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요괴(2)
“여우요괴가 먹을 걸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 놈이 하는 말을 들었느냐! 여우들이 하도 먹어 가세가 기울 정도라니!”
의뢰인과의 대화를 마친 이화는 여우요괴들이 사는 곳으로 걸어가며 씩씩거렸다.
“여우가 많이 먹어 가세가 기운다면 그 놈이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이 찌는 동안 이 집구석은 이미 멸망했을 것이니라! 못된 것 같으니라구!”
“그 놈이 너무한 건 알겠는데 너무 열 내는거 아니야?”
“그런 놈이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것은 필시 그 아이들이 열심히 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이니라! 헌데 그런 은혜는 모르고 그리 욕을 하다니!”
이화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그 놈은 여우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내 당장 그 아이들을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것이야!”
정회는 ‘그게 원래 우리 계약 아니었냐?’라고 묻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정회는 눈 앞의 전각으로 눈을 돌렸다. 새로 지은 전각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휘황찬란하기는 하다.
이 정도로 돈을 발랐으면 열 받을 만하지. 써보지도 못하고 여우 요괴들에게 뺏긴 것 아닌가?
두 사람은 터벅터벅 전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정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음? 이 기분은···.”
“진법이니라. 호오··· 나쁘지는 않구나.”
“무슨 진인데?”
“이것저것 섞여 있느니라. 딱히 위험한 것은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위해를 가하기보다는 겁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진법이다. 밖은 해가 쨍쨍한데 전각 안은 음침하고 어두운 것도 진법의 영향이었다. 묘하게 어두컴컴한 안개까지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화와 정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웅웅거리는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녀석들은 누구냐!
[호호호, 겁을 줘서 쫓아내려는 모양이로구나. 귀엽기도 하지.]
이화가 전음으로 말했다. 정회가 쳐다보자 이화가 장난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디 우리 귀여운 후배님들의 재롱을 조금 구경해 볼까?]
“야, 야! 뭐하려고?”
이화는 황급히 속삭이는 정회를 무시하고 말했다.
[조금 장난을 치는 것뿐이다. 잠자코 있거라.]
“너희들이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여우 요괴들이냐?”
- 해, 행패?
- 우린 행패 안 부렸다!
- 맞다! 우린 착하다!
이화의 말에 당황한 여우들은 목소리를 변조하는 것도 잊고 빽빽거렸다. 이화는 그것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다.
‘꼬리 넷 이상 달린 녀석은 없는 모양이로구나.’
꼬리 셋 이하의 여우요괴들은 아직 성품이 어린아이와 같다. 꼬리가 넷만 됐어도 살짝 찔렀다고 저리 호들갑을 떨지는 않으리라.
어쩄거나 그녀는 장난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허나 주인 말로는 너희가 가세가 기울 정도로 음식을 축낸다 하더구나.”
- 거짓말이다!
- 우린 그렇게 많이 안 먹는데!
- 우리 조금 밖에 안 먹는데! 진짜 조금만 먹는데!
“허면 내려와서 해명해 보겠느냐?”
- 그건 싫다!
- 너희 칼 가지고 있는 거 다 보인다!
-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흠, 아무래도 저 아이들을 속여서 해하려 한 자들이 있던 모양이로구나.’
이화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어린 것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리 흉악한 수를 쓴다는 말인가? 정회를 쳐다보니 그도 표정이 찜찜한 것 같았다.
“너희가 내려오지 않겠다면 내가 올라갈 수밖에 없겠구나.”
- 싫다! 나가라!
- 여긴 우리 집이다!
- 우린 안 나간다!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보거라.”
이화는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정회가 황급히 따라붙자 이화가 전음을 보냈다.
[내게서 떨어지지 말거라.]
우거지상이 된 정회는 이화에게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매서운 돌개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호오, 호풍의 술이로구나.”
사람 정도는 가볍게 날려버릴 법한 돌풍이었지만 이화는 손가락을 하나 드는 것만으로 그것을 간단하게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온갖 술법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이화는 갑자기 덩굴 같은 것이 자라나 그들의 발을 휘감으려 들기도 하던, 바닥이 흐물거리며 그들을 빨아들이려 하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침없이 여우요괴들의 술법을 깨부쉈다.
정회가 속으로 침을 삼켰다.
‘이게 구미호의 힘인가?’
정회 자신이었다면 고생 깨나 했을 법했는데 이화는 발걸음조차 느려지지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그들이 서 있던 풍경이 기괴하게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귀여운 환영진이로구나.”
대견하다는 듯 미소지은 이화는 한 걸음 더 내딛는 것만으로 환영진을 파괴했다.
*
“으앙! 다 부숴졌어!”
마지막 진법까지 허망하게 부숴지자 여우요괴 중 하나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지금까지 찾아온 인간 놈들은 진법을 부수기는커녕 통과조차 못 했는데!
침입자들은 이제 거의 다 올라왔다. 벌써 두 사람이 뚜벅뚜벅 걸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겁먹은 여우 요괴들은 셋 모두 모여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곧 이화와 정회가 문을 열고 여우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여우요괴들을 본 이화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더는 준비한 것이 없느냐?”
“어, 없다···.”
여우 중 하나가 덜덜 떨면서 대답하자 이화가 말했다.
“흠, 이 정도면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구나. 많이들 공부한 모양이지?”
“우, 우, 우리 공부 열심히 했다!”
“공덕도 열심히 쌓았다!”
“너 너무 세다!”
세 여우 요괴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찰떡같이 대답했다. 이화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녀는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소리쳤다.
“요 귀여운 녀석들! 이리로 오거라!”
“시, 싫다!”
“안 갈 거야!”
“우리 때릴 거잖아!”
여우 요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화는 여우요괴들을 한 순간에 무장해제 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 녀석들, 이래도 오지 않을 것이냐?”
이화의 등 뒤에서 아홉 개의 꼬리가 솟아났다. 희고 아름다운 아홉 개의 꼬리를 본 여우요괴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 헉! 꼬리 아홉 개!
- 구미호님이다!
- 선배님!
빨빨거리며 달려온 여우요괴들은 이화에 다리에 매달려 미친듯이 꼬리를 흔들어 댔다. 여우요괴들이 이화의 손을 정신없이 핥으며 소리질렀다.
- 꼬리 너무 멋져요!
- 저도 쓰다듬어 주세요!
- 도력이 넘나 깊은 것!
“호호, 이 녀석들아. 너무 보채지 말거라.”
이화는 맑게 웃으며 여우 요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회는 꽤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
여우들은 이화와 정회를 말 그대로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지금까지 꿍쳐두었던 말린 과일이나 과자, 그리고 제일 좋은 술을 있는대로 꺼내다가 늘어놓았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과를 즐기는 동안 여우들은 이화의 꼬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구미호의 꼬리에서 영험한 기운을 받고 싶다는 것 같았다. 헤롱헤롱거리는 것을 보니 단순히 감촉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시간을 보냈다 싶었던 이화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희들을 이곳에서 내보내기 위함이니라.”
“네?”
뒹굴거리던 여우요괴들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이곳의 주인이 너희를 원치 않더구나.”
“그 인간은 멍청해서 그래요!”
“맞아요! 우리 치성 엄청 열심히 드렸어요! 진짜 열심히 드렸는데?”
“먹을 것도 조금 밖에 안 먹었는데?”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있는 존재를 왜 쫓아낸다는 말인가? 여우 요괴들이 이해가 안돼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화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맞다. 그 자는 옹졸하고 탐욕스럽지. 그래서 너희를 쫓아내려 하는 것이다.”
“맞아요! 엄청 주인 인간 엄청 치사해요!”
“덕이라고는 벼룩만큼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필요한데! 우리 나가면 쫄딱 망할 거에요!”
“그래서 나가라는 것이다. 그 자는 너희가 빌어주는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
이화가 천천히 설명했다.
“복을 빌어주는 것은 공덕이 되는 일이지만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있고 없는 자가 있는 법이니라. 자격 없는 자를 위해 복을 빌어줘 봐야 고생만 진탕하고 공덕은 얼마 쌓이지 않는 단다. 그리고 고마워 하지도 않고.”
“고, 공덕이 얼마 안 쌓여요?”
“우리가 맛있는 거 달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래서 밥도 조금 밖에 안 먹고 있었는데?”
“물론 너희가 좋은 집을 차지하고 맛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너희의 공덕을 깎아먹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얼마되지 않는단다.”
구미호인 이화는 여우요괴들이 공덕을 잘 쌓을 수 있는 방법을 통달한 존재였다. 그녀는 공덕을 잘 쌓을 수 있는 방법과 공덕을 쌓으려면 피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여우요괴들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다. 여우들은 이보다 더 집중할 수 없는 상태로 이화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그 동안 정회는 홀로 먹을 것이나 축내고 있었다.
잠시 후, 긴 설명을 마친 이화가 말했다.
“허니 공덕을 잘 쌓고 싶으면 이런 부잣집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로 가거라.”
달달한 것이라고는 술지게미 정도가 전부겠다만, 하고 이화는 웃었다.
“네!”
“그런데 정말 여길 떠나도 되나요?”
“저희 나가면 이 집 망할 텐데?”
여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화가 싸늘하게 말했다.
“받은 복을 하찮게 여기는 자는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
“그럼 나갈 게요!”
“이사 가야지!”
*
정회 일행이 여우 요괴들과 함께 전각에서 나오자 의뢰인은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그들 앞에 굴러왔다.
“아이고! 드디어 해결해 주셨군요! 역시 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릅니다!”
정회와 이화가 전각에 들어갈 때만해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지 의심하던 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태세전환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요 놈들 때문에 그 동안 얼마나 속을 썩혔던지······!”
그는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이화를 쳐다보았지만 이화는 그의 눈도 안 마주치고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의뢰인이 떨떠름해하자 정회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뭐, 별거 아닙니다. 아무튼 이제 이 집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겁니다.”
더러워서 너한테는 복 줄 일 없을 것이라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지만 주인장은 감사하다며 굽실거릴 따름이었다. 그러자 여우 요괴들이 쫄래쫄래 걸어와서 주인장에게 말했다.
“주인 인간! 너는 덕을 많이 쌓아야 해!”
“계속 그렇게 살면 쫄딱 망하고 말거야!”
“이제 우리도 없으니까 조심해! 진짜 망할거야!”
여우요괴들은 나름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남이 듣기에는 영락없이 악담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인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정회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 좋게좋게 마무리합시다. 이 녀석들 여기서 또 화내면 골치 아파요.”
정회가 속삭이자 주인장은 재빨리 화를 다스렸다. 그러고보면 이 세 여우요괴는 술법사와 무림인들을 줄줄이 박살낸 요괴들이다. 긁어 부스럼 만들어봐야 자기만 손해였다.
“대협 말씀이 옳습니다, 옳아요! 자, 여기 사례금입니다. 제발 저 녀석들 좀 제 집에서 치워 주실 수 있으실런지···.”
“그게 저희 할 일 아닙니까? 얼른 나가겠습니다.”
묵직한 돈의 무게를 느낀 정회는 희희낙락하며 집 밖으로 나섰다. 그들이 대문에서 한 걸음 나가기가 무섭게 ‘쾅!’소리를 내며 대문이 닫혔다.
이화와 정회는 몹시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대문을 한 번 노려본 후 고개를 돌렸다. 여우요괴들이 말했다.
“그럼 이화 님, 저희는 이만 가볼 게요!”
“또 봐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도 반가웠다. 잘 가거라. 공덕 열심히 쌓고.”
“네!”
여우요괴들이 꼬리를 흔들며 넙죽 절하자 이화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사를 마친 여우요괴들은 건물들의 담장을 깡총깡총 뛰어넘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던 정회가 말했다.
“귀엽네.”
“여우들은 본래 귀여우니라.”
정회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이화는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여우들이 귀엽고 예쁜 것은 사실이 아니냐?”
“어··· 뭐 그렇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자는 무엇이냐! 명백한 사실이거늘!”
이화는 캬악하고 소리질렀다.
*
장안에서 골칫거리로 여기던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대단한 술법사가 나타났다더라. 그런 소문은 칠일이 되기도 전에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정회와 이화가 원하던 대로였다.
- 작가의말
송구하게도 연재시간은 그냥 자유롭게 전환하도록 하겠습니다 ㅠㅠㅠ
지키지도 못할 연재시간 걸어두느니 차라리 그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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