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3장 - 연인들의 죽음(1)
종막 불멸
3장 연인들의 죽음(*)
색맹의 화가가 서투르게 그려낸 풍경화처럼 창밖의 하늘은 온통 보랏빛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물감을 혼동한 실수를 세부 묘사로 벌충하겠다는 듯 죽은 가로등과 돌로 포장된 거리가 지나치게 선명해서 낯설었다. 보랏빛 하늘 아래로 맞배지붕이 검고 낮게 깔려 있었고 간혹 첨탑이 무용한 창질을 해댔다. 대기에 감도는 불길한 기운은 이제는 차라리 익숙해지고 만 것이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이자, 가장 마지막으로 살펴본 오베르지엔에서 이븐을 비롯한 사냥꾼들은 마침내 수상한 정황을 포착해낼 수 있었다. 순찰을 하듯 주변을 배회하는 마물들 몇을 조용히 처리하고서 잠입한 소도시의 풍경은, 스타샤에겐 낯익은 것이었고 이븐에겐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베르지엔은 쌍생아처럼 이 년 전의 잔베르 교구를 닮아 있었다. 주민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고, 골목과 골목마다 마물들이 때아닌 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갈라낸 마물들의 내장에선 소화가 덜 된 인간의 살점이 체모와 엉켜 흘러나왔다. 이븐은 어쩐지 이런 식의 쌍관법이 자신에게 무척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시작한 곳에서 끝을 내는 일. 등지고 달렸으나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회귀한 듯이, 운명을 가리키는 시계가 있다면 지금이 자정일 거라고, 이븐은 고요히 속으로 되뇌었다.
“올해 초에만 해도 은퇴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계셨었죠.”
“그랬지.”
웨인은 그렇게 답하고 문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러 나간 스타샤와 카챠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불길한 고요함은 머리로 버티는 것이었고, 분명한 소란은 몸으로 버티는 것이었다. 이븐은 둘 중 무엇이 더 나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저희랑 함께 계시는군요.”
“그런 것 같군.”
“뭐가 스승님의 마음을 돌린 겁니까?”
웨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창틀에 걸터앉은 이븐에게 손짓했다. 마물들의 시선을 끌지도 모르니 내려오라는 뜻이었다. 이븐은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고 무의식중에 분명한 소란을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덤벼들어 어느 한쪽을 끝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포적인 소망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게. 루퍼트는 내 첫 제자였어.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냥꾼들보다도 진지하게 직무에 임했지. 사명감이 남달랐어. 그런 성정이니 그런 일도 벌였던 거겠지.”
그리고 그런 제자가 한때 관계되었던 일의 정체를 알아내고 매듭을 짓고 말겠다는 결의가 웨인에게서 느껴졌다. 이븐은 결말을 직감하고 있는 이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노인이 가진 시계에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이 남겨져 있기를 기원했다.
“스타샤 말로는 사냥단에 친족 살해의 전통이 있다더군요. 혹시 모르니 웨인과 저도 서로 떨어져 있어야겠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운명의 장난처럼 보이겠지만, 기실 그렇지가 않아. 스승이 제자를 죽이거나 제자가 스승을 죽이는 경우가 유독 많은 건 우리가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들이기 때문이야.”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븐이 웨인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눈짓을 보냈다.
“내 스승이, 제자가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거지. 그냥 그럴 수가 없는 거야.”
“루퍼트를 사냥··· 루퍼트와 싸울 때 제 목을 찌르신 적이 있지요. 변이를 해제시키시려고 말입니다.”
“그랬지.”
“이번에도 그렇게 해줄 수 있으십니까?”
웨인의 홀쭉한 두 뺨이 일순 한숨으로 가득 차서 부풀었다.
“그게 자네를 가르친 내 업보라면, 그렇게 하지.”
“이번엔 적당한 타협이 없을 겁니다.”
“알고 있네.”
이븐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어딘가 숨어있을 헤레틱스를 떠올렸다. 펠릭스가 이끄는 게헤만의 사냥꾼들이 서쪽을, 이븐과 제국의 사냥꾼들이 동쪽을 각각 맡아 오베르지엔을 헤집었다. 수색의 진행은 연이어 출몰하는 마물들로 더뎠고, 결국 야밤의 사냥은 위험할 수 있다는 펠릭스의 판단에 따라 일행은 날이 저무는 즉시 은신처를 찾았다.
“이븐.”
“듣고 있습니다.”
이븐은 그렇게 답하고 왼손의 붕대를 갈고 있는 웨인을 바라보았다. 백작의 산성 용액에 닿았던 왼손은 물크러져 어류의 지느러미처럼 보였고, 잔베르에서 외과 수술을 통해 붙은 손가락들을 간신히 떼어낼 수 있었다. 웨인은 흘러나온 진물을 닦고 찬찬히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치료가 어렵다는 건 나도 아네만,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어. 다 같이 말이야. 어쩌면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어떤 방법 말씀이십니까? 철창에 저를 가둬놓고 끊임없이 인육을 공급하는 거요? 웨인, 당신도 그게 최선은 아니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이런 유의 대화를 할 때면 늘 그렇듯이, 이븐은 또 다시 진지하지 못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븐의 얼굴에 떠올랐던 서글픈 미소가 돌연 지워졌다.
“뷔센이 저를 못 알아보더군요.”
“그 친구 원래 오락가락하잖나.”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웨인은 장갑 낀 왼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굳게 다문 입 주위로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모여들었다.
“그래. 내가 괜스레 흔든 모양이지. 자넨 이미 답을 정해두었는데 말이야. 베른트 그 녀석도 갓난쟁이 데리고 행방불명이라고 하니 신경이 곤두섰던 거지.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저야 늘 그랬지요. 베른트도 다시 돌아올 겁니다. 그냥 떠날 친구가 아니니까요. 황제도 별로 관심을 쏟지 않는 듯하니 너무 염려치는 마십시오.”
지젤 황제의 꼼꼼하지 못한 성격은 이런 경우에 한해서는 축복이었다. 베른트도, 그리고 그가 참극의 현장에서 빼낸 황녀도 일단 눈앞에서 사라지자 지젤은 그런 잡스러운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곧 관두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 웨인이 지팡이칼을 움켜쥐었다. 부상당한 왼손을 급작스럽게 움직인 탓인지 그의 잇새로 불만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븐은 발소리에서 수효와 무게를 읽어내고 웨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이 주변은 잠잠해요.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둘러보죠.”
스타샤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카챠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와 방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에 기대어 둔 소총이 그녀의 앉은키보다 컸다. 무단으로 점거한 가정집에서도 주인 같은 위엄을 갖춘 웨인이 선뜻 자리를 권했다.
“의자가 남으니 편하게 앉게.”
“잠들까 봐요.”
바닥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벽에 꼿꼿이 기대어 앉은 카챠가 짤막하게 대꾸했다.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죠. 새벽같이 움직여야 하니 체력을 좀 보충해둬야 할 거예요.”
스타샤가 보여준 의외의 배려심에 이븐이 놀라는 시늉을 했고, 그녀는 또 그녀답게 놓치지 않고 곧바로 응징했다.
“끝에서 두 번째 불침번은 너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첫 번째와 마지막 순서에 각각 웨인과 카챠를 배치하는 것으로 독단적이고 신속하게 불침번을 정한 스타샤는,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머뭇거리는 태도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조금 달뜬 음색으로 웨인을 향해 물었다.
“건물 안은 둘러보셨어요, 영감님?”
스타샤와 카챠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그들도 마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으므로,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이븐은 웨인을 대신해 답하려 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군.”
웨인의 능청스러움은 연기엔 소질 없는 스타샤보다 훌륭했다. 카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스타샤가 얼른 제지했다.
“아냐, 쉬고 있어. 나랑 이븐이 잠깐 둘러보고 올 테니까.”
확신 없이 서 있는 이븐을 향해 스타샤가 재촉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문 밖으로 반쯤 나가 있었다.
“뭘 멀뚱멀뚱 보고 있어?”
주춤주춤 그녀를 따라 방을 나가는 이븐을 향해 웨인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게 고개를 가만 끄덕여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온 이븐의 몸이 억척스러운 힘에 이끌려 반 바퀴를 돌았다. 이어진 기습에 이븐은 앞니가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다.
멱살이 잡힌 채로 이븐은 스타샤의 손에 이끌려 더듬더듬 걸음을 옮겼다. 뒷걸음질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스타샤의 몸짓엔 오히려 망설임이 없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방문을 뒷발질로 차 열기까지 스타샤의 입술은 이븐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여기서? 정말로?”
이븐이 화끈거리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 입술이 여전히 제자리에 붙어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스타샤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이븐의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답을 갈음했다.
“정말로.”
*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이븐은 자신을 깨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한동안 누운 채로 가만히 있었다. 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스타샤의 다리를 옆으로 걷어 치웠으나 그것이 이유는 아닌 듯했다. 별 수 없이 이븐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웨인이 있는 방에 외투를 두고 온 탓에 그는 스타샤의 옷을 뒤적여야 했다. 이븐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의자를 들어 창 옆으로 옮겼다. 성냥을 잊어서 다시 스타샤의 옷을 뒤져야 했다. 부서진 의자의 잔해가 발에 걸렸을 때 이븐은 소리 죽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븐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집주인에게 속으로 사죄하고, 짝을 잃은 의자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이 고요와 평화가 지속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븐은 불현듯 자신이 평범한 일상을 가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바로 지금 남의 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처럼.
유리창에 비친 담뱃불을 보던 이븐은 그것의 정체가 실은 유성우라는 것을 깨달았다. 밤하늘을 향해 쏘아져 올라가는 유성들. 쏘아져 올라간다고? 이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식간에 담배가 입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이븐은 스타샤를 흔들어 깨웠다.
“펠릭스 쪽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던 스타샤도 창밖의 불화살을 보고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이븐은 옷가지를 스타샤의 품에 안겨주고 웨인이 있는 방을 향해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졸고 있던 웨인이 놀라서 지팡이칼을 떨어뜨렸다.
“신호입니다. 펠릭스가 원군을 요청하고 있어요.”
웨인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카챠를 불렀다. 카챠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리에서 죽은 새처럼 목을 꺾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연이은 사냥으로 모두 지쳐 있었던 데다가,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해 보니 이븐이 불침번을 설 차례였으므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이븐은 권총의 약실을 점검하며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방향은?”
“펠릭스가 맡았던 서쪽인데··· 지도를 봐야겠습니다.”
웨인은 품 안에서 탁본으로 뜬 지도를 꺼냈다. 게헤만은 행정과 절차의 나라라는 펠릭스의 말이 과연 무색지 않게, 지도의 내용은 충실하고 제법 상세했다. 이븐은 불화살이 쏘아져 올라온 위치를 대강 짚어냈다. 웨인이 낮고 빠르게 물었다.
“신호를 몇 번 보내던가?”
“제가 본 게 둘··· 아니, 셋이군요. 셋이면···”
“마물들의 기습이로군. 여기서 꺾은 다음, 선술집을 끼고 돌아서··· 됐어. 외웠어. 얼른 가세. 카챠, 자네도 채비하게.”
목을 돌리고 있던 카챠에게서 뼈마디 꺾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소총을 메고 허리에 찬 갈고리와 밧줄을 점검했다. 문틈을 비집고 스타샤가 들어오며 이븐의 부족한 관찰력을 보충했다.
“넷이었어요.”
지도를 접어 품에 넣던 웨인의 손이 멈칫했다. 네 명의 사냥꾼이 잠시간 굳은 채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적막을 깨고 확인 사살을 가한 것은 이븐이었다.
“공작이군.”
* 샤를 보들레르, 「연인들의 죽음(La mort des amants)」에서 차용.
- 작가의말
업로드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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