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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김유진
작품등록일 :
2018.04.19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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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8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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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13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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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20일 수요일

DUMMY

“이번 시간에는 진짜로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

“하하하하하하!!”

학생들이 크게 웃었다. 그러자 그답지 않게 겸연쩍은 표정을 짓는 나상식 선생.

“이게 아무래도 수업이 정해진 교과서나 양식이 없다보니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큰 사건이 있었지.”

나상식 선생은 나인재를 힐끗 봤는데, 그런 나인재는 막상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아무튼 피에르 드 쿠베르탱 메달은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동명의 인물의 이름을 딴 것인데, 지난 시간에도 말했다시피 인종차별 주의자이자 성차별주의자였던 그의 이름을 단 이 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올림픽에서 스포츠맨십을 구현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그 수상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루츠 롱을 들 수 있지.”

루츠 롱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멀리뛰기에 출전한 선수다. 라이벌인 미국 선수 제시 오웬스는 예선에서 잇따라 실격판정을 받으며 탈락 위기에 처했는데, 지켜보던 롱은 조용히 오웬스에게 다가가 ‘구름판과 간격을 넉넉히 남겨두고 뛰어라. 네 실력이라면 그렇게 해도 예선통과에 충분한 기록이 나올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그 결과 마지막 한 번의 기회에서 오웬스는 롱의 조언을 따라 결선에 진출하고 금메달까지 수상했다. 이러한 일화를 얘기하는 나상식.

“여기서 은메달을 차지한 사람이 바로 루츠 롱이다.”

“즉 루츠 롱이 조언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금메달을 따는 건 그 자신이었겠군요?”

“그렇겠지. 언뜻 바보같이 보일수도 있지만, 만약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나중에 이 조언을 하지 않은 것이 사실 후회가 될 수도 있다. 막상 조언해준다고 해서 무조건 금을 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보장도 없는데 조언을 해주지 않았으면 루츠 롱은 스스로의 양심에 걸렸을 것이다.”

“사실 그런 조언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도 모를 테고, 그저 루츠 롱 혼자만이 아는 비밀로 남았을 텐데 참으로 모범적이군요.”

나인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동메달은 일본 선수가 받았는데, 어떻게 보면 루츠 롱의 조언 때문에 그런 나비효과가 일어난 것이지.”

“참으로 아이러니하군요.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루츠 롱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겁니다. 다만 자기가 봤을 때는 괜찮은 선수가 사소한 팁을 몰라서 실격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조언을 했겠죠.”

“그렇다. 그런데 문제가 터진 것이, 루츠 롱은 독일 선수였고 그 당시 독일의 지배자는 히틀러였다.”

“······.”

“게다가 히틀러는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고 도움을 받아 금을 딴 제시 오웬스는 하필이면 흑인. 히틀러의 면전 앞에서 흑인인 오웬스를 도와준 루츠 롱의 용기는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대사는 이후 오웬스의 자서전에서 나오는 것이지. 올림픽 이후 오웬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사상 최초의 육상 4관왕으로 금의환향했고, 이 기록은 후에 그 유명한 칼 루이스에게 깨지기 전까지 무려 48년 동안 깨지지 않았지. 그런데 이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3년 뒤인 1939년, 2차 대전이 터진다. 징집된 롱은 시칠리아 전선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지. 이때가 1943년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루츠 롱과 제시 오웬스는 서로 편지로 교류하며 친분을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잠시 끊겼던 양 가의 인연이 제시 오웬스가 루츠 롱의 묘소를 방문하고 그의 장남을 만난 것으로 인해 양가의 인연은 다시 이어져 나갔다. 두 가문은 서로 양가의 결혼식에도 참가하는 돈독한 사이지. 그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소름 돋는군요.”

허똑똑은 진짜로 소름이 돋아 팔을 매만졌다. 소름이란 게 여러 가지 상황에서 돋는데, 이 경우는 감동의 소름이었다.

보통 소름은 단순히 춥거나 공포를 느낄 때도 돋지만, 이렇게 ‘전율’을 느낄 때도 돋는다. 감동의 전율. 이 일화는 그런 전율이 일어나기에 충분했다.

“한편 로렌스 르미유라는 사람도 있는데, 캐나다 요트 선수다. 게다가 이 선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다.”

“오!!”

학생들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같은 감동적인 일화라도 자신들에게 좀 더 연관이 있으면 이입하기 쉽다. 이 일화가 바로 그런 일화였다.

“로렌스 르미유의 캐나다 요트 팀은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여 2위로 순조롭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강풍으로 인해 싱가포르 팀의 요트가 전복되고 선수들이 물에 빠진 것을 보자 망설임도 없이 코스를 이탈해서 그들을 구조하고 의무보트가 올 때까지 기다렸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 줄 아느냐? 너희도 알다시피 올림픽은 4년마다 한번 씩 열린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은 당연히 전성기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해서 다음에 다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국의 선발 경쟁에서 밀려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경기를 중단하고 사람들을 구한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의무보트가 선수들을 안전하게 후송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레이스를 재개해 22위로 골인했다. 이게 매우 화제가 되어서 이례적으로 대회 기간 중임에도 불구하고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받았지.”

몇몇 학생들은 생각했다. 이게 만약 나였으면 어땠을까? 가령 자신들이 수능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시험치고 있던 학생 하나가 쓰러졌다.

그 학생은 심지어 아는 사람도 아니고 당연히 처음 본 학생인데, 시험장에 있던 교사는 모르지만 나는 인공호흡 등 구명방법을 안다.

사실 고등학생인데 성인도 잘 모르는 구명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게다가 이 수능은 심지어 4년에 한번 씩 열린다. 혹은 나는 4수 째.

그런 나는 과연 시험을 포기하고 사람을 살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애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일화를 얘기하는 나상식.

“그리고 에우제니오 몬티라는 이탈리아 봅슬레이 선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 봅슬레이 2인승에 출전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 조의 썰매가 고장 나자, 먼저 레이스를 마친 그는 자기 썰매의 부품을 써도 된다고 흔쾌히 제안했지. 그 결과 영국 조는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하고 몬티의 조는 동메달을 받게 되지.”

“어째 앞의 얘기와 비슷하네요??”

“그래, 현실이란 참으로 기묘하지? 때론 이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단지 도와줬을 뿐인데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높은 기록을 세우는 일이 일어난 상황. 그 결과 논란이 일어났는데 아마 국가의 대표로서 타국의 팀을 도와주고 그로 인해 자신의 메달은 한 등급 떨어지자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 그런데 몬티는 ‘영국 팀은 나 때문에 우승한 게 아니라 가장 빨리 달렸기 때문에 우승했을 뿐이다.’라며 논란을 일축했지.”

“멋있는 사람이네요.”

“그래, 논란을 제기한 찌질이들과는 비교되지? 이게 스포츠 정신이다. 상남자들의 특징이고. 찌질이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 그들은 진짜로 이해할 수 없다. 왜? 왜 남을 도와줘서 자신들의 메달을 낮추는 거지? 사실 까딱했으면 그들은 메달도 아예 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 팀만 더 잘했으면.”

“그렇죠.”

“원래 소인배들은 대인배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평생 소인배이지. 아무튼 이러한 대인배스러운 모습으로 인해 그는 앞서 말한 루츠 롱과 함께 최초의 쿠베르탱 메달을 수상했다.”

“1964년이 최초로 쿠베르탱 메달이 생긴 해인가보군요.”

“그렇다. 한편 무조건 도와줬다고 해서 메달을 수상한 건 아니다. 저스틴 할리 맥도널드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봅슬레이 선수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남자 4인조 봅슬레이 팀의 주장으로 참가하여 스웨덴 팀에게 11kg 분량의 밸러스트를 빌려주었다. 이걸로 스웨덴 팀은 오스트레일리아 팀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팀 다 각각 15등과 20등으로 메달권은커녕 8등까지 받는 입상도 받지 못하는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대회 중에 다른 팀을 도와줬다는 것이 인정되어 쿠베르탱 메달을 받았지.”

“사실 그렇게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봅니다. 월드컵 같은데 보면 팔꿈치로 가격하고 백태클을 날려서 아예 아킬레스 건을 박살내잖아요??”

“그렇지. 사실 올림픽도 뭐 그리 신사적인 대회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그동안 무수히 발생했지.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않느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한 달 전인 2002년 2월 8일부터 2월 24일까지는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는데, 거기서 그 유명한 안톤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이 터졌다.

안톤 오노는 미국의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인데, 1500m 경기에서 한국의 김동성과 맞대결을 펼치던 그는 2위까지 올라오는데 성공하지만 김동성을 제치는데 실패하자 마치 의도적으로 김동성이 블로킹을 했다는 듯한 액션을 펼쳤다.

“오스트레일리아 심판은 이를 김동성의 반칙 때문인 것으로 간주하여 실격시켰고, 안톤 오노는 금메달을 거머쥐었지.”

오노는 레이스 직후의 인터뷰에서 태연히 ‘그가 실격당할 줄 알았어요.’라고 대꾸했고, 쇼트트랙 첫 금메달리스트가 되면서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4위를 한 이탈리아 선수는 판정이 잘못됐다고 증언했지만, 판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김동성의 실격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은메달을 딴 리자준은 당연히 심판 판정에 수긍한다고 말했지. 게다가 오노는 하필 미국계 일본인. 이로인해 더욱 큰 분노가 일어났다. 자기가 동메달대신 은메달을 따니까 심판판정에 수긍한다는 중국인, 태연하게 반칙을 저지르고 뻔뻔스럽게 금메달을 따고도 아무렇지도 않아한 일본계 미국인 안톤 오노.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짱깨와 쪽바리들이······.”

누군가 중얼거렸다. 짱깨와 쪽바리라는 단어는 좋은 단어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심한 욕이 돌아다녔다. 하필 오노의 헬멧 번호가 369라 괜한 369게임이 당시 오노 게임으로 불렸고, Fucking USA라는 곡이 유행할 정도.

한편 당시 인터넷 방송인이었던 김구라와 황봉알은 비행기 표까지 끊어서 오노의 아버지가 하고 있다는 이발소까지 찾아가 벽에 있던 오노의 사진에 ‘금메달 내놔, 개새끼야’라고 적었는데 오노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던 김동성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이 영상은 조작이었다고 한다.

그 영상에 나온 사람은 아예 오노의 아버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오노와의 만남이 불발되자 황봉알은 ‘다음엔 장애인 올림픽에서 보자, 개새끼야’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괜히 애꿎은 장애인들만 비하했다는 점에서 희대의 망언이었다. 한편 나인재는 한마디 했다.

“쿠베르탱 메달을 따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그런 인간도 있군요. 남들도 최소 4년 동안, 혹은 그 이상 피와 땀을 쏟으며 노력하여 경쟁하는 공간에서 더러운 짓을 저지르는 인간이.”

나인재도 얼마 전 입학하기 전에 그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을 보았지만, 나인재는 특히나 경찰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불의에 매우 민감한 성격이었다.

부조리한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그는, 그 사건 때도 당연히 분노했다. 온 몸이 부들거릴 정도.

“그렇다. 세상에는 그런 인간도 있는 것이다. 너희도 나중에 세상에 나가보면 알게 되겠지.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마.”

나상식은 수업종이 울리자 교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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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02년 4월 30일 화요일 18.05.14 413 1 8쪽
» 2002년 3월 20일 수요일 18.05.13 42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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