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표현과 생각 사이의 심연을 이어보려는 노력 탓이다. 딱 맞는 단어, 유일한 단어가 멀리 안개 속 건너편 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미칠 듯한 기분, 심연의 이쪽 편에서 여전히 벌거벗은 생각이 그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다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
안녕하세요. 이단영입니다. 뒤늦게 후기를 올리는 것은 제가 쓴 글과 심정적인 거리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완결을 낸 직후 후기를 썼다면 소설의 모든 부분들에 대해 설명하려드는 길고 지루한 글을 내놓고 말 게 분명했으니까요. 거기다가 글을 끝마친 다음의 기분이란, 침대에 누워 하루를 반추하는 때와 유사해서 행위 당시에는 단서조차 없었던 더 나은 선택지가 여느 때보다도 명백하게 떠오르는 탓에 자기혐오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런 식의 후기만큼은 올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쓰는 일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심연의 사냥꾼들』은 아주 오랜 기간 “벌거벗은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어디서 본 것만 같은, 그러나 동시에 아주 고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중학생, 고등학생 시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연의 사냥꾼들』도 바로 그런 시기에 탄생한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늑대인간에 의해 점령당한 도시로 들어가 그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마침내 자신 또한 감염되고 만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교단 소속의 사냥꾼이 되어 활약한다는 소설의 얼개는 이 시기에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고생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인 탓에 제대로 된 서사는커녕 간략한 시놉시스마저 결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이런 설정 놀음이 으레 그렇듯, 이에 대한 흥미가 빠르게 식는 즉시 기억의 뒤안길로 밀려났던 것입니다.
오래 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게 된 데에 별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쩐지 본격적인 장편을 쓸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위기감이 불현듯 도래했고, 그래 몇 자 적어 친구들에게 보여준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문피아 공모전은 제 글을 처음 읽어준 친구 덕택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심연의 사냥꾼들』의 연재는 이 친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여하간 가입하려고 보니 만들어둔 아이디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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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 건, 글을 쓰는 것과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괴기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단편들을, 습작이나마 써오던 제게 후자는 조금도 익숙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빚어낸 세계가 사산되지 않도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손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동시에 통제 불능의 괴물처럼 이야기가 내 손을 속절없이 벗어난다는 사실이 서로 맞부딪고, 마침내 내게서 태어난 세계가 내 밖에서 존재하게 되는 경이를 글 쓰는 사람으로서 느낄 때 문득,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독자의 존재로 글이 완성된다는 사실이요.
독자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이븐 베르자크의 이야기는 끝맺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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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심연의 사냥꾼들』은 반전과 전투 묘사와 같이, 말초적 자극에 주안을 둔 흥미 본위의 소설로 구상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고찰을 빙자한 무거운 주제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아마 그런 유의 이야기가 제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때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쓰다 보니 밑천이 드러난 때문일 겁니다. 인물들이 후반부에서 교훈을 주려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지금 보면 무척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운명에 대한 긍정’이라는 마지막 주제는 필요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손을 떠난 이야기지만 그래도 조금 고집을 부려보자면, 저는 『심연의 사냥꾼들』이 극복의 이야기로 읽히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불굴의 의지를 갖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서는 인물들이 거의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뤼시앵의 말대로, 극복하려들면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죠. 이븐도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늑대인간들이 들끓는 잔베르를 향해 걸어갈 때, 이븐은 의지로 충만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서 이븐은 지울 수 없는 저주를 몸에 새기게 되고 맙니다.
오베르지엔에서 이븐의 마지막 선택은 모든 비극과,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자신의 몸에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내재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운명, 위대함, 초인 같은 니체의 표현들은 웅변성이 짙어 오해를 사기 좋지만, 제가 파악하는 의미는 훨씬 더 소박한 것입니다; 자신을 마주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는 것. 어쩌면 그건 두려움과 함께 싸우라는 웨인의 말대로 자신의 나약함을 긍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스타샤가 택한 방식과 같이 딛고 선 자리 위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버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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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면서 니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상가, 작가, 문인 들의 텍스트를 빌려 왔습니다(이렇게 빌려온 텍스트들은 모두 인용 표기를 통해 출처를 밝혔습니다). 글의 질적 풍부함에 기여하기를 바랐지만, 지적 허세로 보이지는 않았을지 염려됩니다. 종막의 마지막 두 장의 제목은 워낙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들이어서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각각 Avantasia의 〈The Final Sacrifice〉와 〈Reach Out for The Light〉에서 따온 것입니다.
『심연의 사냥꾼들』은 끝났지만, 마물 사냥꾼들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대로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다른 국가, 배경에서 사냥꾼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 생각 중입니다. 다만 사냥꾼들의 이야기는 『심연의 사냥꾼들』을 쓰면서 끊임없이 퍼 올린 탓에 메말라 버린 우물 꼴이어서, 다시금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 성싶습니다.
사냥꾼들에 대한 것이 아닌, 다음 글로 구상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지만, 언제 쓰게 될지는 아직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금 공모전에 도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테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을 듯하고, 글을 쓰기에 앞서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어 아마 빠른 시일 내로 새로운 글을 연재하는 일은 불가능할 듯싶습니다. 일단 올해 안에 연재를 시작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구상하고 있는 글은 포스트아포칼립스, 하드보일드, 중세(?) 판타지를 적절히 혼합한, 사실 저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물건입니다. 요컨대 멸망한 문명의 잔해들, 이를테면 자동차 문짝 따위로 엮은 갑옷을 입은 채, 철근을 두드려 펴 만든 칼을 들고 싸우는 기사와 도적 들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사실 『심연의 사냥꾼들』을 쓰면서 잔인한 묘사나 끔찍한 장면들을 쓰는 데에 주저한 부분들이 있어서, 스스로도 마음에 차지 않아 만약 차기작을 쓴다면 이른바 블러드-폰(Blood-porn)을 쓰겠노라 다짐한 바 있습니다. 아마 다음 글은 그런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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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옮기고 보니 정말 별 것 아니라는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 후기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머릿속에 있을 때 『심연의 사냥꾼들』은 훨씬 더 웅장하고, 치열하면서도 처절하고, 또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트북 앞에 붙어 앉아 글로 옮기니, 친자식임을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습니다.
애초에 심연의 건너편에 있는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찾으려는 여정에 나서지 않고, 차라리 벌거벗은 생각인 채로 내버려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단 후회도 했고요. 그러나 제가 잘하는 대로 철학자를 흉내 내 말하자면, 아무리 생생한 사유도 가장 둔한 감각보다는 덜 생생하니, 설정이 얼마나 탁월하고 세계관이 얼마나 훌륭하든, 글이 되어 세상에 나와야만 획득할 수 있는 가치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상상에 머무르지 않고 글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독자 여러분들도 계시고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영상 매체가 이토록이나 발전한 시대에 여전히 활자로 된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거기다 그 수가 실은 굉장히 많다는 사실은 제게 언제나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쓴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거의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여러분에게, 그리고 제게 계속 남아있는 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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