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4장 - 마지막 희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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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우리를 부르는군.”
웨인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그건 성당의 종루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였고, 행여 듣지 못할세라 여러 번 반복해 장엄한 느낌은 없이 오히려 경박했다. 바깥의 수상쩍은 보랏빛 어둠은 더욱 짙어져서, 이제 사물은 그 윤곽으로만 간신히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돌아올 겁니다.”
이븐의 말에 실비아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많은 피를 흘린 탓에 수혈이 불가피했다. 스타샤의 피를 넘겨받은 그녀가 살아남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스타샤는 실비아가 이븐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이는 것과, 이븐이 차분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지켜보았다. 귀엣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받을 피는 다 받아놓고 이제 와서 그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뭔데?”
이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들어 스타샤를 제지했다. 물론 실비아의 말은 스타샤가 예상한 바와 같았다. 그녀는 마지막에 웨인을 밀치고 늑대인간의 아가리 속으로 자신을 던져 넣다시피 한 헨리의 운명을 본받으려는 것이었다.
스타샤는 이로 실을 끊어내고 꿰맨 상처를 매만졌다. 헤벌어졌던 팔뚝의 자상은 이제 엄숙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투에 나서면 또 다시 철없이 수다를 떨 게 분명했으므로, 스타샤는 붕대로 팔뚝을 동여맸다.
“돌아왔는데 죽어 있기만 해봐.”
죽어 있으면 어쩌겠다는 건지는 알려주지 않고 스타샤가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븐은 옥상에서 회수한 권총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웨인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길을 익힌 웨인이 먼저 나가서 멀뚱멀뚱 서있는 스타샤를 이끌었다.
공작이 죽자 통제력을 잃은 마물들은 더 광포해져서 날뛰거나 오베르지엔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군주급 마물이 동종의 마물에게만 발휘할 수 있다고 알려진 통제력이 실상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주는 장면이었다. 이븐은 항마연구원에 전달할 수 있도록 이 사실을 기억해두려다 곧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고 관두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인데.”
다시 한 번 도시의 하늘을 흔들어 놓는 종소리를 들으며 이븐이 감상을 밝혔다. 불쾌한 의문을 떠올린 듯 스타샤의 얼굴 위로 불편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싸움이 끝났다는 사실은 어떻게 안 거지?”
“그게 저들의 특기인 모양이니 깊게 생각하지는 말게.”
웨인의 대꾸를 들으며 이븐은 그가 막심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븐은 수백 번 되새김질했던 그의 유언을 또 다시 꺼내 되뇌었다. 공작을 죽이고 서펜트를 막아서 문을 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공작을 죽였고, 이제 서펜트를 죽이러 가는 길이었다.
심장 대신 불에 달군 쇠가 가슴 속에 들어앉은 듯,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몸이 달떠서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건 죽은 동료의 유지를 계승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유열 때문이었고, 또한 동료를 산 채로 뜯어 삼켰다는 죄악감 때문이었으며, 끝내 벌여놓은 일을 매듭짓지 못하고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져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도는 안 봐도 될 것 같은데요.”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확인하는 웨인을 향해 스타샤가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밤눈이 어두운 탓인지 웨인이 한참 바닥을 살폈다. 바닥 위에는 시체를 끌고 간 듯 핏자국이 여러 겹의 선을 그리며 말라붙어 있었다. 스타샤가 지도의 무용성을 지적한 이유도 곧 분명해졌다.
사방의 핏자국이 한 길로 모여 해 뜨지 않는 아침의 원흉을 지목하고 있었다. 시체들이 남겨 놓은 그 마지막 전갈이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는 방향은 물론 성당 쪽이었다. 핏자국을 따라 성당에 다가갈수록 악취가 점차 짙어졌다.
일찍이 마비됐을 코는, 그러나 매번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악취에 놀라며 좀처럼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몸의 모든 구석들이 이 날만큼은 깨어 있기로,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인을 보필하기로 다짐한 듯이 지나치게 생생한 감각들을 쉬지 않고 뇌 속으로 물어다 주었다.
“들어오세요, 들어와!”
성당의 활짝 열린 문 뒤에서 유쾌하게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목소리였다. 이븐은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며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성당에 들어섰을 때 세 사냥꾼은 거의 동시에 탄식을 흘렸다. 악취조차 잊을 만한 광경이 한순간에 눈을 향해 쏟아졌다.
본래 신자석으로 쓰이는 장의자가 놓였을 가운데 통로는 훤히 비어 있었다. 이븐은 거울을 연상시킬 만큼 지나치게 말끔한 바닥이 실은 핏물로 들어찬 탓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발을 움직이자 바닥 위로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양편을 가득 메운 시체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길 높이로 쌓인 시체들은 제단 위에도 있었다. 문과 가운데 길만을 남겨두고 말발굽처럼 쌓아놓은 시체들은 경험과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풍경이라서 차라리 거룩했다. 성서의 제작자들이 이 풍경을 봤더라면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누구도 이토록 위대하게 지옥을 묘사한 전례가 없었다.
“반갑네. 베르자크, 메이츠니르. 우린 구면이지. 그리고 당신은 헬라이드 엽사겠지요?”
제단 아래 기대어 서 있던 페르디낭 랭데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이븐이 권총을 들어 그를 겨누자 페르디낭은 호들갑스럽게 손사래를 쳤다.
“쏘지 말게. 쏘지 마.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을 건가, 정말로?”
탕-
다리를 감싸 쥐고 펄쩍 뛰던 페르디낭이 미끄러져 나자빠졌다. 핏물 속에서 고통으로 몸을 뒤트는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아무것도 이해 못 하는 무식한 사냥꾼이 어쩌고 하던 그는 이븐의 총구가 또 다시 자신을 겨누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둘 중 누가 서펜트지?”
왼손의 총으로는 여전히 핏물 속에서 허우적대는 페르디낭을 겨눈 채로, 이븐이 제단 위에 서 있는 남녀를 오른손의 총으로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뒤로 빗어 넘기고, 매부리코 위로 안경을 걸친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수천, 나아가 수만의 죽음이 중첩된 공간이다, 베르자크. 경망하게 움직이면 우리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
탕-
“본론만 말해. 당신들 실내 장식 감각 때문에 오래 있고 싶지 않으니까.”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질 뻔한 서펜트는, 그러나 이븐의 예상대로 죽지 않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목에 뚫렸던 구멍이 메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그를 향해 이븐이 말했다.
“공작을 죽였다.”
피 범벅이 된 채로 간신히 일어난 페르디낭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시체가 쏟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둔 장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장의자의 등받이를 짚고 선 페르디낭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들었어, 아리아나? 공작을 죽였대.”
다시 한 번 이븐의 권총이 불을 뿜고, 페르디낭의 반대편 발목이 마치 쌓아둔 나무토막을 빼내는 놀이의 한 장면처럼 날아갔다. 철퍼덕 자빠진 페르디낭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만 쏴, 이 미친 자식아! 난 인간이야, 그냥 인간이라고!”
"그냥 인간은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아."
이븐이 권총의 끝으로 성당의 내부를 가리키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리아나라고 불린 여자는 팔짱을 낀 채로 손끝만 움직여 쌓여있는 양편의 시체를 차례로 가리켰다. 보이지 않는 관현악단을 지휘하듯 주술적인 느낌마저 깃들어 있는 손짓이었다. 시체 더미가 역겹게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형상이 느릿느릿하게 솟았다.
수십 구의 시체를 이어붙인 듯한 모양새의 거인이 사냥꾼들의 양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븐은 거인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머리와 팔다리 따위가 제대로 된 형체를 갖추지도 않고 단지 흘러내리는 듯한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시체로 된 거인들은 마치 헤레틱스의 세 학자들을 호위하는 사명이라도 부여 받은 듯 사냥꾼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거인들의 뒤에서 아리아나가 말했다.
“경의를 표할게, 사냥꾼. 공작을 죽인 건 정말이지 놀라운 업적이야. 그리고 원래대로였다면 우리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겠지.”
시체 거인들 사이로 내비친 아리아나의 얼굴에는 깔보는 듯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계획은 바뀌었어. 새로운 열쇠를 찾았거든. 공작은 우둔한 데다가 싸움밖에 모르는 마물이었지. 만약 싸움에서 살아남은 게 공작이었다면 그 자식은 또 다시 문의 주도권을 탈취하려 들었을 거야.”
“그와 함께 이 일을 도모하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성패가 신뢰할 수 없는 괴물의 손에 오롯이 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를 배제하고도 성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지.”
서펜트가 아리아나의 말을 받았다.
“켈레넨스크에서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로 우리는 대안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공작만큼 최초의 마물에 가까운 자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 그래서 우리가 택한 건 인위적으로 공작에 버금갈 만큼 강력한 마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테오도어 볼드윈.”
씹어뱉듯 저주스러운 이름을 말한 이븐이 숨을 가다듬고 덧붙였다.
“잔베르가 너희들 작품이었군.”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공명시키기 위해서는, 심연 너머에 있는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해야 한다. 공포, 절망, 고통, 살의, 그리고 죽음.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죽음. 그것이 심연의 본질이었다. 늑대인간들의 군주이자 공작의 대체재로서 우리가 택한 볼드윈은 경이로운 수완을 발휘해서 교구 하나를 집어삼켰다. 당초 기대했던 수준을 넘어섰지. 본래 계획은 아니었지만 켈레넨스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을 열 수도 있었다. 어떤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이븐은 물론 서펜트가 지칭한 문제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븐 베르자크, 너의 등장으로 우리의 계획은 또 다시 어그러졌다. 우린 다시 공작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그의 힘을 약화시켜야 했고, 그가 이끄는 노블 다이스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너와 사냥꾼들이 도움이 되었지.”
사냥단과 노블 다이스를 충돌시켜 두 세력을 동시에 약화시키는 헤레틱스의 전략은 마지막까지 꾸준해서, 이제 이븐의 곁에 남은 건 웨인과 스타샤뿐이었다. 이븐은 자신의 양편에 각각 서있는 둘을 번갈아 보며, 이들 노련한 사냥꾼들이 언제든 뛰어나가 거인을 베어 넘길 준비가 되어있음을 눈치 챘다.
“전쟁이 홍역처럼 국경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파장이라고 하면 이해하겠나? 문을 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좌표를 교란시키는 존재를 감지했다. 공작은 우리 곁에 있었으므로 곧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
이븐은 눈을 잔뜩 찌푸린 채로 서펜트가 늘어놓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불확실했던 예상은 서펜트의 다음 말에서 점점 뚜렷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 존재가 떠오른 거다. 한 교구를 통째로 집어삼켰던 테오도어 볼드윈의 힘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절망과 고통과 죽음을 감당할 수 없을 만치 넘치도록 껴안고 있는 남자. 그래서 이 땅위의 모든 존재들 가운데 심연에 가장 근접한 자, 그 자체로 하나의 심연이 된 자.”
제단 위에서 이븐을 향해 두 팔을 뻗은 채로, 마치 그의 존재를 찬양하듯 경외감 서린 얼굴로 서펜트는 그림의 마지막 조각을 던져 주었다.
“정말로 느껴지지 않나? 두 세계가 너로 인해 공명하고 있는 것이?”
핏물로 뒤덮인 바닥에서 변화가 발생한 것은 그 때였다. 책의 한 페이지가 돌연 솟아난 것처럼, 검붉은 바닥 위로 짙은 검은 빛이 글자와 도형을 만들어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였고, 도형 또한 한 번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건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언어인 듯이 보였다.
서펜트의 목소리엔 이제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넌 나를 막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말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됐지. 호기심의 병을 앓고 있는 건 우리 학자들뿐만이 아닌 듯하군.”
서펜트의 말에 아리아나가 짧게 코웃음 쳤다. 그녀는 싸늘한 어투로 조롱하듯 이븐을 향해 말했다.
“혹여나 자살이 이 일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길 바라, 베르자크. 여기에 네가 현존한다는 사실만으로 너는 심연의 세계를 끌어당기고 있으니까.”
문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성당의 가운데 통로 위, 한 쌍의 거인들 뒤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구멍이 점처럼 생겨났을 뿐이었다. 새카만 점은 소용돌이치며 주위의 피를 몰아내고 점차로 직경을 키워나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불길하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성당의 둥근 천장에 부딪쳐 울렸다. 소리는 거대한 구멍 속에서 새어나오는 듯했다. 구멍이 무서운 기세로 회오리치며 주위를 집어삼키고, 소리는 이제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비명은 귀를 거쳐 듣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두 세계가 이어진 거야, 사냥꾼들. 두 세계가 이어졌다고.”
쓰러져 있던 페르디낭이 바닥에서 기며 지껄였다. 그는 넓어져 가는 구멍을 피해 제단 위로 올라갔다. 페르디낭의 얼굴은 총상의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오랜 연구의 성과를 목도하는 희열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이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 세계에 있는 나의 존재가 심연을 끌어당긴다고 네 입으로 그랬잖아.”
흥분해서 자신들도 깨닫지 못한 사이 숨소리가 커진 학자들을 향해, 이븐이 운을 뗐다. 아리아나라는 여자가 구태여 지적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븐은 총구를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 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들 헤레틱스가 열어젖힌 문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물건이 아닌 듯했다.
이븐이 버릇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로 덧붙였다.
“그럼 내가 심연 속으로 뛰어든다면 어떻게 되지?”
이븐이 던진 말에 한순간 성당이 얼어붙은 듯했다. 서펜트와 아리아나, 그리고 페르디낭의 표정이 굳고, 스타샤와 웨인은 적을 경계하는 것도 잊고 이븐을 돌아봤다. 서펜트는 자신감 넘치던 태도를 잃고 말을 더듬었다.
“멍청한 소릴 하는군, 사냥개. 심연은··· 네가 뛰어든다고 해서······ 넌 그냥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저 너머는 결코······.”
이븐이 달리기 시작하자 서펜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막아!”
서펜트의 노호에 시체 거인들이 반응했다. 그들은 달려가는 이븐을 막기 위해 거대한 몸을 기울였고, 이븐을 향해 촉수 같은 팔을 휘둘렀다.
츠컥-
스타샤와 웨인의 칼이 갑작스레 돋은 날개처럼 뻗어 나가며 이븐의 양편에서 가해진 공격을 막아냈다. 이븐은 몸을 한껏 낮춰 거인들 사이를 통과하고, 이제는 소용돌이치는 것을 멈춘 구멍을 향해 나아갔다. 심연은 검고 끈적거리는 미지의 물질로 채워져 있었다.
아리아나가 바닥을 향해 팔을 내질렀다. 그녀의 팔은 바닥을 뚫고 들어갔고, 이븐은 무엇인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그건 카일로파드 자작이 배 속으로부터 뽑아내던 마수와 유사했다. 이븐은 그 마수를 겨냥해 탄환을 퍼부어 끊어냈다.
서펜트가 허둥지둥 허리에 걸려있던 총을 빼 드는 것이 보였다. 제단 위로 간신히 올라갔던 페르디낭이 몸을 급하게 움직여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아리아나는 이제 거의 절망적으로 바닥에 손을 집어넣어 같은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 마치 다들 합심해서 소극(笑劇)을 연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븐은 서펜트가 쏜 총이 가슴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상처가 아물었다. 그는 뒤돌아서서 시체 덩어리와 맞서 싸우고 있는 웨인과 스타샤를 차례로 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타샤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븐은 오래도록 바라볼 수 없어서 천천히 고개를 젖혀 몸의 중심을 옮겼다. 균형을 잃은 몸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뒤로 쓰러졌다.
심연이 이븐의 몸을 흔적도 없이 삼켰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븐의 대사를 하나 추가했습니다. - 2018.12.25.14:19
서펜트의 대사 가운데 “산란”을 “교란”으로 고쳤습니다. - 2019.2.9.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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