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5장 - 빛을 향해(1)
종막 불멸
5장 빛을 향해
기워 붙인 살점을 베어내자 피가 쏟아졌다. 정육점에 걸린 돼지를 칼로 때리는 듯 둔탁한 느낌이 손과 어깨로 번졌다. 스타샤는 칼끝이 허공에 그려낸 붉은 호선이 손을 떠난 활시위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리의 접합부를 깊게 베인 거인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머리를 베기 위해 칼을 몸으로 당긴 스타샤는 이븐과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는 눈, 철없이.
밑동이 찍혀 쓰러지는 고목과 같이, 맞지도 않는 옷을 입은 이븐의 몸이 뒤를 향해 넘어갔다. 입술을 달싹여 무엇인가를 말하고, 혹은 말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는 모든 것을 남기면서, 책 모서리에 휘갈긴 낙서를 빠르게 넘겨 생명을 불어넣는 아이들의 마법처럼, 이븐의 모습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무릎으로, 그리고 마침내 눈 위에 맴도는 잔영으로만 아프게 남았다.
몸을 당기는 억척스러운 힘에 스타샤는 깨어나 정신을 수습했다. 온몸이 으스러질 뻔한 위기를 웨인 덕분에 간신히 모면한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설욕을 꾀했다. 거인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은 머리통이 핏물을 튀기며 바닥에서 뒹굴었다.
“배를 가르게!”
인조 마물의 작동 원리를 먼저 알아낸 웨인이 외쳤다. 창자를 쏟아낸 거인의 몸이 쓰러져 미동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웨인이 가세하기 위해 스타샤 쪽으로 다가붙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쿵-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충차가 보이지 않는 성문을 향해 격돌한 듯 둔중한 울림이 성당의 사방을 뒤흔들었다. 심연이라 불리는 저 저주스러운 늪에서 일순 뿜어져 나온 풍압에 쌓여있던 시체들이 뭍으로 끌려나온 물고기 떼처럼 경련했다. 시체 거인들은, 웨인이 쓰러뜨렸던 놈까지 새 생명을 얻은 듯이 핏물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계의 끝을 향해 뻗어나갈 것만 같던 바람은 한순간에 방향을 틀어, 이제는 세계의 끝까지 끌어 당겨 집어삼킬 기세로 심연을 향해 모여들었다. 웨인과 스타샤의 등과 목에 부딪치는 바람의 느낌은 실재하는 것이었음에도 외투 자락 하나 휘날리지 않았다. 가상의 바람이 가상의 몸을 쓸고 지나가는 듯이.
“제기랄, 또, 빌어먹을 반작용이······!”
그러나 시체 거인과 헤레틱스의 학자들에게만큼은 이 미지의 바람이 결코 가상의 것에 그치지 않는 듯했다. 거인의 몸을 이루던 시체들이 본래 그러해야 했을 모양으로 흩어져 떨어지고, 서펜트와 아리아나는 유령에 붙잡혀 끌려가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주변의 사물을 되는 대로 끌어안고 있었다. 스타샤는 그들의 몸 위로 혼탁한 연기가 한 꺼풀 벗겨지는 장면이 환영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문은 내버려 둬! 여길 떠나야 해!”
“공작은? 공작이 있으면 다시···!”
이미 죽은 공작을 찾을 만큼 경황이 없어진 서펜트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울려 퍼졌다. 페르디낭이 절뚝거리며 시체 더미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핏물 속에서 수차례 뒹군 탓에 그의 몰골은 시체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커먼 늪의 가장자리에 꿇어앉아 손톱으로 바닥을 긁고 있는 것은 아리아나였다.
“안 돼··· 안 돼······.”
심연은 처음 등장하였던 때와 마찬가지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확장이 아니라 한 점으로의 수축이 이번 회오리의 목적인 듯 보였다는 것이었다. 심연의 시커먼 아가리가 닫히는 순간 그 속에 밀어 넣었던 아리아나의 손끝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아리아나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굴렀다.
웨인은 심연이 자리했던 바닥 위를 가로질렀다. 그의 모습을 본 아리아나가 기겁을 하며 뒤로 기었다. 그녀는 바닥을 향해 팔을 내질렀으나 좀 전처럼 뚫고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물론 검은 마수가 바닥 위로 솟아오르는 일도 없었다. 마치 심연이 그녀의 능력을 앗아간 것처럼, 이제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 비참하게 달아났다.
“아악!”
몸을 일으키려던 아리아나의 무릎 뒤를 웨인의 지팡이칼이 긋고 지나갔다. 아리아나의 사지가 핏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무기를 찾으려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더듬던 그녀의 손에 들린 건 장죽이었다. 그녀는 피를 뒤집어 쓴 노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이 괴물아!”
아리아나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볼모는 그녀 자신이었다. 피 흐르는 두 손으로 움켜쥔 장죽의 끝으로 아리아나는 자신의 눈을 겨냥했다. 웨인이 손목을 베어 장죽을 떨어뜨렸다.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지팡이칼이 아리아나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목에 칼이 박힌 몸이 들썩였다.
서걱-
목 뒤를 관통한 칼날은 왼손으로, 손잡이는 오른손으로 각각 잡은 채로 웨인이 어깨를 뒤틀었다. 칼날이 횡으로 반 바퀴를 돌며 아리아나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덜 잘린 힘줄 때문에 목이 덜렁거렸다. 웨인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스타샤를 눈으로 좇았다.
스타샤의 발아래에서 서펜트가 좀 전에 그의 동료가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지도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서펜트의 주변에는 권총과 검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고, 그는 피 흐르는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웨인은 합장한 그 모양새가 어쩐지 구걸하는 걸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고소를 머금었다. 뱀처럼 주홍색으로 빛나던 눈에는 비굴한 기색이 서려 있었고, 맹금류를 연상시키던 냉혹한 얼굴에는 애절함마저 담겨 있었다. 그는 쉰 목소리로 최후의 항변을 펼쳤다.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다. 돌려 말하자면, 그대의 연인을 돌아오게 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건 우리밖에 없다는 거지.”
“문을 열 수 있는 게 너희뿐이라고?”
스타샤는 칼집에 칼을 밀어 넣었다. 뜻밖의 희망을 발견한 서펜트의 얼굴이 일순 말갛게 펴졌다가 스타샤의 다음 말에 다시 일그러졌다.
“방금 네 입으로 네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말한 거야, 병신아.”
그러나 스타샤는 섬광과 같이 칼을 뽑아드는 대신 최대한으로 응축되었던 용수철의 탄성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웨인은 그 이유를 알았다. 장치의 힘을 빌려 빠르게 긋는 칼은 깨끗한 절단과 그로 인한 빠른 죽음을 약속했다. 스타샤는 그런 죽음이 서펜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건 지나치게 자비로웠다.
스타샤는 칼집을 아예 옆으로 던져두고, 뽑아 든 칼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마치 도리깨로 곡식을 타작하듯 칼로 서펜트를 두드려 팼다. 수 년 동안 익혔던 검술은 모두 잊은 듯 투박한 몸짓이었다. 살점과 피가 연달아 솟구쳤고, 그럴 때마다 새어나오던 짧고 굵은 신음이 점차 희미해졌다.
“내가, 너희 같은, 개자식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굳은살 박인 양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칼을 휘두르던 그녀는 결국 제풀에 지쳐 관두었다. 목숨이 끊어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이름을 웨인이 나직이 불렀다.
“스테이시.”
스타샤는 손목을 주무르며 웨인을 돌아보았다. 웨인이 이어 물었다.
“턱수염은?”
스타샤는 턱수염이 누굴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페르디낭 랭데, 그 능글맞고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작자를 일컫는 것이리라. 스타샤는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며 답했다.
“저기 시체 뒤로 숨던······ 아, 젠장.”
제단 위에서 바라보니 좀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시체 더미 뒤의 깨진 창문이었다.
*
페르디낭은 옷깃을 찢어 입에 물고 걸음을 내디뎠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른다리를 관통한 총알은 무릎을 근소한 차이로 비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뒷목을 찔러대는 것은 별수 없었지만, 적어도 발목이 날아간 왼다리보다는 다리로서의 의무에 더 충실했다.
벽을 짚으며 나아가다가 피 묻은 손바닥이 자국을 남기는 것을 본 그는 서둘러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비척거리며 속도를 내는 와중에 그는 새로운 걸음걸이에 요령이 생긴 자신을 발견했다. 언젠가 본 일이 있는 경보(競步) 대회의 선수들이 하듯 따라 걸으면 고통이 견딜 만했던 것이다.
“무식한 사냥꾼 놈들···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한 일인데··· 그걸 그렇게······.”
성당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자, 페르디낭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혼잣말을 시작했다. 그렇게 소리 내어 토로하지 않으면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욱 분한 것은 베르자크의 행동이 상상도 못했던 가능성 따위가 결코 아니었단 사실이었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한 차례의 검토가 끝난 가능성이었다. 헤레틱스의 세 학자는 모두 그럴 리 없다고 단정 지었다. 마물로 가득할 것이 분명한 심연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질 이가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라는 당연한 추론 때문이었다.
“눈빛이 이미 맛이 가있었어. 빌어먹을 사냥개 놈··· 끝까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페르디낭은 곧 자신들이 검토에서 놓쳤던 사실 하나를 뒤늦게 깨달았다. 이븐 베르자크는 이미 한 차례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 전적이 있던 작자가 아니었나. 잔베르에서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성당에서 심연을 향해 내린 그의 선택은 어쩌면 너무 명백하고 천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미친놈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았겠느냔 말이야.”
페르디낭은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다가 흥분해서 커진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는 얼른 뒤를 돌아 따라오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신 나간 살인귀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 다음 일은 다음에 꾀해도 되리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가 택할 수도 있는 장밋빛 미래들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증식했다.
위상이 추락한 교회와 덩달아 활동이 위축된 게헤만 항마연구원의 학자 몇을 꼬드길 수도 있을 것이다. 헤레틱스의 유산을 조금만 공유해줘도 연구에 목말라 있던 그들은 페르디낭을 우상으로 떠받들 게 분명했다.
추위만 참을 수 있다면 베소니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궁벽한 마을에서 그 지방의 유지들과 좋은 관계만 형성한다면, 마음씨 좋은 시골 의사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하면 실험체들이 자진해서 기어들어오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멜레란데가 좋을지도 모르지. 거기 가면 서펜트가 예전에 말했던······.”
페르디낭은 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곤두섰던 뒷목의 털들이 숫제 튀어나갈 것처럼 팽팽히 당겨졌다. 페르디낭은 오한이 일어 한 차례 몸을 떨고, 골목을 막은 채 그의 앞에 서있는 여자를 보았다. 페르디낭은 벽을 짚고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저기, 저는, 그··· 어디 보자, 여기 주민인데······.”
여자의 몰골이 지나치게 지저분해서, 페르디낭은 그녀가 마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여자의 손에 들린 독특한 모양새의 무기를 본 페르디낭은 최악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사냥꾼이었다.
“사냥꾼들이 위험합니다! 어서 성당으로 가봐야 해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땍···!”
목을 움켜쥔 페르디낭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목울대를 관통한 볼트 때문에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벽을 짚고 버르적거렸다. 여자가 다가와 머리채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찔러서 의식이 고통스럽게 선명해졌다.
여자는 조금 전에는 쇠뇌로 기능했던 검을 짧게 쥐고 페르디낭의 목에 대었다. 톱을 켜듯이 날이 앞뒤로 왕복하며 페르디낭의 목을 파고들었다. 페르디낭이 왼팔을 들어 여자의 턱을 밀고 목을 할퀴며 저항했다. 여자가 무릎으로 페르디낭의 가랑이를 걷어차자 그의 몸이 고통으로 말려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리는 천천히, 그리고 부지런하게 몸을 떠나고 있었다.
이윽고 헤레틱스를 이끄는 삼두회의 마지막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 잃은 몸이 잠시간 꿈틀거리다 이내 영영 멎었다.
- 작가의말
종막은 5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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