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를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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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설란
작품등록일 :
2018.05.04 23:33
최근연재일 :
2018.08.0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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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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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

DUMMY

우선 상황을 정리해보자.

우리의 앞에선 술을 들이켠 듯 초점이 흐릿한 지그문트 아저씨가 옆에 있는 초인 보고 검기를 날리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선 커다란 진동이 울리며 무언가가 부서지고 있었고, 실시간으로 마수의 샤우팅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와우.

일단 우선순위를 정하자. 제일 먼저 줄리엣과 이 자리를 벗어나고, 그다음은 나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알마, 그리고 곁다리로 시몬과 합류한다.

정리를 끝낼 때쯤에 지그문트가 바깥의 소란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했다.


“데미안 경, 다른 자들은 모두 죽여도 상관없지만, 저 꼬마는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줄리엣을 가리키며 신신당부를 하는 지그문트. 뭐지? 어쩌면 내 생각보다 줄리엣은 양국에게 중요한 실험체, 빌어먹을. 이렇게 말하니 기분이 더럽잖아. 어쨌든 실험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지그문트의 말에도 검에 맺혔던 검기를 허공을 향해 사정없이 뿜어냈다. 불처럼 타오르는 검기가 우리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검은 가죽을 끌어 올리려다, 잠깐 망설였다. 피아를 식별하지 못하고 날뛰어 버리면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그러나 내 옆에 붙어 나의 사각을 막아주는 줄리엣을 떠올리자, 그 고민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곧 검은 가죽이 내 온몸을 뒤덮었다.

심장이 급격히 날뛰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몸 곳곳의 뼈와 근육이 팽창하면서도 조밀해져 그런 심장을 뒷받침해줬다.

다만 지난번과 목적이 달라서 그런지 이족보행은 유지하고 있었다는 게 특이했다. 체격이 머리 두어 개는 더 커졌는지 주위 사람들이 작게 느껴졌다.


-죽여라.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던 그 목소리. 하지만 옆에 줄리엣이 있었기에 나는 달콤한 어둠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검기에 앞발을 가져다 댔다. 발톱이라 하기엔 애매한, 검은색의 질척한 마기가 모여든 앞발이 새빨간 검기에 닿자 서로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마기를 잡아먹을 듯 덤벼드는 검기가 결국 내 검은 가죽까지 먹어치워 오른손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곧 다시 마기에 뒤덮인 오른손은 제 형상을 되찾아갔다.

내가 검기를 버텨낸 것이 놀라웠을까. 데미안이 그물처럼 검기를 뽑아내어 전방을 향해 발사했다. 그런 촘촘한 검기에게 최대한 사지를 뻗어 움켜쥐었다.

사지가 부서지고, 머리가 우그러지고, 몸체가 갈려 나갔다. 그래도.


[부활하셨습니다.]


곧 돌아온 발로 바닥을 박차 데미안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데미안이 재빨리 검을 휘둘러 나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왕녀 무리에게도 몇 개의 검기를 날렸다.

그것을 보면서도 난 데미안에게 더욱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인지가 빨라져 모두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내 세상 안에서 데미안만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데미안과 나 사이를 좁히는 데는 두 개의 목숨이면 충분했다. 데미안이 그런 나를 보며 약간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자신의 장검을 빠르게 횡으로 그었다.

난 그를 피하고자 옆으로 굴렀다. 가죽을 얻은 뒤로 남의 공격을 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자 데미안은 내가 구른 궤적을 예측해 그 위로 검을 내리찍었다.


-서걱.


약간의 삐거덕거림은 있었지만 끝내 내 다리가 잘려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위험하다. 그런 직감에 서둘러 내 손으로 머리를 박살 냈다.


[부활하셨습니다.]


급격히 재생한 다리로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데미안의 목 밑으로 내 손을 들이밀었다. 그런 내 시도가 무색하게 데미안은 슬쩍 머리를 뒤로 빼내 손을 피하더니 다리로 내 다리를 걷어찼다.

그 미묘하게 강한 충격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오러로 자신의 몸을 강화했다고 하나 검기보다는 약했다.

그대로 내 손을 데미안의 몸통으로 찔러 넣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반대 손으로 단검을 뽑아내 손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곧 데미안은 서로의 저항을 이용해 내 팔을 검처럼 비틀어 튕겨내고는 장검으로 내 심장을 찔렀다.

기회다. 확실히 나를 죽이려는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데미안을 붙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손을 꽉 쥐자 데미안의 손이 찌그러졌다.


-서걱.


데미안의 단검이 자신을 속박하는 내 손목을 베어냈다. 곧 부활과 함께 신체가 재생했으나 이미 데미안은 거리를 벌린 뒤였다.

아쉽다. 그래도 이미 내 우세였다. 적은 날 죽이지 못하지만, 나는 적의 한쪽 팔을 가져왔으니까.

서로가 대치하는 짧은 시간을 살려 주위를 둘러봤다. 데쿠스 왕국의 기사와 클라우스, 줄리엣이 최선을 다해보고 있었지만 수적인 열세는 당해내지 못해 하나씩 죽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모자란데. 내 특징을 눈치챘는지 데미안은 거리를 좁히지 않고 검기만을 날리고 있었고, 그런 눈먼 검기가 가끔가다 아군을 집어삼켰다.

어쩔 수 없지. 난 내 본능이 시키는 대로 내 몸 안의 열망을 풀어헤쳤다.


-크오오오오!


갑자기 튀어나온 괴성에 모두의 움직임이 짧은 순간 멈췄다. 왕녀 같은 민간인은 공포로 몸을 떨고 있었고, 기사들도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지 움직임에 어색함이 깃들었다.

그렇지만 내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날카로워진 청각이 내 바람이 오고 있음을 정확히 인지해주었다.


-쿵. 쿵. 쿵. 쿵.


점점 더 크게 들리는 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쏠린 순간, 드디어 원하던 놈이 찾아왔다.


-크오오오오오!


연회장의 벽이 부서지며 언뜻 보이는 익숙한 검은색 가죽. 성난 그 목소리가 나를 갈구하고 있었다.


“뭐, 뭐냐! 아니, 상관없다. 빨리 저놈들을 죽여라, 데미안 경!”


지그문트가 잠시 정상적으로 되었다가 다시 맛이 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데미안이 남은 기사들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몇 개는 막을 수 있었지만 두 손으로 새어 나오는 물을 막을 순 없었다. 기사들도 필사적이었으나 서서히 그 수가 줄어 끝내 단 세 명만이 남게 되었다.

빨리, 빨리 자식아.


-쿠구궁!


드디어 녹스가 모든 벽을 허물고 자신의 몸을 연회장에 들이밀었다. 그것을 확인하곤 클라우스를 쫓을 때처럼 골격을 고치며 네 발을 땅에 디뎠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한층 커지던 몸은 지난번 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로 변해갔다. 그래 봤자 녹스에 비하면 코털만 하겠다만은.

눈길을 돌려 옆을 보자 하단을 찢어 미니 드레스처럼 옷을 고친 줄리엣이 나에게 뛰어올라 등에 안착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이 주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내 몸에 다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녹스와 바통 터치를 하듯 녹스가 부순 벽으로 빠져나갔다.


-쿠어어!


녹스가 열심히 분노해봤지만, 나는 이미 훌쩍 떠나버린 뒤였다. 결국 녹스는 내 의도대로 주위에 있던 스트라스 왕국 기사들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쿵쿵 울리는 소리를 뒤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줄리엣이 털 갈퀴 같은 마기를 움켜쥐고는 운전대처럼 신나게 쥐고 흔들었다.


“와! 죽인다, 죽여! 아저씨, 달려!”


그런 줄리엣의 행동에 다른 사람들도 마기를 더듬거리며 움켜쥐었다. 그 묘하게 기분 나쁜 감촉을 느끼며 나는 시몬과 알마가 머물렀던 여관으로 달려갔다.

수도에는 이미 마수가 침범해왔는지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마수를 피해 도망치고, 남아있던 병사와 경비병들이 애를 쓰며 주민을 보호하고 있었다.

정작 지금 가장 필요한 기사들은 권모술수를 하느라 이곳에 없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빠르게 달려 여관 근처에 도달하자 유독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연달아 터지는 폭발 소리, 그리고 끼익 움직이는 쇠의 마찰음이 울렸다.

그곳으로 발을 돌리니 팔과 다리에 기계 장치를 차고 몸에 갑옷을 두른 알마가 보였다. 거대한 다리 형태의 기계 장치는 주위의 마수들을 날리고, 손에서는 폭발이 일어나 붙잡은 마수를 터트렸다.

곧 자잘한 마수를 모두 해치운 알마가 나를 보더니 입술을 씹으며 덤벼들었다.

아니, 잠깐만. 입을 벌렸으나 성대 구조가 다른지 그저 그르렁대는 소리만이 들렸다. 곧 알마가 내 갈퀴를 붙잡고 폭발을 일으켰다.

고개가 살짝 돌아가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세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 나를 쓰다듬으며 줄리엣이 소리를 질렀다.


“알마! 미쳤어?!”

“...줄리엣?”


* * *


말을 못하는 나 대신 줄리엣이 대강 설명을 해줬다. 그러자 알마가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이게 한스라고?”

“그래. 아저씨 맞아.”


내가 맞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자 어느새 알마 옆으로 다가온 박스, 그러니까 시몬이 중얼거렸다.


“아니, 예전에 평범한 사람이라며.”


잠깐 멈칫하던 알마와 시몬은 이내 나를 둘러보며 자기들끼리 수군댔다.


“와, 알마. 이거 보여? 이 농밀한 마기?”

“게다가 인간이 마수로 변한다고? 그런 예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심지어 털 같은 마기라고! 이걸 연구하면 어쩌면 마수에 관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몰라!”


잔뜩 흥분하며 옆으로 빠지려는 그들에게 줄리엣이 일침을 가했다.


“헛소리 말고 빨리 올라타기나 해! 버리고 가기 전에.”

그러자 알마와 시몬이 조용히 내 등에 올라탔다. 시몬은 어떻게 탈까 싶었는데 집게처럼 내 털을 콕 집어서 달라붙은 뒤 조금씩 올라갔다. 으아. 기분 더러워.

그 둘이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바깥을 향해 달렸다. 그러는 내 귀에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그 특이한 갑옷, 혹시 스트라스 왕궁 마법사 알마님입니까?”


오랜만에 입을 연 리타의 목소리가 톡톡 튀었다. 그런 리타에게 알마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그거 신기하다. 만지고 싶다.”

“...안 된다.”


중간에 클라우스가 끼어들며 약간 완화된 분위기의 편승해 왕녀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마법사 알마라고?”

“그렇습니다. 안젤리나 공주님.”

“오래전에 스트라스 왕국을 떠난 줄로 알았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잠깐 볼일이 생겨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게 한스와 관련된 볼일이더냐?”

“...그렇습니다.”

“흠, 대충 어떤 건지 알겠구나.”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대신 리타가 계속 알마에게 찝쩍대고, 클라우스가 끊임없이 알마에게 달려들었다.

털의 감촉으로 그들의 들썩임을 느끼며 성 외곽을 향해 뛰었다. 거의 끝까지 도달했을 때, 내 앞에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입은 옷으로 봐서는 슬럼가의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어린 아이들이었고, 선두에는 예전에 만났던 나와 닮은 자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향한 내 시선을 받은 그 사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고 후방으로 빠져 나에게 다가왔다. 왠지 겪었던 일 같은데?

사내가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섬광!”


태연히 소리치는 사내를 잠깐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무슨 게임처럼 검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내게 날아왔다.

나는 피하려고 발에 힘을 주려다가, 내 위에 탄 사람들을 생각하곤 담담히 그것을 맞았다. 굉장히 셀 것 같은 외견과는 달리 데미안의 검기만도 못한 그 공격은 이내 빛을 잃어버렸다.

그런 모습을 목격한 사내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망할. 출력이 예전만큼만 됐어도.”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사내에게 줄리엣이 소리쳤다.


“야! 어따 대고 칼부림이야!”

“응?”


* * *


어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똑같은지. 사내는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일행도 태워줄 수 없냐고 물었고, 그에 줄리엣이 선심 쓰듯 말했다.


“좋아. 대신 대가는 받을 거야.”


오랜 용병 생활의 노하우로 줄리엣이 그들에게 적절한 대가를 제시했다. 그러자 사내가 망설임 없이 품에서 돈을 꺼내 보여주듯 흔들었고, 그들은 나에게 탑승할 수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어린애라 그런지 내 털의 감촉을 맛보며 꺅꺅 소리쳤다. 졸지에 장난감이 되어버린 나는 최대한 빨리 성 밖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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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세상의 끝 18.06.29 75 0 13쪽
51 준비 18.06.28 71 0 13쪽
50 이야기의 시작(2) 18.06.27 83 0 13쪽
49 이야기의 시작 18.06.24 87 0 14쪽
48 '나' 18.06.23 114 0 15쪽
47 전쟁(3) 18.06.22 80 0 12쪽
46 전쟁(2) 18.06.21 85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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