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막 5장 - 빛을 향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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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도 않은 사람 장례를 치러요? 그런 얘길 하려고 여기까지 부른 거란 말이에요?”
스타샤는 자신이 가진 불만을 가장 불경하게 전달할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처럼 마르셀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다리를 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르셀은 자신을 향해 뿜어져 오는 담배 연기를 그대로 맞고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메이츠니르.”
그 다음에 올 말이 무엇일지는 스타샤도 알고 있었다. 호명에 응답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스타샤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딴청을 피웠다. 뻔뻔한 여름의 햇살 속에서 세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처럼 해맑았다. 마르셀이 스타샤의 주의와 경청을 포기하고 말했다.
“한 해가 지났어.”
“그래요? 그것밖에 안 됐나요? 난 당신 얼굴에 늘어난 주름만 보고 네댓 해는 지난 줄 알았죠.”
옆에 앉아있던 웨인이 헛기침으로 스타샤에게 주의를 주었다. 마르셀은 개의치 않고 웨인의 앞에 놓인 술잔을 채웠다. 양해를 구하는 몸짓이었던 듯, 술병을 내려놓은 마르셀이 엽궐련을 입에 물었다. 짙은 연기 뒤에서 그가 말했다.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어. 그건 자네도 알잖은가.”
이번에는 스타샤도 마르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현장에서 몸으로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군주들의 군주를 자처하던 노블 다이스가 사라진 뒤, 그 진공 속으로 쳐들어온 건 야심만만한 군주급 마물들이었다.
이들 군소 군주들은 노블 다이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통제력이 미약했고, 부족한 힘을 빠른 확장으로 채우려들었다. 그 결과는 질적으로 떨어지고 양적으로 넘쳐나는 마물들의 준동이었다. 사냥꾼들은 싸우느라 지치기보다도 다음 임무지로 옮겨 다니느라 지치는 형편이었다.
“그게 장례식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베르자크가 남긴 유산을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지원자들을 모아야 해. 애석하게도 지금 우린 일손이 부족해. 지난해에 훌륭한 사냥꾼들을 너무 많이 잃었어. 베르자크를 포함해서 말이지.”
“우린 이븐을 잃지 않았어요.”
스타샤의 지적을 반쯤 인정한다는 것처럼 마르셀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가로저었다.
“지금으로선 잃은 것과 진배없지. 아무튼, 메이츠니르, 자네와 칼리노브스카가 살아남아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거야. 자네들은 사냥단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지 않나.”
뒤에 덧붙인 말은 웨인을 의식한 탓이었다. 공격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타샤가 얼른 비꼬았다.
“그러고 보니 실비아도 요양으로 반년쯤 쉬었는데 용케 장례식을 안 치르고 잘 참으셨네요.”
“이러지 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나를 부디 안타까이 여겨주게. 상징성 있는 사건이 필요해. 일반의 관심을 모으고, 베르자크가 결단했던 희생의 의미를 설명할 기회가 있어야 한단 말일세. 이븐 베르자크라는 이름이 잔베르 탈환 때보다 사람들의 입에 더 많이 오르내려야 해. 성하께선 잔베르 교구의 이름을 바꾸는 것도 검토하고 계시네. 베르자키스나이센이 가장 유력한데, 내가 볼 땐 결국 그걸로 결정이 날 것 같아.”
풀이하자면 ‘베르자크의 희생’이었다. 교단의 계획에 대한 귀띔은 아마 스타샤를 달래려는 의도였던 듯싶었으나, 그녀가 떠올린 건 인신공양의 풍습이었다. 번제(燔祭)에는 실종과 같은 모호한 얘기보단 사망 같은 확실한 비극이 더욱 유용할 터였다. 마르셀은, 아니 교단은 있지도 않은 이븐의 시신을 태워 그 연기로 새로운 사냥꾼이자 다음 희생양을 모으려는 것이었다.
“노형 생각은 어떠십니까?”
마르셀이 웨인을 향해 스타샤를 대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삼가는 태도로, 또 조금은 겸연쩍게 물었다. 웨인은 손목을 움직여 술잔을 돌리다가 결심이 선 것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술을 삼킨 그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교단의 입장을 이해하오. 하지만 장례식을 치른다면 우린 그걸······.”
웨인의 청회색 눈동자가 마르셀을 매섭게 응시했다.
“수색 작업에 대한 종언으로 받아들이게 되오.”
부질없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는 수색 작업이었지만 중단할 수는 없었다. 마물들이 대거 출현한 곳에 사냥꾼을 급파해서 자세한 정황을 알아보도록 하는 데에는 범지역적인, 나아가 범국가적인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물론 사냥꾼들은 흔쾌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러나 작년 여름 이래로 문이 열린 징후가 다시 발견된 바는 없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약속드리겠습니다.”
증표처럼 마르셀이 다시 웨인의 잔을 채웠다. 웨인은 목을 젖혀 술잔을 비우고, 무엇인가를 선언하듯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내가 바스케즈 단장 당신을 믿는 한, 교단의 기획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소.”
웨인의 결정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있던 스타샤도 그의 다음 말을 들었을 때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웨인의 입가에 누군가를 닮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친구라면 지금의 상황을 짓궂은 농담쯤으로 여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살아있는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이라면, 분명 이븐의 비틀린 유머 감각을 충분히 자극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웨인은 스타샤가 발끈하지 않고 잠잠한 것을 동의로 간주하고 보다 상세한 일정을 물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치를 요량이오?”
“교황청에 얼마나 머무르실 예정이십니까?”
마르셀의 반문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고 웨인이 혀를 찼다.
“그렇게 빨리? 허, 우리가 뻗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따지고 보면 스타샤와 웨인은 가족도 무엇도 아니었다. 아마 교단은 사냥단장을 시켜 양해를 구하는 일을 대단한 아량을 베푸는 것으로, 그게 아니더라도 시혜쯤은 된다고 여겼을 터였다. 스타샤는 잇새로 쯧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금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마르셀이 조심스럽게 또 다른 주제를 꺼냈다.
“메이츠니르 자네가 권총을 갖고 있다던데.”
“내놓으라고요?”
“아냐, 그럴 리가 있나. 잠깐만 빌려주게.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니.”
“잔베르 교구에 얘기하는 게 빠르지 않겠어요? 거기 장인이 만들었을 텐데.”
“그렇잖아도 연락을 넣어봤는데, 그만뒀다더군. 그 총을 만든 장인 말일세. 원작자가 없으면 구태여 잔베르 교구에 일을 맡길 이유는 없지. 어차피 모양만 비슷하면 돼. 빈 관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제야 스타샤는 마르셀이 권총 얘기를 꺼낸 것이 장례식의 절차에 대한 언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권총이 담긴 관을 들고 옮기게 될 바보들이 측은해졌다가, 그 바보들 중 두 명이 이 방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쳤다. 웨인은 아직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 못한 듯 스타샤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스타샤는 도무지 그런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웨인에게 자신의 추측을 일러주는 대신 먼저 살길을 마련했다.
“난 어깨가 안 좋아요.”
*
이븐은 돌아오지 않았다. 교단 역사상 사냥꾼의 장례식으로는 가장 성대한 동시에 가장 지루한 의식이 거행되는 내내 이븐의 존재는 정말로 관 속의 권총이 대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조품이었으므로 이븐을 대변할 만한 건 그를 알았던 이들의 점차 희미해져 가는 기억뿐이었다.
반나절은, 능청스럽게 자신의 장례식에 참여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신들 모조리 속았노라고 벌떡 일어나 공표할지도 모른다는 사냥꾼 둘의 덧없는 희망이 사그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어쩔 수 없는 대로 내버려두기에 일 년이 충분한 것처럼.
“수색도 조금만 더 해보다가 그만두죠.”
스타샤가 어깨를 휘휘 돌리며 말했다. 웨인이 놀란 눈을 하고 스타샤 쪽을 돌아봤다. 스타샤는 추도사를 적은 쪽지를 잘게 찢어 아무렇게나 화단에 뿌렸다.
“다들 바빠 죽겠는데 덜 떨어진 자식을 계속 찾고 있을 순 없잖아요. 오늘 얼굴 보니까 너나없이 죽상이던데.”
“스테이시 자네만 괜찮다면, 마르셀한테도 내가 얘기해두지.”
“처음에는 도리였던 일이 집착으로 변하면 점점 더 위험한 일까지 벌이게 될 것 같아요. 아시죠, 무슨 말인지?”
웨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헤레틱스의 학자들을 죽인 결정을 번복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이븐의 결정을 뒤엎는 일이기도 했다. 스타샤는 전당의 지붕과 회랑으로 둘러쳐져 네모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뭐, 안 돌아오고 배기겠어요? 거기가 쥐뿔이나 좋은 곳이라고······.”
짐짓 쾌활한 어조로,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다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살아 돌아오는 일은 이미 한 번 해본 거 아녜요? 두 번짼데 더 잘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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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
짤막한 묘비명을 읽은 나이로드는 그보다 더 적절한 문구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슬며시 웃었다. 그는 돌연한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권총 한 자루가 담겨 있는 석관을 향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와 함께 일한 지 수 년이 되었는데도 자네의 신학적 견해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군.”
케넌이 지팡이를 짚고 한쪽 다리를 절면서 더디게 다가왔다. 석관에 대고 던진 말이 아니었던 듯, 나이로드가 몸을 돌려 케넌을 마주했다.
“어떤가, 자네는 이 난장판 속에서 신의 존재와 그 섭리를 발견할 수 있겠나?”
“그보다는 더 가깝고 작은 일에 집중하려 합니다.”
완곡한 듯 직설적인 케넌의 대꾸에 나이로드는 실없이 웃었다.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는 대답은, 뜬구름 잡는 얘긴 다른 사람 붙잡고 하라는 뜻으로도 들리는 탓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나이로드였으므로 케넌의 그런 반응은 그를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의인은 모두 죽었거나 죽을 예정이고, 대적을 해치웠더니 제방을 무너뜨린 셈이 되고 마는 이 가혹한 운명에서 난 우리 성직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늘 고민하네. 우리 말고 누가 또 그런 쓸데없는 고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겠나?”
자학적 농담으로 케넌을 향해 은근한 반격을 꾀한 나이로드는 전당의 석관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이야기가, 이건 모두 주께서 주신 시련이고 그걸 이겨낼 때 더욱 강인해질 수 있다는 식의 헛소리는 결코 아니란 사실은 알지. 그 대신에 나는 자네들을 보네. 의미를 찾을 수 있든 없든 계속해서 싸워 나가는 자네들을 말이야. 오늘도 본슈타트 교구에 새로운 사냥꾼이 부임했단 얘기를 들었네. 베른트는 베르자키스나이센 교구에서 잘 적응해 나가는 모양이고.”
자신의 작명 실력에 꽤 흐뭇해졌는지, 나이로드는 그 길고 멋없는 교구의 새로운 이름을 몇 번 더 입 속에서 되뇌어 보았다.
“나는 거기서 신성을 발견해. 꺾이지 않는 의지 말일세. 그렇게 해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정신에서 내가 섬기는 주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을 느끼네.”
진중한 이야기는 그쯤이면 충분히 했다는 것처럼, 나이로드의 얼굴 위로 다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이 꺾이지 않는 의지에 내가 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자네가? 감히 교황의 옥음에 토를 달려는 건 아니겠지?”
“저는 그걸······.”
케넌이 그답지 않게 말을 바로 잇지 않고 고민했다. 문을 통해 비스듬히 쏟아진 햇빛이 전당의 끝까지 길게 비췄다. 저물어가는 해의 누런 빛은 벽을 타고 꺾여 올라갔다. 석관들의 침묵이 몸을 무겁게 누르고, 마음속으로 난 흙길을 밟아 더욱 단단히 다졌다. 끝나지 않을 것이고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선(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종막 마침.
- 작가의말
내일,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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