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참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좋지 못하다 -노자-
세 번째 상담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주말에 이뤄졌다. 이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호전된 카이토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위험한 일을 행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긴장을 놓은 상태의 사람대 사람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미사키가 맞았던 거지. 처음엔 껍데기 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카이토의 말을 빌리자면 처음에 등장한 ’반응이 없는’ 미사키 또한 미사키 본인이 맞았다. 다만, 온전한 사람이 아닌 미사키의 ‘조각중 하나’라는 비유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본인이 내게 표현할 수 있게 해 볼 거야. 글이라도 좋고, 그림이라도 좋아. 물론 그러려면 스케치 북을 몇 개 더 사야되겠네. 벌써 다 써버렸거든.”
순수한 이미지의 성인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실체는 겉만 다 큰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가 표현하는 순수한 기쁨은 실로 주위 사람들까지 웃음이 피어나게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것이다.
“가방에 썼던 스케치 북을 들고 왔거든, 한 번 볼래?”
“네. 저도 궁금하네요.”
허리를 뒤로 돌려 가방을 뒤지는 카이토는 꼬마 아이가 자신이 학교에서 그렸던 그림을 부모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모습과 겹쳐 보였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력을 불어넣어준 스케치 북이라, 솔직히 궁금해지긴 한다.
“자, 여기. 잠깐 보고 있을래? 난 화장실을 좀 다녀올게.”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손때조차 타지 않은 스케치 북을 채운 글씨들은 사실 토라마 카이토라는 남자의 수다스러움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의 말대로 스케치 북에 적힌 질문들은 중간 페이지를 기점으로 앞쪽엔 간단히 긍정과 부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쉬운 질문들과 뒷쪽엔 조금 심화되었지만 여전히 긍정과 부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새로운 형태의 질문을 했던 흔적이 보였다.
그 중에 유독 눈에 띈 질문 하나,
‘우리 여행 갔던 거, 기억나?’
토라마 미사키는 그의 남편 토라마 카이토와 여행 중 강도를 만나 살해당했다.
만약 미사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지 않고 스케치 북에 ’응’이나 ‘아니’를 적어 표현했다면...
오히려 한정된 정보를 담은 매체였던 것이 다행인 것일까.
미사키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카이토의 눈에 보이는 그녀가 실체가 아닌 환상이라는 가정하에, 그 외관은 카이토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사카 유라이가 내게 기억을 보여줬던 것을 이용해 그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미사키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였지?
“후, 어때? 막상 보면 별 거 없지?”
몰래 꿍꿍이라도 꾸미다 들킨 것마냥 그의 목소리에 테이블이 들썩일 정도로 몸을 떨어버렸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은 덤이다.
“너 반응 되게 재밌네 크흐..”
“저기, 토라마 씨.”
“어. 말해.”
최대한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괜히 그녀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선 ‘미사키는 실존한다’를 전제하에 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내 분은 어떤 모습인가요?”
카이토는 새삼 진지해진 나의 태도에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나의 태도를 굽히진 않았다.
“모습이라...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이지. 왜?”
살아 있을 때.
현재의 미사키를 어떤 상태로 생각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한 번 죽은 상태라는 사실은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모습이다. 흔히 일어나는 기억 왜곡 상태는 다행히도 피해간 듯하다.
“아니에요. 그냥 건강하시나 해서 물어본 거에요.”
애써 자연스러운 웃음을 그리며 분위기를 일단락 시킨 후에야 그의 표정도 원래의 순수함을 되찾았다. 과연, 직접 캐내기엔 민감한 부분인 만큼 조금 더 깊게 고민한 후 질문을 던져야 겠다.
“오늘 상담은 어째 자랑만 늘어놓는 게 돼버렸네. 미안하게.”
“아뇨. 오히려 저까지 기분 좋아졌는데요 뭘.”
헤어질 때 다음 상담 일정에 대한 약속은 잡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보고하는 형식의 상담보다는 그가 내게 할 말이 생길 때만 만나는 것이 오히려 속내를 털어놓기 좋을 것이다.
“애 같지가 않단 말이야...”
띠동갑 이상으로 어린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성숙함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세어나왔다.
아직 말속에 뼈를 감추는 것은 미숙한지 이 쪽에서 쉽게 파악이 가능하지만,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아츠시라는 소년을 더 이상 ’아이’로 볼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도움을 받는 입장인 나로선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어딘가 모를 불신이 피어나는 나의 본성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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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에 관한 일에 대해선 최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그와 다른 신어에 관한 일은 역시 물어보지 않고선 알 방법이 없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신어를 사용한 카야라면 기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기억이라...아마 감각을 조작하는 신어랑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은데.”
역시 단번에 질문의 핵심을 파고드는 카야다.
“아츠시, 네 말대로 라면 감각을 조작하는 경우는 대상의 기억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지?”
“네. 근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아니. 그건 아마 맞는 말일 거야. 다른 경우의 수는 마땅히 어울리는 게 없거든.”
집중할 때면 평소의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냉철함만 남은 모습을 보이는 카야는 자신을 납득시킬만 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까진 외관만 같은 타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니면, 혹시 다른 종류의 신어인가?”
질문한 입장에서 미안해질 정도로 몰두하는 모습에 급한 일이 아니라며 주제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한 번 집중 모드에 들어간 카야를 말리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모지를 꺼내 이런 저런 키워드를 적던 카야는 가장 큰 공백이 있던 메모지의 하단에 한 단어를 휘갈겨 쓰고는 동그라미를 쳐 강조했다.
공유
그것이 그녀가 도출해낸 결과물이었다.
“공유...정확히 어떤 걸 공유하는 거죠?”
“능력이지. 신어 말이야.”
“그게 가능해요??”
예상치 못한 정보다. 신어를 공유한다니?
“신어의 바탕은 ‘말하는 것’인 거, 알지?”
메모지를 뜯어내고 새로운 페이지에 사람이 서있는 모습을 간략하게 그린 카야는 설명을 이어갔다.
“말은 혼자 하는 게 아니야. 둘 혹은 그 이상의 다수가 있어야 실제로 빛을 발하지.”
이번엔 그 그림의 주위에 비슷한 모양의 사람을 여러 명 그려넣었다.
“내가 쓸 수 있는 신어의 힘을 100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절반인 50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같은 말을 한다면 결과는 전자 후자 모두 같아야 하는 게 수학적으로 옳지만”
그 뒤로 카야가 그린 것은 사람 모양의 그림 위로 커다란 말풍선, 그 의미를 아주 짧은 찰나만에 이해할 수 있었다.
“증폭되는 군요...상승 효과를 일으켜서.”
“그렇지. 물 한 잔과 구름 속의 물 분자 양은 같은 것처럼”
한 잔의 물로는 더위를 식히기는 커녕 목을 축이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다만, 구름이 된다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게 하늘을 뒤덮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능력을 공유하는 게 가능해야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건 내가 도와주면 돼. 전문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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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는 법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자들의 계약을 중개해주는 일을 한다. 위험부담이 큰 만큼 얻는 것도 큰 일이다.
단순히 신어를 사용해 계약서를 읽어주는 것으로 계약서의 내용이 이뤄지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이따금씩 들긴 했지만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
“매번 사용하는 건 아니야. 정말 중요한 사안이고, 절대 어기면 안 될 일에만 사용해야 돼. 리스크가 너무 크거든.”
내 추측을 들은 것만으로 아이사카 유라이의 감각을 조작하는 신어를 따라할 수 있는 카야는 신어의 활용도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신어를 사용한다.
“능력을 공유하면 보통 의뢰인 둘, 그리고 중개인인 나, 이렇게 총 세 명이 같은 뜻을 담은 신어를 사용하는 거야. 그래서 평소에 혼자 사용하는 것에 비해 신어의 강제성도 훨씬 강해지고.”
“말 그대로 ‘무조건’ 이루어지겠네요.”
이전에 말한 ’예외’인 계약을 이행할 의뢰인의 세상으로부터의 부재 외엔 무조건 이루어지는 신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능력을 나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정하에 어떻게 타인의 기억을 제가 볼 수 있는 거죠?”
여러 방법을 구상하느라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리고 있던 중, 무엇인가 이마를 지긋이 누르는 느낌이 들어 올려다본 곳엔 카야가 검지 손가락을 들고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카이토의 기억 말이지?”
토라마 카이토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지만 이미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배경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괜찮아. 상담자가 내담자를 파악하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 아니니까. 잠깐 일어나 볼래?”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는 카야와 나의 눈높이는 꽤나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카야가 나를 살짝 내려다보는 구도가 성립되었다. 아직 키가 170도 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언젠가는 저 눈높이를 훨씬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너와 내가 얘기하는 것은 절대적인 강제성을 갖게 돼.”
정신이 아찔해졌다. 자칫 잘못한다면 그대로 놓아버려 쓰러질 것만 같은 기분에 그만 비틀거렸고, 카야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최소한 바닥에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이다.
“허억...빈혈이라도 온 것 같았어요.”
“외부에서 방해받지 않기 위해 감각을 조금 조절했어. 어때?”
그러고보니 쓰러질 뻔 하느라 바닥에 발을 세게 굴렀지만 정신이 없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라 무엇인가 있어야할 게 없다는 느낌만 들 뿐, 정확히 뭐가 없어진 지는 모르고 있었다.
다시 발을 세게 굴렀다.
물 속에서 외부의 소리를 듣는 것같은 먹먹함.
카야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가 먹먹하고 아득하게 먼 곳에서 들려왔다.
“일할 때는 여기서 몇 가지 조건을 걸어, ‘계약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읽을 것’과 ‘계약서의 내용 이외의 것은 발언하지 않기’. 보통 이 두 개를 걸지.”
먹먹한 소리 속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강렬한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카야가 손뼉을 맞대는 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몇 배는 강조된 듯했다.
“그럼 실험을 시작하자!”
실험의 개요는 이러했다.
1. 카야와 내가 신어를 공유하는 공간에 들어온다.
2. 카야가 자신의 기억 일부분을 보여준다는 말을 한다.
3. 내가 카야에게 기억을 보여달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결과는 두 명분의 신어의 효력이 평소보다 증폭되어 감각을 조절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당시의 기억을 감각으로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내가 보여줄 기억은 네가 처음 이 사무소에 발을 들였을 때의 기억이야. 어때, 준비 됐어?”
“네. 부탁드릴게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본 나의 모습이라. 좋게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한 편, 행여 좋지 않게 보였을까에 대한 근심도 동반되었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보여줄게.”
“당신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보여주세요.”
남아있던 감각이 멀어지면서 다시금 물 속에 잠겨버렸다. 저번의 끝도 없이 어두운 곳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아닌, 물을 통해 어딘가로 떠밀려가는 느낌.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정신이 다시 맑아지는 것을 차분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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