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어 84화
가장 오래된 기억이기도 하며,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비교적 낮은 곳에서 올려다본 어머니의 우는 얼굴.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눈높이가 추월한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나는 무척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괜찮아...괜찮아.’
전후 사정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머니는 왠지 넋이 나간 모습으로 ‘괜찮아’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흐릿하지만, 굳이 선명하게 새겨놓고 싶진 않은 장면이기에.
안개 낀 모습 그대로를 마음 속에, 머릿속에 간직하고자 마음먹었다.
어떻게 흐릿한 기억을 아직까지 갖고 있냐고?
그야, 아이에게 부모의 눈물에 담긴 무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나는 그때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말수가 확연히 줄었다고한다.
수다스러운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밖으로 나가 노는 횟수나 시간이 줄어듦과 동시에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파는 시간이 많던 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바다 건너의 세계를 장황하게 소개해놓은 여행 책자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어릴 적에는 20가지만 넘어가도 ‘셀 수 없이 많구나!’라는 착각을 하곤 했다, 이해해주길 바란다.) 언어가 존재했으며, 모든 언어에는 해당 국가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있었다.
언어란, 아름다웠다.
11세의 나는 아름답다는 표현의 깊은 맛을 약 2할 정도 느꼈다.
12세, 나는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3국의 언어로 일기를 쓰고, 현지의 동갑내기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구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13세, 3개국어로 현지의 어른들과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 영어, 이탈리아어, 불어, 독일어, 폴란드어, 크로아티아어로 작성된 문서를 읽고(말을 더듬긴 했지만, 읽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자) 뜻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북아시아 3개국의 언어를 연구한 논문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6살, 어머니와의 상의 끝에 고교 진학을 포기, 해외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저명한 교수로부터 공동 연구 제안을 받았지만, 유학이란 그리 쉽게 결정을 내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돈이 부족했다.
건강 관리 식품을 주로 판매하는 대기업에 걸려오는 소비자의 불만 전화를 대신 맡아주는 하청업체에서 일하시던 어머니는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욕을 먹어도 웃어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행여나 자식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걱정할까봐.
웃어야만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너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 어딘가가 망가져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 적이 있다.
나도 아기새마냥 입을 벌리고 먹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공동 연구를 제안했던 교수에게 연구 지원비를 제외하고도 타지 생활에 들어가는 주거비, 생활비 등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내봤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라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출국일 직전에 비행기 표를 마련할 수 있었다.
주위의 친한 친구로부터 조금씩 돈을 빌렸다던 어머니의 말과 친구분들의 믿음에 대해 반드시 보답하고야 말겠다며, 이코노미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있다.
꿈에도 몰랐다.
그 말이 거짓말이었을 줄은.
그 돈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은, 겨우 저번 주의 일이었다.
카페인이 만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보고서를 읽어가며 연구에 몰두해가던 내게 한 통의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당시의 나와 어머니는 통화료가 비싸다며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던 참이라, 느닷없이 걸려온 국제전화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게 언제인지,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비보를 듣는 와중에도, 구역질나는 담배냄새를 풍기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교수를 마주할 때에도, 입국 수속을 밟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느라 슬픔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모두 발음하기 쉬운 단어들 뿐이었다.
몇 십만 단위의 액수가 찍혀있는 통장, 구식 아파트의 열쇠, 장례비용의 청구서, 그리고 ‘합의금’이라는 명목 하에 지급된 수표 몇 장.
통장 속에는 ‘월급’이라는 항목을 제외하고도, ‘아르바이트’라는 입금 내역이 주기적으로 새겨져있었다.
매번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간대가 되어야 연락이 가능했던 것이나, 주말마저도 늦은 오후나 되어야 메신저를 읽으셨던 이유.
그리고
일요일 오후 8시 53분 경,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놓인 편의점의 앞에서 음주운전 사고에 휘말려버린 이유가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냐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운전자의 나이는 겨우 20대이며 꽤나 잘나가는 부모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 같다.
사람을 죽였음에도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는 것으로 무마시킬 수 있을, 꽤나 잘나가는 집안의 자식.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화가, 해선 안 될..
안된다니, 무슨 웃긴 소리인지.
시궁창이 더러운 이유는 인간이 버린 폐수 때문이지, 절대로 거기에 서식하고있던 쥐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쥐가 깨끗할까?
그것도 아니다.
쥐는 더럽다. 그리고 난 더러운 쥐를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쥐의 일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똑같이 음주운전 차량에 휩쓸려 산산조각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며칠 뒤, 유명한 그룹의 이사와 그의 일가족이 교통사고로 전원 사망했다는 뉴스를 듣게 되었다.
왠지, 기쁘지만은 않은 기분에 혀를 차버렸다.
해결된 일은 없다.
쥐 한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들, 시궁창이 깨끗해지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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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찾아온 태풍이 장대비를 몰고 온 날, 신발장에 세워져있던 검은 우산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굳이 커다란 녀석을 고른 이유는 없다, 그저 이녀석이 ‘유일한’ 우산이었기 때문에 들고 나왔을 뿐.
이건, 우산을 ‘쓴다’는 표현보다는 ‘짊어진다’가 어울릴만한 사이즈인데.
이 커다란 녀석을, 항상 혼자 짊어지고 계셨겠지.
마땅히 목적지를 정해두고 출발한 여정이 아니기에 이미 지나친 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지나가던가, 혹은 가만히 멈춰서 바닥을 바라보기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장대비가 우산에 부딪히며 연주하던 탄력적인 리듬에 정신이 팔려버린 나는, 등 뒤에서 이미 쉴 대로 쉬어버린 목소리가 빗물에 섞여 맥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한참 뒤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마...요.’
뒤를 돌아봤을 때에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아이 마냥 발이 얼어붙었다.
감사의 인사를 위해 이미 굽어진 등을 한 차례나 더 굽히는 노인의 모습을 봐서?
- 아니다.
말로만 듣던 과로 노인을 실제로 마주해서?
- 반은 맞지만, 주된 원인은 아니다.
노인은, 정확히 말하자면 노인과 쓰레기를 가득 실은 커다란 수레는 이 좁은 골목을 지나기 위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비에 젖은 폐지는 그 무게를 가차없이 불려나갔을테고, 유리병은 그 자체로도 이루 말 할 것도 없이 무거울 것이다.
그 무게를 견디고 있는 것은, 뒤의 것에 비해 한없이 작아보이는 체구의 노인과 말라붙은 팔다리.
그리고
머리에 쓰고 있는, 편의점의 로고가 박힌 반투명의 비닐봉투.
차디 찬 가을비에 폭삭 젖어버린 슬리퍼와 맨발.
그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있는 커다란 우산 속의 나.
이것이 정녕 이 사회의 ‘참된 모습’인가?
소외된 자는 한없이 추락하고, 떵떵거리며 사는 이는 비에 젖을 걱정따위 하지 않고.
사람을 죽였음에도, 죽은 사람을 욕하며 자동차 수리비를 걱정하며 바닥에 침을 뱉는 이의 손짓에 따라 움직여야만하는게 ‘섭리’인가?
아무리 계단을 올라가도, 시궁창을 벗어날만큼 높은 곳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이미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시체로 쌓아진 탑을 밟고 올라서야만 겨우 ‘바닥’에 도달할 수 있다.
나의 위치, 바닥인줄로만 생각하던 이곳은 실제로 사회의 바닥이었지만, 절대로 끝은 아니었다.
연옥.
이 사회에는 분명 연옥이 존재한다.
그렇다는 말은
이미 이곳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이 아닌가.
낭만적? 서정적? 그 입을 찢어버리기전에 다물어라.
곳곳이 침수될 정도의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이렇게 쓰레기를 주워 내다팔아야만 다음 날에 숨을 쉴 수 있다. 게으름은 곧 즉사로 연결된다.
아픈 소리를 낼 시간에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더 주워야만한다, 앓는 소리를 낸다는것 자체가 사치를 부리는 일이다.
잠을 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을 하고, 퇴근 후와 주말에는 아르바이트까지 해야만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져버린걸까.
이 우산은, 분명 저 수레에 실린 쓰레기보다 가볍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이들에게서
우산을 빼앗은건가.
이 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마천루에 앉아 희비의 농도를 조절하는 사람들.
범죄를 저질러도 소리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는 자.
범죄에 휘말려도 소리 하나 낼 수 없는 자.
침묵을 강요하는자와 침묵하기를 강요받는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시궁창 쥐의 반역도, 거창한 혁명도 아니다.
생명이 시들어가는 세계에 필요한 것은 가지치기.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라낸 가지로부터 만들어낸 우산.
“어르신, 이거 쓰세요.”
“괜찮아~ 학생이 써야지, 나는 필요없어.”
“아뇨. 쓰세요.”
이제는, 우산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셔야 할 테니까요.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그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갖춰진 것은 없지만, 제법 저 다운 모습으로 꾸며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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