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4장 - 마지막 희생(1)
종막 불멸
4장 마지막 희생
돌바닥 위로 깔린 습기가 몸짓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부유했다가 살갗에 닿아 녹아들었다. 사냥꾼들의 등과 어깨 위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웨인은 입을 닫고 코로 호흡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휘두르는 칼에 너무 많은 힘을 담는 것이 위험하듯, 과호흡은 사냥에서 피해야 할 독이었다.
정말로 숨이 가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숨이 모자라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질려서 한꺼번에 공기를 들이켜면 몸은 부풀고 들떠서 죽기 알맞은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나 공작이 휘두른 칼날을 막아낼 때마다 신음성과 함께 머금었던 숨이 터져 나가는 것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커흑-.”
웨인이 나가떨어지자 스타샤가 재빨리 사이를 파고들어 공작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녀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그야말로 쇳덩이여서 칼을 들어 내리칠 때마다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의 모든 뼈마디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공작의 공격에 입은 외상은 차라리 전의를 북돋웠지만 체내를 좀먹는 고통에는 몸이 움츠러들었다.
움츠러든 몸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스타샤는 기합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덤벼, 이 개자식아!”
칼집에 칼을 넣을 틈은커녕 충분히 휘두를 기회조차 없었으므로, 그녀의 장기인 쾌속의 발도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장치의 도움을 빌리지 않은 채 순수한 팔과 어깨의 힘만으로 마물을 상대하는 건 느리고 고통스러운 자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작의 팔에서 튀어나온 수 갈래의 칼날을 막아낸 스타샤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서걱-
이어지는 공작의 공격을 막아낸 건 실비아였다. 그러나 맞서는 힘이 충분하지 못했기에, 쇠뇌검은 물고기처럼 몸을 뒤틀며 그녀의 손아귀에서 달아났다. 빗장뼈가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목 아래에서 피를 뿜으며 실비아의 몸이 무너졌다.
스타샤는 이를 악물고 별 수 없이 쓰러진 실비아의 몸을 밀어 치웠다. 사냥꾼은 사냥꾼을 구하지 않는다. 물론 이 명제는 그 자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공작이 가슴에 박힌 볼트를 빼내 던졌다. 실비아는 쇠뇌검을 떨어뜨리는 순간까지도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었다.
퍽-
총성이 멀었으므로 이븐의 공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타샤는 자신이 본 광경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탄환에 맞은 공작의 몸이 비틀거렸던 것이다. 스타샤는 그 이유 또한 곧 알 수 있었다.
“그런 거였군.”
스타샤는 넘어지며 혀를 씹는 바람에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 전투가 오페라라면 실비아의 볼트는 해결의 단서였고 카챠의 저격은 긴장의 고조를 알리는 스트레타였다. 피가 번져 붉게 물든 스타샤의 입술 위로 미소가 걸렸다. 살갗 아래로 흐르는 피를 쇠로 변이시키는 공작의 능력은 무한한 것이 아니었다.
사냥꾼들이 쏟아내는 공격에 대한 공작의 대응은 몸의 일부를 철로 만들어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몸의 모든 표면을 철로 덮지 않은 것은 예의 능력에 분명한 한계가 있는 탓일 터였다.
카챠의 탄환이 공작의 몸을 뚫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기민하게 움직여 저격 위치를 바꾼 덕분이었다. 실비아의 볼트가 유효한 타격으로 이어졌던 것 역시,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고 몸의 일부를 쇠로 변형시키는 공작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스타샤의 추론을 증명해주려는 것처럼 공작이 매서운 시선으로 주변의 건물을 훑었다. 카챠가 있는 곳을 찾아내려는 움직임이었다. 물론 스타샤가 공작의 그런 사정을 봐줄 리는 없었다.
“집중해, 뒤지기 싫으면!”
용수철에 응축되었던 힘이 폭발적으로 칼의 코등이를 밀어냈다. 칼날이 살에 닿는 감각이 착각인 듯이 아주 잠깐 스치고, 이어 쇠를 내려치는 익숙한 감각이 오른팔을 시큰하게 울렸다. 스타샤도 자신의 칼이 공작의 몸을 베어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탕-
다시 한 번, 공작의 몸이 비틀거렸다.
오베르지엔의 모든 건물 지붕을 한 번씩 밟아보겠다는 듯이 카챠의 저격은 또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그 작은 몸이 얼마나 민첩하게 움직여대는지, 스타샤는 건물 사이로 간혹 날아다니는 그림자로 짐작할 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참아줄 수 없겠다는 듯, 공작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철로 된 복면에서 그 특유의 물 먹은 듯 먹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쥐새끼가 있군.”
“하, 허세는.”
스타샤가 사뭇 즐거운 듯이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러나 정작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건 스타샤 본인이었다. 근접전에서 공작의 허를 찌를 의외성을 만들어내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챠의 존재는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녀의 생존에 사냥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작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을 때, 그를 제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선 건 헨리였다. 마지막으로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공작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헨리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톱날도(刀)로 공작의 다리를 걸었다.
츠컥-
그러나 공작은 거의 우아하게 보일 정도로 헨리의 칼을 피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뻗은 팔로 헨리의 몸을 스치듯 쓸었다. 헨리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치고, 그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자신이 만들어낸 피 웅덩이 속에서 헨리의 몸이 꿈틀거렸다. 과다출혈로 죽기 전에 익사가 걱정되는 판국이었다. 웨인이 얼른 발로 밀어 그의 몸을 뒤집었다.
스타샤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악을 썼다.
“이븐! 저 자식 잡아! 카챠를 지키라고!”
이미 달려가는 중이었던 이븐의 귓가에서 스타샤의 외쳐대는 소리가 빠르게 지워졌다. 이븐의 뜀박질은 흡사 네발 달린 짐승과 같았고, 공작의 걸음은 그와 대비될 만큼 귀족적이었다. 장화를 뚫고 나온 칼날이 바닥에 박혔다가 날듯이 도약해 다음 발을 디디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런 걸음은 건물의 외벽에서도 여전했다. 조금도 급한 기색 없이 공작은 외벽 위에 꼿꼿이 수직으로 서서 성큼성큼 올라갔다. 이븐은 부디 공작이 집어낸 건물에 카챠가 없기를 바라며, 튀어나온 벽돌을 잡고 뒤따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공작의 발이 외벽의 끝을 디뎠을 때, 이븐은 또 다시 자신의 희망이 배반당한 것을 깨달았다. 총성이 울리고, 달아나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이븐은 더욱 조급해져서 거의 절망적으로 외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돌 틈에 낀 손톱이 부러져 속살을 찔렀다.
머리 위, 건물의 옥상에서 약실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총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액체가 쏟아지는 불길한 소리가 이븐의 뒷목을 서늘하게 쓸고 지나갔다. 숨이 넘어가는 듯 꼴깍거리는 소리가 누구의 성대에서 나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븐은 이를 악물고 팔을 뻗어 꼭대기 층의 창틀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인가 둔탁한 물체가 이븐의 머리를 내리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정수리에 가해진 충격으로 흘러나온 눈물을 지우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카챠의 소총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븐은 입술을 짓씹고 팔을 내뻗었다. 이삼 분도 채 되지 않았을 텐데도 외벽에 매달려 있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후드득-
저주받은 새벽의 느닷없는 세례처럼, 이븐의 머리 위로 피와 살점이 쏟아져 내렸다. 분리된 팔과 다리와 몸통이 차례로 이븐의 몸을 치고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몸을 때리는 조각난 몸이, 그 두드리는 매 손길이, 아니 몸짓이 질타처럼 느껴져서 이븐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삼키고 있던 가장 어두운 울음의 메아리가 잉크처럼 몸 안에서 번졌다.
외벽의 끝, 건물의 꼭대기를 짚는 이븐의 손을 누군가 지그시 밟았다. 이븐은 충혈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공작의 품에 안긴 머리가 그와 함께 이븐을 노려보았다.
“늦었군, 사냥개.”
*
“아, 젠장.”
오베르지엔을 뒤흔드는 늑대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스타샤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모조리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로등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던 실비아가 열에 들떠서 중얼거렸다.
“주여,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 적들을 흩으시고 부정한 술책을 좌절케 하시고······.”
기도는 기침에 먹혀 중단되었다. 누군가 목구멍으로 쇠스랑이라도 밀어 넣은 듯이 실비아는 고통스럽게 몸을 들썩였다. 헨리가 자신의 지혈을 돕고 있는 웨인에게 손짓을 했다. 자기 대신 실비아를 봐 달라는 의미였다. 새하얗게 질린 헨리는 옆얼굴의 살갗이 벗겨져 뒤집어졌으나 피는 더 이상 흘리지 않았다.
“데리고 돌아가실래요?”
스타샤의 물음에 웨인은 대답하지 않고 헨리를 향해 물었다.
“실비아를 데리고 돌아가겠나?”
헨리가 듬성듬성한 이를 드러내며 힘없이 웃었다. 그 역시 웨인을 흉내 내 대답하는 대신 실비아에게 물었다.
“돌아가?”
마지막으로 실비아가 검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으로 지탱한 몸이 땀에 젖은 채로 떨렸다. 그녀는 말하는 것조차 힘겹다는 듯 천천히 끊어서 단어를 하나씩 내뱉었다.
“가자. 다시, 싸우러.”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뒤집으며, 실비아가 앞장섰다. 먼 곳에서 무엇인가 무너지는 소리와, 벽을 힘껏 때리는 소리와 고깃덩이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걸음이 느려서 실비아는 금세 따라잡혔다. 헨리가 그녀를 부축했고, 피에 젖은 장화 때문에 넘어질 뻔한 헨리를 웨인이 다시 끌어올렸다.
- 작가의말
다음 주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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