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4장 - 마지막 희생(2)
때로는 준비된 마음조차 무너뜨리는 광경이 있고, 돌바닥 위에 엉망으로 뭉개진 시신이 그러했다. 토막 쳐진 시체는 밟아 으스러뜨려 놓은 듯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벌레에게나 어울릴 법한 죽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실비아가 비통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참혹한 광경 앞에서도 검시관은 필요하다는 것처럼 시신을 살피고 있던 웨인이 담담하게 신원을 확인했다.
“부고르스카야 엽사로군.”
“다들 이 정도는 각오한 거 아녔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스타샤의 목소리가 분노와 설움으로 떨렸으므로 본래 의도한 의지를 다지려는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사냥꾼들은 시신이 떨어졌을 건물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살점이 잘려나가는 소리와 피 웅덩이를 밟아 철퍽거리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내려오길 기다리지.”
웨인의 판단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스타샤만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녀도 곧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체념하다시피 수긍했다. 그녀의 저돌성도 완전한 소경은 아니어서 전장과 묫자리를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뒤엉켜 싸우던 한 쌍의 마물 군주들은 곧 바닥으로 내려왔다.
카가가각-
사냥꾼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피했다. 낙하의 속도가 느린 건 그들 군주들의 독특한 자세에서 기인했다. 돌로 된 건물의 외벽에 불똥이 튀고, 마치 끌로 벽을 긁어내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뒤엉킨 형체를 간신히 분간해낸 스타샤는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새까만 털로 뒤덮인 늑대인간이 공작의 머리를 붙잡고 벽에 댄 채, 그대로 내리그으며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이 땅에 떨어졌을 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냥꾼들의 몸이 흔들릴 만큼 커다란 충격이 바닥을 때렸다.
바닥이 깨어져 파편이 튀고, 움푹 파인 자리 위에서 둘은 또 다시 엉켜서 싸웠다. 공작이 먼저 몸을 일으켰고, 늑대인간이 따라 일어나며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공작의 몸이 허공에 떠서 날아가다 뒤로 한 바퀴 회전하고 멈춰 섰다.
따라 붙으려던 늑대인간의 몸이 일순 멈칫했다. 그 새카만 마물은 자신의 가슴에 손톱을 박아 넣고 헤집다가 칼날을 뽑아냈다. 소름끼치는 포효가 뒤를 이었다. 잡아 뜯었던 가슴은 포효가 끝나기도 전에 아물어 붙었다. 앞으로 쏟아질 듯 성큼성큼 나아가는 짐승의 걸음걸이로, 늑대인간은 공작을 향해 다가갔다.
캉-
웨인이 공작의 등을 노려 지팡이칼을 휘둘렀다. 사냥꾼들은 어느새 공작의 뒤로 반원형의 진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었다. 공작은 칼날로 변형된 팔을 휘둘러 웨인의 칼을 막고 그를 추격했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웨인이 노리던 바였다.
늑대인간이 뒷발로 바닥을 박차고 공작을 덮쳤다. 공작의 몸이 미끄러지듯 품에서 빠져나왔다. 공작의 팔에서 뻗어 나온 수 갈래의 칼날이 늑대인간의 예리한 손톱을 막았다. 다시 살점이 갈라지고 피가 쏟아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마치 세상에 서로를 끝낼 수 있는 존재라곤 서로밖에 없다는 듯이, 둘의 싸움은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칠 만큼 치열했다. 그대로 두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이 싸움의 끝을 앞당기기 위해 달려든 건 물론 사냥꾼들이었다.
사냥꾼들은 파리 떼처럼 성가시게 찌르고 빠지며 공작의 빈틈을 유도하거나, 이미 만들어진 빈틈을 벌렸다. 공작은 늑대인간의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달라붙는 사냥꾼들을 향해 응징을 가했다. 부상으로 동작이 굼뜨던 헨리와 실비아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실비아!”
비척거리며 다시 일어나는 헨리와는 달리 넘어진 채로 꿈쩍 않는 실비아를 향해 스타샤가 외쳤다. 웨인이 공작을 막아서며 생사가 불분명한 실비아를 엄호했다. 그리고 그 사이 몸 안을 떠돌던 또 다른 칼날을 빼낸 늑대인간이 다시금 덮쳐들었다.
공작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사냥꾼들의 대열도 그를 따라 물러났다. 늑대인간과의 때아닌 협업은 순조로운 듯 보였으나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 이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늑대인간으로의 완전한 변이를 막기 위해 취해왔던 조치들은 이를테면 둑을 쌓는 작업과 유사했다. 그리고 그 둑이 무너진 지금, 저 시커멓고 거대한 마물에게 이성이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해왔던 싸움이다.”
또 한 차례의 접전을 막 끝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지친 듯한 목소리였지만 웃음기가 엷게 배어 있었다. 늑대인간의 몸도 제자리에서 거친 호흡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공작의 말을 이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 땅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너희 인간들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이었다.”
공작의 굽은 어깨가 웃음으로 들썩였다. 표면이 거친 철판 두 개를 마주 비비는 듯한 음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봐라. 이제 우리는 이렇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싸우다니, 우리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스타샤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녀는 언제든 뽑아 들 수 있게 칼자루 쥔 손에 힘을 넣은 채로 말을 이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아무리 점잔을 빼고 인간을 흉내 내 갖춰 입고 대등한 적이라도 되는 양 기세등등하게 날뛰어도, 너희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해충과 다를 바가 없어.”
이제 그녀의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우리가 벌레 같은 존재였다고? 아니, 처음부터 벌레는 너희 마물들이었지. 우리는 구제업자다, 빌어먹을 공작 나리. 그리고 그게 인간의 땅에 발을 디딘 너희들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취급이지.”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음에도, 말은 쉽게 풀려나왔다. 어쩌면 그것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본심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공작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웃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죽고 죽이는 전투가, 날선 대화가 모두 한때의 유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스타샤는 자신의 발치에서 무엇인가 꿈틀대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곧 그것이 자신이 흘린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떨어져 주인 잃은 혈액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공작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화를 감지한 것은 스타샤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고였던 모든 피가 사냥꾼들은 알지 못하는 어떤 부름에 감응된 듯했다.
땅을 지도로 적의 군세를 표현한 그림처럼, 돌로 포장된 바닥의 틈새에 붉은 선이 번져 나갔다. 피는 공작의 다리를 타고 오르며 이미 몸을 감싸고 있는 철판의 빈틈을 채워나갔다. 늑대인간이 그걸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시커먼 마물은 공작을 향해 달려들어 끊어진 싸움을 재개했다.
늑대인간이 덤벼들자 공작의 주위에 모였던 혈액이 일순간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검붉은 빛의 보라를 만들어냈다. 낱낱의 핏방울은 늑대인간의 살갗에 닿는 즉시 쇠붙이로 변해 파고들었다가, 다시 혈액으로 변해 혈관을 따라 흘렀다.
“켕-!”
걷어차인 개가 내지르는 비명처럼, 늑대인간의 예리한 이빨 틈으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사이 공작은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검은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공작의 몸이 쇠로 뒤덮였다. 검은 철판의 연결부를 붉은 피가 채워 마치 검은 돌 틈으로 용암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와라, 사냥개. 최후의 전투를 시작하자.”
그 다음 벌어진 일을, 사냥꾼들은 감히 눈으로 따라가지 못했다. 늑대인간의 예리한 손톱이 공작의 갑옷을 할퀴고 찢어 놓으며 불꽃이 튀었고, 매서운 공세를 받으면서도 공작은 상대의 살 아래로 칼날을 밀어 넣는 예의 반격을 꾸준히 감행했다.
지금까지는 실제 싸움의 유불리와는 별도로, 늑대인간이 월등한 완력으로 공작을 밀어붙이는 형세였다. 그러나 공작의 몸이 쇠로 뒤덮인 뒤의 싸움은 완전히 다른 단계로 접어든 듯이 보였다. 마치 무른 몽둥이로 예리한 단도를 쉴 새 없이 두드리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이 난전은 사냥꾼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난처한 것이었다. 공작이 두르고 있는 갑옷은 생물처럼 늑대인간의 공격이 닿을 때마다 칼날로 변하며 공격자의 몸을 깎아 나갔다.
“캬악-!”
움푹 팬 주둥이에서 새살이 돋아 나오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무릎 아래가 잘려나가며 늑대인간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늑대인간은 절단된 다리를 쥐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 마물은 맹공의 기세를 잃고 낮게 몸을 도사리며 방어 태세로 돌아섰다.
이어진 공작의 공격에 늑대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피를 뿜어냈다. 피는 공작의 몸 위에서 쇠로 변하며 그를 더욱 단단한 요새로 만들었다. 이 급작스러운 전세의 역전에 가장 당혹감을 느낀 건 사냥꾼들이었다. 그러나 웨인은 곧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허기가 진 거로군.
웨인은 쓰게 웃으며 이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루퍼트와 싸울 때 그랬던 것처럼, 변이한 자신을 막아달라던 부탁. 웨인은 그러나 자신이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임을 알았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면 차라리 최선을 다해 어기고자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수세에 몰려 피를 흘리던 늑대인간의 노랗게 빛나는 눈이 웨인을 향했다.
*
어지럽고 불쾌한 느낌. 세상이 멋대로 수축하고 이완하며 뇌를 쥐어짜는 듯한 감각에 이븐은 그저 몸이 가는 대로 정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붉게 물든 시야 속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요란스럽게 움직였다.
스스로도 운신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덤벼드는 상대를 죽여서 치워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건 자신이 떠올려낸 생각이라기보다 누군가 머릿속에 두고 간 물건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리고 맹렬한 허기. 그것만이 어지러운 정신 속에서 유일하게 자명했다. 머리에 내리친 뒤로 꺼지지 않는 번개처럼 뇌의 주름마다 공허와 같은 허기가 스미고 번져 몸 안을 울렸다. 이븐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선 노인을 보았다.
깨닫지 못한 사이 팔과 다리, 아니 네 다리는 바닥을 박차서 달리고 있었다. 살을 찢고 가르는 칼날의 감각이 옆구리를 할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옆에서 터진 누군가의 비명이 예민한 귀를 파고들고, 그러나 곧 천천히 차오르는 포만감 속에서 모든 것이 지워졌다.
기다란 주둥이가 생살을 찢고 뼈를 깨물어 부수는 데에 용이했다. 이토록 편리한 도구가 자신의 몸에 붙어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느끼는 것처럼, 사냥꾼의 몸을 뜯어 삼키는 이븐의 몸이 희열으로 떨렸다. 사냥꾼은 저항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사냥감이 실망스러워서, 이븐은 팔을 잡아 뜯었다.
사냥꾼은 여전히 저항하지 않았다.
이븐은 포식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쇳덩어리와 결말을 지어야 할 때가 된 듯싶었다. 인육과 혈액이 배를 불리는 그 즉시, 몸 안에서 힘이 차올라 곳곳으로 뻗치며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이븐은 고개를 들고 길게 울부짖었다.
*
“너를 봐라, 베르자크.”
이븐에게 깔린 채로 공작이 말했다. 쿨럭이는 입에서 피 대신 쇠붙이가 튀었다. 공작의 몸은 허리에서 끊겨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스타샤의 칼끝에서 마치 카챠의 복수라는 듯 잘게 조각나고 있었다.
“넌 결국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븐은 대꾸하지 않고 손을 들어 공작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검은 털로 뒤덮이고, 손톱이 자라나 있었으나 이제는 인간의 형상에 더 가까워진 손 위로 힘줄이 솟았다.
퍽-
손아귀 속에서 아모크 공작의 머리가 잘게 부수어졌다. 머리 잃은 몸은 잠시간 경련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븐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렸다. 열병을 앓았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앞으로 쏟아질 듯 숙인 몸이 매섭게 배 속에 든 것을 게워냈다. 기억을 뱉어내려는 것처럼 속을 모조리 비워낸 뒤에도 구토는 그치지 않았다.
“입게.”
웨인이 다가와 피 묻은 옷가지를 건네주었다. 헨리의 옷이었다. 이븐은 차마 받아 들지 못하고 다시금 구역질을 했다. 그는 간신히 속을 진정시키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만난 지 사흘도 채 안 됐습니다. 그런데 제게······.”
웨인은 토사물에 섞여 나온 살점을 내려다보고 다시 옷가지를 이븐에게 건네 그의 품에 안겼다. 죽인 사람에게 유품의 처리를 맡긴다는 듯이, 그것이 마치 죄에 상응하는 벌이라는 것처럼 웨인의 몸짓이 단호했다.
“가세. 늦기 전에.”
- 작가의말
끝맺지 않은 문장이 있는 것을 발견해 수정했습니다. - 2019.2.9.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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