그었다. 케넌의 눈에 피가 흘러들었다. 케넌은 눈을 감지 않고 그 때까지 늘어뜨리고 있던 오른손으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총성이 울리고 다모크의 목에 박혔던 칼이 산산조각 났다. 칼의 파편이 빠르게 재생되는 다모크의 몸 곳곳에 박힐 터였다. 그러나 다모크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낫으로 케넌의 목을 그었다. 케넌이 목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얼마 가지 못하고 그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다모크가 쓰러진 케넌의 몸을 뒤져 남은 무기들을 수풀 속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케넌의 목구멍에서 꼴깍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다모크는 열쇠를 찾아 손에 쥐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케넌의 오른 발목을 붙잡고 발꿈치의 힘줄을 끊어 놓았다.
“누워 있게.”
다모크는 품속에서 둥그런 양철통을 꺼내 뚜껑을 열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성냥을 그어 던져 넣자 통에서 붉은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케넌은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다모크가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을 들었다.
“좀 자두는 것도 좋겠지. 움직이지 말게. 그땐 정말로 베어버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냥단에 대한 네 헌신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이지. 내가 요구하는 건, 너도 내게 그렇게 해달라는 것뿐이야.”
*
이븐은 스스로가 무디고, 때로는 상대의 짜증을 불러일으킬 만큼 냉담한 면모 또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으로 돌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얼굴들을 마주했을 때는 이븐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재채기를 하려는 사람처럼 잠시 고개를 든 채 코를 쥐고 있던 이븐을 향해 남자가 걸어왔다. 건장한 체구에 기름 발라 넘긴 검은 머리가 엄숙해 보였지만, 끝이 말린 두 갈래 콧수염 때문에 어쩐지 사교적인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아르투로와 파트리크 얘기는 들었네. 자네들까지 잃고 싶진 않아.”
이븐은 장갑을 벗고 남자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힘과 따스함이 함께 느껴지는 손이었다.
“이븐 베르자크입니다.”
“자네를 모를 수가 없지. 펠릭스 골드슈미트. 아우팅겐 교구 소속이네. 교구라고 말하면 의회가 싫어하지만 이젠 그것도 다 옛날 얘기지.”
펠릭스가 몸을 조금 틀어 뒤에 있던 또 다른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인리히 체르빈스키. 헨리라고 부르면 될 거야. 우리는 그렇게 하니까. 헨리는 하임벤어에 서투네. 본인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실은 게헤만어도 잘 못해.”
하임벤어에 서툴다는 사실을 곧바로 증명해주겠다는 것처럼 헨리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벌린 입 틈으로 듬성듬성한 이가 드러났다. 세월과 풍파에 좋이 찌든 얼굴은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툼한 외투에 목도리까지 갖춰 입은 헨리는 흔들었던 손을 얼른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고 몸을 말았다. 작열하는 여름의 땡볕과 헨리의 옷차림 사이의 성립하지 않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븐의 의아심을 눈치 챈 듯 펠릭스가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헨리는 조금 다른 계절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뿐이니까.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실비아 칼리노브스카. 실비아의 행동이 조금··· 불쾌하게 여겨질 수도 있단 걸 인정하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녀도 자네들만큼 훌륭한 사냥꾼이라는 사실이야.”
펠릭스가 다음으로 가리킨 여자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른한 눈빛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산발을 한 검은 머리는 번개라도 맞은 모양새였고, 펠릭스가 우려한 불쾌감의 정체도 곧 알 수 있었다.
본래는 다른 색이었을 듯싶은 잿빛의 민소매 상의를 입은 실비아는 귀를 후비고, 눈곱을 떼고, 손톱을 세워 잇새를 긁었다. 그 모든 일이 동일한 손가락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이븐은 감염을 걱정해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상대할 마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빨리도 오셨네.”
“스타샤. 의회 때문에 발이 묶였었지. 믿어주게. 우리도 이렇게 늦게 오고 싶진 않았어. 게헤만은 행정과 절차의 나라야. 무슨 조례며 법령이며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지. 마지막엔 극단적인 선택도 할 뻔했지. 베르펠이 통령의 자리에 앉으면서 해결됐으니 다행이지.”
펠릭스는 언제나처럼 핀잔으로 인사치레를 대신하는 스타샤를 향해 게헤만의 사냥꾼들을 대표해 변론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또 다른 이븐의 일행을 향해 알은체했다.
“카챠.”
“펠릭스.”
카챠가 고개를 조금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웨인이 보울러햇을 벗어 들고 펠릭스와 악수를 나눴다.
“웨인, 그간 격조했습니다.”
“오랜만이네, 펠릭스. 함께 늙어가는 이를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지.”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제야 이븐의 눈에도 펠릭스의 머리칼에 섞인 새치가 들어왔다. 인사와 소개를 끝낸 펠릭스는 일행을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이븐에게는 익숙한 마을이었다. 베소니아의 전쟁 용병들이 점거하고 있던 마을은 그들이 떠난 뒤에도 비어진 채로 남았다. 마물 때문이었다.
“마물들 때문에 시체를 치우지 못하고, 시체를 치우지 못하니 마물들이 더욱 꼬이지. 이런 시대에 전쟁을 치를 생각을 하다니, 통치자는 죄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평균 이하라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야.”(*)
펠릭스가 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탁자 위에는 국경을 표시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헨리가 멀찍이 자리를 잡고 화로에 불을 놓았다. 양해를 구한다는 것처럼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 그는 곧 화로에 대고 두 손을 마주 비볐다.
“여러분들이 힘써 준 덕분에 제국 쪽에서 마물들이 오는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봅니다.”
펠릭스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모인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븐이 발을 살짝 옮겨 실비아가 손끝으로 튕긴,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물질을 피했다.
“게헤만, 우리도 많이 노력. 많이, 노력.”
헨리가 약간 새는 발음으로 짧은 하임벤어 실력을 뽐냈다. 이븐은 그 모습이 어쩐지 부랑자 같다고 생각했지만, 펠릭스는 그를 향해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헨리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도 게헤만의 마물들이 전선으로 오는 것을 나름대로 막았습니다. 주요 길목을 지키고 시체 냄새에 이끌린 상당수의 마물들이 친구들과 합류하는 것을 저지했죠.”
“자네들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네.”
“아닙니다, 웨인. 더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에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여하간, 바스케즈 단장님께서 그 헤레틱스라는 집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주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지 알지 못합니다.”
“좆같은 새끼들이지.”
“미친놈들입니다.”
스타샤와 이븐의 말이 거의 동시에 튀어나왔고, 파하- 하고 공기 빠지는 듯한 실비아의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븐은 실비아가 점심으로 생선을 먹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생선과 진한 입맞춤을 나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펠릭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인 뒤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그들도 인간이라는 가정하에서, 숙식을 해결하려면 여기 파트만처럼 비어있는 유령 마을을 거점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야영지를 꾸려도 되겠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띌 테니까요.”
“추론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그들이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븐이 바이스게르버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이어서 카일로파드 자작이 헤레틱스의 작품이라는 사실과, 피츠독슨의 저택에서 보았던 실험체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이븐은 그 모든 사례를 하나씩 열거해 모여 있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마지막으로 페르디낭을 언급하며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헤레틱스의 일원인 페르디낭 랭데는 일반적인 인간처럼 보였지만 그것 역시 연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네, 이븐. 계획은 이렇습니다. 두 개 조로 나누어, 지도 위에 표시해둔 마을들을 중점적으로 둘러볼 생각입니다. 남쪽으로는 내려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두 명의 사냥꾼이 살펴보러 떠났습니다. 표적을 발견하면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합류를 기다렸다가 함께 사냥하는 겁니다.”
“공작이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네, 펠릭스. 우리가 상대하려는 적은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마물일세.”
웨인의 지적에 펠릭스가 대답을 고민하다가 간략히 대꾸했다.
“압니다.”
펠릭스의 얼굴에 결연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실비아를 향해 시선을 던지자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그녀도 펠릭스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헨리가 화로 옆에서 손을 흔들며 ‘다 죽이면 끝, 다 죽이면 끝’ 하고 외쳐 댔다.
의인은 없고, 무모한 자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정확한 표현은 “나는 통치자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평균 이상인 자가 거의 없었고, 더러는 평균 이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 작가의말
평소보다 업로드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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