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에게 사명을 받았다(1)
“크레이터 한 중간에서 그걸 발견했을 땐 다들 눈을 의심했어요. 양동이라니. 하늘에서 날아온 그 끔찍한 질량병기가 양동이라니. 처음엔 무슨 농담인가 했었다니까요.”
그 점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다. 아니. 진짜로 동감이라니까. 양동이가 뭐야. 양동이가. 크레이터 한 중간에 양동이가 아니라 폼나게 검이나 창이 딱! 꽂혀있었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멋진 장면이냐고. 응? 양동이라니. 누구 발상인지 정말 때려주고 싶다니까?
“그리고 그걸 옮기려고 했을 때 우린 두 번째로 놀랐죠. 양동이주제에 아무도 그걸 들어 올리지 못했으니까요. 그 상순영감조차도 꿈쩍,하고 살짝 들썩이게 만든 게 전부였으니 말 다했죠. 그래서 그렇게 한 5분 가까이 손도 못쓰고 손가락만 빨고 있자니... 자존심 어쩌고 하면서 양동이를 붙들고 똥을 싸던 상순이영감이 갑자기...”
“...잠깐만요. 나 방금 무지무지하게 끔찍한 상상이 머리에 떠올랐는데... 방금 그 ‘양동이를 붙잡고 똥을 싸던 상순이 영감’이란 그 표현... 그거, 똥을 쌀 만큼 열심히 들어 올렸다는 의미죠? 설마 그... 양동이에다가 진짜 그걸 눴다는 의미는 아닌 거 맞죠?”
펠은 내 질문의 의미를 생각하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당연히 열심히 들어 올렸단 소리죠... 그게 무슨...”
“아냐, 선배. 나도 방금 오라버니랑 같은 생각을 했어. 그것도 그럴게 등장인물이 상순이 영감이잖아? 게다가 소품이 양동이잖아? 그 뭔가를 담아야 할 것 같은 양동이랑 상순이 영감이 똥을 싼다는 표현이 딱 만났는데, 선배는 무슨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
“어머... 부정할 수가 없네.”
그래. 바로 그거다. 그 이상하게 텐션 높은 드워프 영감. 칠공으로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인사랍시고 등짝스매시를 날릴 수 있는 그 정신 나간 철부지 마초영감. 한번 떠올려봐라.
-하하하! 이거, 양동이 하나를 못 들다니! 이 삼순이 자존심이 오늘 제대로 구기는구만! 이몸이 이렇게 그냥 물러설 순 없지! 자아! 이거라도 먹어라! 분노의 X이다!! 우하하하하핫!
젠장! 있을 법 하다못해 너무 어울리는 장면이잖아! 그 영감이란 존재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었으면 티저 예고편에 꼭 넣어야 할 것 같은 장면이다. 2~3분 남짓한 만남이 전부이건만 이렇게 강렬한 첫 인상을 내 뇌리에 박아 넣다니. 놀랍다! 상순영감!
칼라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영감... 오늘 아침에 나한테 ‘와하하하.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반갑구만! 음!’ 이란 인사를 토씨한번 안 틀리고 한 시간 동안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니까? 첨엔 그냥 저 철부지 영감이 반가워서 그러나 보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도 그럴게 359살이라고? 드워프 평균수명을 100살이나 넘겼다니까? 그냥 몸뚱아리만 단단하다고 안심할 게 아니라니까?”
펠이 으음...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나도 솔직히 그 영감, 밥 시간도 아닌데 식당 식권기계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수십 분씩 기계버튼 딸깍딸깍 거리고 있으면 좀 섬뜩하더라... 이거, 진짜 그런 거면 어쩌지?”
“...작년쯤인가 영감님한테 선라컴퍼니에서 스카웃 요청 한번 오지 않았어?”
“그랬지. 조건도 꽤나 좋았었어. 안에 든 내용물이 이상해서 그렇지, 겉만 보면 고기ㅂ...가 아니라 탱커로서 상당히 우수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최대한 ...고 있다가... 진짜 그렇게 되면...”
“흠흠. 멀쩡한 척... ...해서 ...란 식으로 비싸게 팔자?”
“음. 뭐, 그렇지.”
“음. 좋네. 나쁘지 않아...”
난 둘의 대화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엘프의 거죽을 쓴 악마들은?
내 시선을 느낀 걸까. 둘의 고개가 동시에 이쪽을 향한다. 칼라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에이. 농담이에요. 오라버니.”
“어머, 손님 생각도 않고,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농담을 주고받아버렸네. 그렇지? 칼라?”
“네. 물론이에요. 선배. 오라버니... 설마 진담이라고 생각하진 않으셨겠죠? 우린 선량함과 온화함으로 똘똘 뭉친 낙스엘프랍니다?”
“...어디서부터가 농담인데?”
꽃이 만개하는 듯한 미소와 함께 둘에게서 동시에 대답이 돌아왔다.
““‘에이, 농담이에요’부터?””
“거의 다 진담이잖아!!! 하루에 같은 태클 두 번 걸게 하지 마!!! 이 똑같은 것들아!!! 지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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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표현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해요. 똥을 쌌다는 표현은 양동이에 매달려 열심히 들어 올렸다는 의미에요.”
“네에. 압니다.”
난 반쯤 탈력상태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태클은 의외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한다는 걸.
“여튼 그렇게 5분쯤 지나자 끙끙거리면서 양동이에 매달려있던 상순이 영감이 갑자기 발라당 뒤집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가보니 그 무겁던 양동이가 그냥 평범한 양동이로 되돌아와 있더란 말이지요?”
“그래서요?”
“...질량변환이죠?”
“...글쎄요.”
음. 대충 눈치 챈 것 같은데, 양동이의 힘에 대해서 어느 정돈 설명을 해 둬야 하나...? 한다고 하면 어디까지?
현재 이 양동이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다. 굳이 따지면 하나가 더 있긴 하지만, 그건 이 양동이처럼 노페널티로 편하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무기에 대한 정보를 과연 얼마나 공개해야 할까? 방금 까지 농담 따먹기(?)를 하면서 놀던 상대라 해도 그게 이 여자가 믿을만한 존재라는 증거는 아니다. 난 이 펠이라는 이 아름다운 녹색머리의 엘프를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지?
내가 갈등에 빠져있자 펠이 살살 구슬리듯 다시 말을 이었다.
“에이. 우리사이잖아요. 말 해봐요. 당신, 질량변환을 할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직업 패시브? 마법으로도 8서클은 되어야 구현할 수 있는 건데, 그걸 정말 개인적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요? 그리고 그렇게 변환한 물체를 좌표지정까지 해 가며 맘대로 하늘에서 떨어트릴 수 있다고요? 무슨 직업의 무슨 스킬을 어떻게 써야 그런 게 가능하죠?”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라고 태클을 걸고 넘어져야 할 타이밍이지만 지금 그건 넘어가자.
왜냐하면 방금 그녀로부터 더 중요한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방금 분명히 질량변환이 가능한 스킬이나 패시브를 갖고 있냐고 물었다. 질량변환이라는 게 내가 가진 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거다.
즉, ‘아까의 그 양동이 뭐에요’라는 건 ‘그 물양동이 무슨 신비한 능력이 담겨있어요?’가 아니라 ‘당신, 아까 그 양동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에요?’란 말인데.
흐음... 그렇다는 건 그녀는 그 양동이로부터 뭔가를 알아내긴 커녕 뭔가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유카 왈, 천사 중에서도 천족(1~6위계)만이 쓰는 법술과 사람이 쓰는 다른 영능들은 그 랭크차가 굉장히 크다고 했었다. 조사수단이라곤 과학이랑 마법이란 영능뿐인 콜레가에서 법술과 같은 초고위영능의 인챈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혹시 저 의식 없는 동안 제 개인 스테이터스 확인 안 해봤어요? 직업이라든지. 스텟이라든지요.”
“아, 그거라면 선배가 자기는 레벨밖엔 못 봐서 아쉽다고... 길드에 조만간 그런 정보분석능력자를 영입해야겠다고 했...읍!”
펠이 칼라의 입을 막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얘는 한 번씩 이렇게 흰 소리를... 남의 세세한 정보를 동의 없이 들여다보는 건 엄연한 불법이에요. 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아, 그렇습니까.”
뭐, 됐다. 안 했든 못했든 일단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니까.
후후후.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설명해 주지. 1000년의 수련을 거친 스토리 텔러의 힘을 보여주마.
-거짓은 진실 가운데.
“후우... 거기까지 알아보셨다니 어쩔 수 없군요. 좋습니다. 칼라에겐 기억상실이라고 밀어붙였지만, 여기까지 온 것,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오오...”
펠과 칼라의 눈이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그래. 우수에 찬 눈빛의 신비한 능력을 가진 초절미중년의 비밀 이야기라니. 호기심이 동할 것이다.
그래. 관객이 원한다면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꾼의 역할.
“저는...”
“저는?”
“얼마 전에...”
“얼마 전에?”
“양동이의 신을 만났습니다.”
““......””
“그분은 이름을 유메라고 밝히시면서 자신은 온 우주의 양동이라는 개념을 다스리는 개념신이라고 하셨지요.”
““......””
“그리곤 제게 ‘양동이의 영광(glory of bucket)’라는 이름의 신물(양동이) 내리신 후 양동이의 사도로서 이 지구에서 활약하라는 사명을 내리셨습니다.”
““......””
펠이 칼라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 사람, 혹시 생긴 건 멀끔한데 의외로 삼순영감이랑 같은 과인가?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우리보다 나이도 많다면서?”
“...우리 오라버니가 그럴 리 없어요."
"하지만 말 하는 거 봐. 양동이의 신이래잖아. 제정신으론 저런 소리 못한다니까?"
"으음, 일단... 두들겨서 고쳐보죠. 오라버니, 아파도 조금 참아주세요. 고장난 물건을 때리거나 흔들어서 고치는 건 의외로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하더라고요?"
“아... 음. 둘 다 일단 주먹 풀고. 조금만 더 들어보심이...”
아, 참고로 저 유메라는 이름은 유카와 누님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와서 붙인 거다. 좋은 이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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