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라’
영어든 불어든 일어든 외국어를 배워보라. 새로운 언어의 낭만과 경이감이 평소에 생각하지 못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자극할 것이다.
-김완수-
부술 듯이, 아니 실제로 거의 부서졌다고 봐도 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옥상 출입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는 기대했던 사람이 아니라 실망감이 앞섰다.
“너 꽤 빠르게 달리잖냐.”
숨을 헐떡이느라 대답을 하지 않던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는 손짓인가.
“누구야 넌? 카야가 보낸 사람?”
호흡이 안정되면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아직 학생으로 보였다.
“...안심해도 돼. 어차피 뛰어내릴 용기도 없었어.”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렵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성은 그대로 옥상의 바닥에 앉아버렸다. 입고 있던 정장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다리까지 쭉 핀 상태로 고개를 들어 하늘만 쳐다보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최근에 여동생분이 다녀가셨어요.”
“뭐라고 하던데?”
말하고 있는 상대방은 나였지만, 여전히 하늘을 응시했다.
“애인 분의..”
목의 어딘가에서 말이 막혀버렸다. 누구보다 힘든 상황에 쳐했을 그에게 ‘죽은 애인의 환영을 본다고 하시던데요.’라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죽었어. 얼마 전에. 그것도 둘이 여행 갔다가 강도에게 당해서 말이야.”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나에게도 권하려는 듯 손을 내미려 하다 다시 거두었다.
“내가 사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말이야. 원래 같았으면 강도 따위는 때려눕히고도 남았을 텐데.. 우습네.”
허탈하게 연기를 내뿜는 그는 너무도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사고를 당한 일, 죽은 애인과 행복했던 기억 등.
“하늘이 푸른 게 무슨 바다 같네.”
그대로 담배를 몇 대 더 태운 그는 바지를 털고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쳤다.
“너, 이름은?”
“아츠시. 사가네 아츠시에요.”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몇 번 읊던 그는 곧 나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어, 사가네 군.”
손을 흔들며 너덜너덜해진 문을 옆으로 치우고 가벼운 걸음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 문득 시야에 들어온 것은 너덜너덜해진 문.
너무 급하게 여느라 그만 부숴버린 걸까.
그 후로 제대로 끼워지지 않는 문을 어중간하게 세워두고 자리를 피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엔 급하게 산책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사람들과 노아가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선명했다.
“그 사람은?”
카야가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사해요. 뛰어내릴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어요.”
그제야 긴장이 풀려 소파에 쓰러지듯 앉은 카야가 숨을 돌렸다. 친구의 자살예고를 받고 소식을 기다리는동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까.
“그래도...큰 일 나기 전에 막아서 다행이야...”
만약 내게 신어의 힘이 없었다면 그가 뛰어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빌딩이라고 해도 대로변으로 나가 길을 건너 엘리베이터에 도착하는 데에만 10분은 걸렸을 텐데, 정작 시간은 3분도 지나지 않았다.
때맞춰 바뀐 신호와 왠일로 1층에 정지해있던 엘리베이터, 이 모든 것이 그를 구하겠다는 신어가 발현되어 생긴 일인가.
‘주기적으로 감시라도 해야겠네.’
“그러게요...다행히 이 근처에서 살고 있는 것 같으니.”
‘허튼 짓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그런데 카야, 너는 시간이 안 되지 않나?’
에다 씨는 카야 소장을 ‘카야’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제가 해봐도 될까요?”
뜬금없는 나의 발언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늘 직접적으로 만나기도 했고, 아 그리고 이것도 주셨어요.”
그가 건넸던 명함을 꺼내었다. 빳빳한 종이의 상단엔 유명한 스포츠용품 회사의 로고가 박혀있고 그 밑으론 그의 직급과 이름이 굵은 글씨로 인쇄되어있었다.
‘영업부 주임 토라마 카이토’
부가적으로 적혀있는 것은 그의 전화번호와 팩스 번호 등, 연락할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
“뭐..너만 괜찮다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이건...상황이 엇나가면 많이 힘들어질 텐데 괜찮겠어?”
만약, 정말 만약 그에게 자살할 마음이 다시 생기고 내가 막지 못한다면.
“감시라기 보다는 만나면서 얘기도 들어주고 하면....사실 자신은 없지만 상담을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순간은 어디에서 나오는 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저 자신이 있었다.
“그럼 약속 하나만 하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죄책감을 갖지 않기’로.”
“네. 약속할게요.”
자심감이 있었지만 약속에 대한 대답은 약간의 공백을 가진 뒤에 튀어나왔다.
‘부담갖지마. 원래 생명에 관한 일은 어떻게 될 지 몰라서 짚고 넘어가는 거야.’
에다 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그녀도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카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의 것은 분명 믿음을 주려는 행위일 것이다.
그 뒤로 상담이 이뤄지기 위해 시간 약속을 잡으려 스케줄을 생각하며 퇴근하던 길, 예상치 못한 첫 상담이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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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를 나와 대로변으로 조금 걷다보면 12차선을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길게 누워있는 모습이 나온다. 몇 시간 전에 달려갔던 길과 같은 길이지만 러시아워로 인해 보행자로 가득 매워진 횡단보도의 그림은 훨씬 복잡하고 요란스러웠다.
앞 사람과의 좁은 간격을 유지하며 중간 쯤 건너갔을 때, 뒤에서 잡아채는 묵직한 느낌에 그만 중심을 잃어 넘어질 뻔한 나를 받쳐준 사람이 있었다. 날렵한 눈매를 가진 남자.
“또 보네?”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해버린 나는 횡단보도의 남은 시간을 응시하던 그의 손에 이끌려 길을 마저 건너고 나서야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까는 괜히 고생시킨것 같아서 미안. 후, 잠깐 어디 앉아서 얘기나 좀 할 시간 되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한 나로선 오히러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퇴근시간대가 지나면서 북적일것만 같던 카페의 내부에는 손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직원은 곧 다가올 자신의 퇴근을 기다리며 교대 준비를 하느라 바쁠 찰나에 주문을 넣은 것이 조금 미안하게 느껴진다.
“카야랑은 어떤 사이야? 직원?”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라도 할 겸 사무소에서 신세를 지고 있어요.”
“너 되게 어른스럽게 말하는구나?”
죽기로 마음먹었던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온화하고 여유로운 모습의 카이토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촌지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까 일은 카야의 귀에 들어갔나? 안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허탈한 듯 웃음을 흘리고 다시 음료를 마시며 창 밖을 둘러보았다.
“뭐 그건 할 수 없겠지...아, 너 그러면 카야에게서 나에 대한 얘기도 들었겠네?”
“네. 옛날 얘기를 조금..”
“내가 죽은 사람의 환영을 보는 것도?”
최대한 피하러 했던 주제를 본인이 들춰버림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문제가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했던가, 그는 이미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알아. 실제로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그녀가 환영이라는 것도 .”
“혹시 괜찮다면 그녀랑 나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줄래?”
손에 쥐고 있던 음료를 살짝 흔들어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아직 마실 게 남아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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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첫 만남부터 얘기 해볼까.
난 취업 전까지는 항상 센터와 병원 신세를 지곤 했어. 비용이 상당했지. 그 때문인가, 돈을 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서 닥치는 대로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하려 발버둥쳤지. 과정은 힘들었지만 뭐 결과는 좋았어.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의 큰 스포츠용품 회사에 입사해서 승승장구했어. 취업 준비를 하던 지난 5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어..정말 기뻤지.
그런데 너무 취업에만 몰두했던 탓인가, 같이 기뻐해줄 사람이 없던 거야. 기뻐야 할 일인데 슬퍼지는 게 기분이 묘하더라.
혼자 축하의 의미로 모아뒀던 돈으로 옷을 사거나 머리를 하면서 한 껏 멋도 내고, 평소에 사고 싶었던 것들도 사고, 번화가에서 가볍게 술도 마시고 하루를 즐겼지. 그런데 사람이 너무 고픈 거 있지.
사람이 많은 곳을 찾다가 어느 술집에 들어가서 혼자 진창 술만 마셔댔어. 혼자라서 부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그 많은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마치 그 장면이 텔레비전속의 영화처럼 멀게만 느껴지더라고.
술에 먹혀버려서 완전 제정신도 아니었지. 그러다가 어느 젊은 애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내쫒겨버렸어. 거의 쓰레기봉투처럼 가게 밖으로 내던져진 상태에서 밤 하늘을 바라보는데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 아직도 생생해.
한동안 그렇게 앉아있다가 비틀거리던 다리도 진정되고 정신도 슬슬 맑아지는데 아직 취하고 싶다는 생각에 일부로 비틀거리면서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다녔어. 그러다가 여기, 지금 이 카페가 보이는 거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뭔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더라고, 그래서 무작정 들어가서 아무 음료나 시키고 자리에 앉았지. 앉고 한숨을 돌리고 나서야 무릎이 까진 상처가 보이더라. 그때는 그냥 그 상처를 ‘건들지 마시오’라는 메세지로 쓰려고 닦거나 숨기려하지 않았어. 상처투성이 상태로 음료를 마시면서 창 밖이나 이따금씩 쳐다보고 있었지. 그러다가 술기운도 남았고, 몸도 쑤시고 해서 그만 잠들어버린 것 같아.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밤이었어. 다만 카페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더라, 조명도 희미하게 켜져있었고. 그러다가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상처를 확인하려고 내려다봤는데 누가 깔끔하게 드레싱을 해 놨다는 거지. 놀랄만도 하잖아? 마감하려는 직원에게 가서 누가 해 놓은 거냐고 물어봤는데 내 은인은 벌써 퇴근하고 없다길래 다음 날에 다시 찾아갔지.
아마 그 날 집에 가는 길에 드레싱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다음 날에 무작정 카페로 들어갔을 때, 지금 생각해보면 할 말을 생각해놓고 들어갔어야 됐어. 뭐, 그래도 금방 잊어버렸으려나.
카운터에 서있던 은인을 보는 순간 거짓말 하나도 안 섞고,
그녀를 제외하곤 모두 흑백으로 보이더라. 노랫소리나 대화하는 소리는 전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제대로 귀에 담기지도 않고, 유일하게 들리던 소리는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와 그녀가 내게 건낸 인삿말인 ‘어서오세요.’
형식상의 것이 아닌, 정말 나를 반겨주는 듯한 말이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내가 어제 이 카페로 이끌렸던 이유는 단순한 변덕이 아닌, 운명이었구나 라고.
마치 그 순간을 찬양이라도 하는 듯 적절한 손짓을 섞어가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기뻐보였다. 교내 대회에서 수상이라도 한 어린애가 부모님께 그 상장을 내밀며 자랑이라도 하는 듯, ‘순수한 기쁨’만을 담은 모습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생생해, 아직도 두근거릴 정도라고! 사가네 군, 너도 사랑이란 걸 해 본 적이 있어?”
뜬금없이 날아온 질문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이라, 짝사랑도 포함되는 거라면 있기는 하다만 그가 묘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내가 느낀 것 이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거야. 내가 워낙 말을 조리있게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얼떨결에 상담을 해주는 입장에서 조언을 듣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행복했던 추억을 꺼내면서 그가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듯한 모습을 보이기에 그저 들어주는 것으로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점이 깊게 와닿았다.
조금 진정됐는지 숨을 깊게 내뱉은 카이토가 일어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상담 고마워. 카야의 아이디어겠지?”
“상담인 거...알고 계셨군요.”
“그거야 알기 쉽지. 카야가 어떤 사람인 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오늘 얘기 들어줘서 고맙다. 카야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마지막으로 정장 자켓을 챙긴 그는 손을 흔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벼운 발걸음에는 여유가 묻어있었고, 이대로 그를 보내도 별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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