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 63화
보통의 경우, 명함을 건넨다는 행위는 소개해줄 대상의 간단한 신상정보가 적힌 종이를 건네는 절차라고 생각했다, 물론 앞서 말한 듯이 보통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허나, 어째서 익숙한 인물의 이름이 적혀있는건가.
상단에 떡하니 걸린 ‘타니 미노리’라는 이름과 볼펜으로 휘날려 쓴 도로주소가 전부인 명함을 본 순간, 부러진 칼을 생각해주는 태도로부터 온 ‘뒤늦게나마 나를 조금은 챙겨주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지금 가방 속에서 덜컥이는 도신마냥 산산조각났다.
어쩌면 미노리에게 명함이란, 그저 회사에서 지급하는 빳빳한 메모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고속철도와 시내버스를 전전하면 이동이 전혀 불가능하진 않다만, 중간중간 도보를 이용한 이동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몰아치는 칼바람에 옷깃을 싸매다보면 자가용 면허를 미리 따두지 않은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외부와의 경계선이라고는 걸터앉을 수 있을 보행용 손잡이가 전부인 무인역, 전철이 완전히 멈추고 나서도 내릴 채비를 하는 승객이 한 명 뿐이라 이목이 집중될만도 했지만 그 누구도 놀라울만큼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가방에서 요란스럽게 몸을 털어대는 날붙이의 조각들의 소음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승객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역의 안과 밖의 공기가 전혀 다르지 않은 개방형 플랫폼을 나와 겨울내내 숨죽이고 있는 밭을 따라 걷기를 약 3분,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량 한 두대가 멈춰선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메세지가 화면에 띄워졌다.
공방이라면 어딘가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 자리잡아 매일같이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와 화덕의 열기가 끊이지 않는 모습만을 상상해왔다. 아마 이곳도 시간의 물살을 버티지 못하고 그 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택한 것이 아닐까.
목적이 있어 찾아오지 않는 이상 농산물 창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아이보리색 시멘트벽과 때가 탄 물색의 지붕이 조금은 낡아보이는 건널목과 같은 시간을 보낸듯, 자신의 주변에 제대로 녹아들어 숨죽이고있다는 느낌을 제대로 풍기고 있었다.
다만, 공방치고는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고요함에 불안함이 커져간다.
1%도 되지 않을 확률에 맞춰서 온 것은 정말 운명에 가까운 확률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휴관 : 12/28 ~ 1/1’
한 걸음씩 가까워 질때마다 느껴진 위화감은 입구에 걸어놓은 쇠사슬과 켜지지 않은 간판에서 비롯된 불안이었을 것이다.
불안한 예감은 거의 틀리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은 덤이다.
“거기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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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곯아떨어졌나보네요.”
처음의 한 잔 이후로 갑자기 불이 붙기 시작한 아야기는 대화에 참여하기보다 잔을 가득 채운 것을 입에 털어넣는데에만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 끝이 침대행이라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제대로 웃어른들로부터 배우셨나보네요? 전혀 흐트러짐도 없으시고.”
배우다, 라.
분명히 오는 길에 전화로 배우긴 했지.
“이러면...너무 맨정신 같아서 힘들지도...”
아츠자와 리이는 곧 알 수 없는 가사에 음표를 붙여 즉석으로 만든 혼잣말을 노랫말처럼 중얼거리며 방문을 부드럽게 당겨보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저어...오늘 불러주신..”
얼굴을 맞대기 불편한 상황에서 굳이 집으로 초대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로는.
“오늘 불러주신 이유는 아까 말씀하신 것의..”
두뇌 회전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말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생각이 그 방대한 양을 걸러내지 못하고 입은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방금 내뱉은 말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덥고 습한 곳에 곰팡이가 피어나듯이, 이 환경은 실수라는 요소들이 자리잡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다. 그래서 위험하다.
“솔직히...”
무겁고 조용한 공기에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이성과는 다르게, 본성이 지배하는 뇌는 쌓여가는 맥주캔으로 탑을 쌓아도 꽤나 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에 바쁠 뿐이다.
“이대로 잊고 살아가는게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억울함은 감출 수가 없었나봐요.”
머릿속에서는 캔을 3층까지 쌓아 올렸을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바람 한 점마저 불지 않을 무풍지대에 쌓아올리던 탑이 요란하게 무너져내렸다.
제일 먼저 비틀거리던 녀석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공들여 쌓아놓은 것들이 일제히 몸을 부딪혀 내는 소음은 멈춰버린 심장에 전기를 흘려 보낸 것처럼, 흐리멍텅하던 감각은 존재하지도 않는 소리에 소스라치듯 놀라면서 맨정신으로.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는 이런 전기 신호가 뒷목부터 척추를 타고 꼬리뼈까지 저리도록 아찔한 충격을 선사해주곤 한다.
“범인...잡히지 않았나요?”
“...네. 아마 잡히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모종의 압박이 들어왔음에도 진실을 밝히겠다며 삶의 상당부분을 포기한 아츠자와 씨는, 그대로 배우자와 상처입은 딸아이를 뒤로 하고 영원한 입막음을 당해버렸다.
“그래서, 저는 순간적이나마 제 욕심에 선생님을 휘말리게 할 뻔 했던 아까의 일을 깊이 반성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부디,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늙은이의 괜한 소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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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리...미노리...미안한데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소개시켜준다며 생판 모르는 사람의 주소를 알려준건가?
타니...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내가 젊은 사람들은 잘 몰라서 말이야, 하하..”
“젊은 사람...”
젊은 사람을 잘 모른다면, 혹시라도 ‘윗선’의 이름은 알지 않을까.
그렇다면...역시 그 올백머리밖에 없나.
“카베 세이타 부장님. 그 분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옮기던 걸음에 급제동이라도 걸린 모습처럼 우두커니 서있던 이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이름을 재차 확인하듯 물어봤다.
“네. 성함에 아름다울 가(嘉) 자와...”
“됐어. 그만하면 충분하네...카베 녀석, 나를 소개시켜줬다 이말이지...”
좋은 인연이었다면 반가움을 표했을 것이다. 괜히 말끝을 흐리게 만들 이와의 관계에 대해 굳이 캐묻고 다닐 정도의 악취미를 갖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이동하는 것외의 행동은 취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게 넘겨버렸다.
가스 난로의 위에 얹어진 주전자로부터 따라낸 뜨거운 물과 접객용으로 구비해둔 티백을 건네준 작업복의 남성은 어디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것만 같은 손짓으로 옆머리를 쓸어넘겨버렸다.
“졸업생인가?”
간단한 신상정보에 관한 질문을 던지던 그가 입에 물고있는 것에 불을 붙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이 마치 위압감을 풍기는 면접관과 사회초년생 티를 벗지 못한 취업준비생이 쭈뼛거리며 앉아있는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딸아이랑 나이가 똑같아서 물어보겠는데, 혹시 알고 있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지만, 역으로 세상이 좁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어릴적 같이 어울리던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나거나,타지에서 만나 결혼까지 준비하려던 애인이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녀석의 가족이라던가,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부터 비극적인 이야기까지 다양한 것이 세상을 사는 재미이며 사람의 앞날은 알 수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내게도, 방대한 ‘세상의 이치’라는 녀석이 눈길을 줘버린걸까.
‘미츠에다 쇼 라는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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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술자리는 잘 끝..”
‘알고있었어? 아야기의 눈..사고가 아니었다는거.’
놀라운 사실을 전하려는 이의 들뜬 목소리보다는 화가 난 것에 가까운 나지막한 목소리, 그것은 마냥 좋지만은 않은 의미로 겨울의 추위를 잊게 만들었다.
“응. 예전에 들었어.”
‘범인이 잡히지 않은 것도?’
“응.”
원망하고 싶지만 그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는 갈 곳을 잃고 밤거리를 헤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이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르는 슬픈 감정.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야?’
“일부러...랄까,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그야, 지금의 너라면..”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사실’을 듣고 뛰쳐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까.
“쇼. 그만둬.”
‘왜? 왜 가만히 있어야 해? 당사자가 가만히 있기 때문에? 아니면 어떻게든 일을 파해치려 뛰어든 아버지마저 죽었기 때문에? 왜냐고 왜, 왜!!!’
‘왜...다들...가만히 있으려고만 하는거냐고...누구보다 많이 아프면서도...’
“세상은...워낙 다양한 일이 많아.”
그래서, 때로는 ‘사실’ 그대로 놔두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어.
스피커 너머로 누군가 바쁘게 뛰어가는 소리가 아닌,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이의 푸념만이 들리는 이유는 나의 신어가 그녀의 움직이고자하는 마음을 꺾어버린 탓일까.
그게 진실이 아님을 알더라도, 나는 내 멋대로 판단한 ‘사실’만을 이해하려 들 것이다.
“넌 분명히 사실을 진실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그러니까,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천천히 대화를 해보자. 그 뒤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거야.”
“사무실에 있을게. 문 열어놓을테니까...”
겨울은 내뱉는 숨이 눈에 보이기에 한숨마저 자유롭지 않은 계절이다.
겨울 내에서 가장 활동력이 넘치는 기간, 연말 연시.
멀지 않은 곳에서 연회를 즐기느라 꺼지지 않는 번화가의 불빛처럼, 사무실의 불빛 또한 꺼지는 일이 없었다.
- 작가의말
7월달이 끝났군요...계절이 바뀌기 전에 빨리 일어서보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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