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고
책을 덮고
뒤표지에 얹은 손 아래로 책이 품고 있는 온기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슬로언 드웬다이크 교수는 방금 덮은 책이 선사하는 여운을 잠시간 즐기고 있다가, 이번 재방문의 목적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찾은 오두막은 문으로 안과 밖을 단절한 듯이 떠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박한 창이 두 개, 거실과 부엌의 구분은 가상의 벽이 대신하고 있었고 방은 하나뿐이었다. 다행히도 벽난로는 훌륭해서, 슬로언은 책을 쓰며 지냈던 겨울을 용케 버텨낼 수 있었다. 무단 점거도 두 번째가 되니 무덤덤했다. 먼지 쌓인 침대에서 잠을 청할 때면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깨던 그는 이제 침구까지 챙겨 와서 풀어놓은 참이었다.
사실 베르자크 가문의 오두막을 다시 찾을 이유는 없었다. 어떤 사람에 대한 글을 쓰는 데에 그 사람의 생가를 찾아가는 일이 유용하다면, 그가 방문해야 할 곳은 그룬발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똥 무더기거나.”
스타니스와프 그룬발트 추기경의 탄생의 비밀을 규명해낸 슬로언은 덮었던 책을 펼쳐들고 해당하는 부분을 찾았다. 그는 작년에 자신이 그룬발트 추기경에 대해 썼던 부분을 다시금 읽고 실소를 머금었다. 그 부분을 고치지 않으면 치르게 될 막대한 벌금을 떠올린 그는 곧 웃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로언은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사람처럼 판결문과 서신들을 뒤적거리며,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었다. 출판사 대표인 제르비엘 박사가 보낸, 미안한 어투가 듬뿍 묻어나는 가운데 그래도 발행 정지는 막았으니 천만다행이라는 위로가 담긴 편지는 여러 번 읽어 접힌 부분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첫 방문과 목적이 사뭇 달랐지만, 그럼에도 베르자크의 오두막을 다시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이제 글을 쓰는 장소로 여기를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볼프스하펜 대학에 마련된 자신의 연구실 책상에 붙어있는 동안 한 자도 쓰지 못했던 슬로언은, 이 오두막에 들어서는 순간 깊은 물속에서 막 끌어올려진 것처럼 숨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예 이름을 바꿔 버리면 되지. 독자들에겐 양해를 구하는 거야.”
이 같은 편법으로 이 개월 뒤 다시 법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슬로언은 제법 기발한 묘책이라고 생각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룬발트의 가명으로 쓸 이름들을 고민하는 그의 이마를 창가로 불어온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따뜻하게 데워진 여름의 바람만 드문드문 날라다주던 창이 낯선 소리를 전해준 것은 그때였다.
슬로언은 삭아가는 오두막의 방문자로 떠올릴 수 있는 후보가 많지 않아서, 굳은 채로 문을 주시했다. 의식하지 못했던 풀벌레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귀를 때리고, 그 사이로 말소리가 들렸다. 방문자는 두 명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끊이고 털썩, 흙먼지 일어나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남자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왔을 때, 당황한 쪽은 오히려 슬로언이었다. 여자는 당황보다는 의혹을 담아 날카롭게 물었다.
“뭐야, 당신?”
슬로언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여자는 답을 찾아냈다. 그녀는 슬로언이 펼쳐들고 있는 책을 힐끗 보더니 칼의 손잡이를 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의자를 당겨 앉고 다리를 꼬았다.
“당신이 그 드웬다이큰가 뭔가 하는 사람이군, 그렇지?”
슬로언은 마치 그게 칼이라도 막아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두꺼운 책을 가슴팍에 대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어깨에서 자른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에 대해서 아주 멋대로 써뒀던데.”
슬로언은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여자는 그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아직 열려있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슬로언은 가슴이 방망이질 치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남자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자와 슬로언을 번갈아 살폈다가, 다시 슬로언을 뚫어지게 보았다. 불혹을 넘긴 얼굴엔 주름이 늘었고, 기억하던 것보다 살이 조금 붙어 서글서글해진 인상이었다. 남자의 얼굴 위로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야, 친구.”
슬로언의 손에서 책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 작가의말
그간 『심연의 사냥꾼들』을 읽어 주시고, 또 아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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