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저승사자로 산다는 것
김혁은 곁눈으로 소녀를 슬몃 보았다. 거짓말을 하거나 그래보이진 않지만 환상 짜는데 일가견이 있는 악마라면 또 모르는 일이다. 이 모든 게 다 환상이라면?
“근데 저승사자들 중에 여자는 너 하나야?”
“아뇨. 한명 더 있어요. 엄청 사나운 애.”
“사나운 애?”
“맨날 선배님이 남잔지 여잔지 모르겠다고 하던 애에요. 오, 그앤 엄청 무서워요. 맨손으로 바위도 가루로 만들 것 같이 힘이 그냥”
“뭐 저승사자들의 힘이야 다 세잖아.”
“아 걔는 상상을 초월한다니까요. 악마새끼도 걔한텐 제발 좀 나가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니까.”
다른 저승사자들을 놔두고 그나마 여자다운 애를 보낸 이유가 뭘까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근데 왜 너를 보냈지?”
“글쎄요. 한가한 애가 나뿐이었나 보죠 뭐. 난 환상 속에 있었으니까. 아니면 제가 사람 찾는 덴 도사거든요. 한참동안 아이돌들과 숨박꼭질을 많이 해봐서. 한때 빠순이의 재능을 높이 사서일까요? 헤. 결국 찾아냈잖아요. 이렇게요.”
“그렇군. 근데 넌 몇 살이지?”
“열 일곱이요.”
열 일곱 살과 뭔가 깊은 인연이 있는 건 확실하네 ... 만나는 족족 열 일곱살이라고 말하다니. 이것도 참 이상한 우연이다.
“그나저나 우선 리스트를 찾아야 해요. 그걸 찾고 기억은, 일단 번개 한번 맞아주시고 그래도 안 돌아오면... 지옥으로 돌아가는 건 ... 나머진 그때 가서 생각하죠 뭐. 미리 걱정할 건 없으니까 번개 맞으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몰라요.”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니다?”
“워낙 저승사자가 기억을 잃는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거든요. 악마새끼도 그런 일은 수천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한숨을 푹푹 쉬어요.”
“그 새끼란 말은 좀 빼면 안 될까? 그 예쁜 입에서 자꾸 새끼 새끼 그러니까 이상하다.”
예쁘다는 말 때문인지 소녀가 얼굴을 붉혔다.
“네.”
“아 근데 몸이 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지 혹시 알아?”
“음 우리는 원래 밤엔 몸을 자유자재로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소녀가 눈앞에서 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나타났다.
“그렇군.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지?”
“음, 정신을 집중하고 힘을 빼면 되는데 날 때랑 똑같아요. 날기는 하잖아요,”
“그건 본능적으로 그냥 되던데?”
“이것도 본능적으로 거의 돼요. 근데 뭔가 좀 이상이 있는 모양이네요.”
“그건 아직 조절이 안돼. 아 그리고 오라? 그건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게 정상인가?”
“네.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다 있어요. 색깔도 다양하고. 사람마다 그게 다 달라요. 죽어가는 사람이나 영혼이 썩은 사람은 오라가 검죠. 우리가 찾아다니는 리스트 속의 사람들은 거의 검은 오라의 소유자들이고요. 그건 보여요?”
“응, 처음엔 안 보이더니 이제 많이 보이고 있어.”
“그럼 뭔가 회복되고 있다는 징조 같네요. 다행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미래를 본다고요? 그건 안 되는데요? 미래가 보여요? 우와, 혹시 초능력까지 얻은 거예요”
소녀는 큰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아니, 누가 나에 대해 쓴 책을 보니까 미래를 예지하는 것처럼 보여서.”
“에이 난 또, 그거야 아마도 허세부린 걸 거예요.”
“그런 건가?”
“아~아, 그래서 오라라는 이름도 거기서 알게 된 거군요. 보통 처음 본 사람들은 그게 뭔지 잘 모르는데. 난 또 그건 기억이 나는 건가 했네요. 와, 근데 선배를 주인공으로 한 책도 있어요?”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다보니까. 그렇더라고.”
“이제 보니 저승사자계의 스타셨네요. 어? 근데 이상하다. 우리는 웬만하면 데리고 올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저승사자인 걸 밝히지 못하게 돼 있는데? 정말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음.... 그래? 내가 초창기 때 멋모르고 막 그러고 다닐 때라서 그런 거겠지. 40년 전에 만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소녀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악마새.. 악마도 초반에 환상 짜기의 부작용을 몰랐다고 하는 거 보니까.”
“하나도 기억이 안나니 그 모든 게 다 남의 얘기 같기만 하네. 난 사실 내가 저승사자라는 것도 못 믿겠어.”
“음 저는 차라리 과거 일이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났으면 좋겠어요. 찬수 오빠나 학교 다니던 거 다.”
“왜 그렇지? 별로 행복하지 않았어?”
“음.... 좀 그랬죠. 저도 그 기계에 한번 들어갔다 나올까요?”
“니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지금 얼마나 답답하고 미칠 것 같은 줄 아냐? 뭐 하나라도 빨리 생각났으면 좋겠는데 하나도 모르겠으니 돌아버리겠다고. 바보가 된 것 같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 넋 놓고 있은지가 벌써 얼만지.”
“별로 안 됐는데요? 아 참 여기만 있었죠. 지옥이랑 여기랑 시간 흐름이 달라서요.”
“시간 흐름이 다르다고?”
“지옥에선 잠깐이 여기선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한달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땐 1년, 10년도 금방 가요.”
또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생각의 속도로 말을 하고 말이 끝나고 나서야 깊은 의미, 더 넓은 범위를 알아차리는 유형인가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을 먼저 넓고 깊게 한 다음에 한 마디를 내뱉는 것과 반대로.
“민하진이라고 했지?”
“네 선배님!!”
“고맙다. 네 덕분에 그래도 좀 뭔가 답답함이 풀렸어. 가슴과 머리가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 !”
소녀의 큰 눈에서 눈물이 글썽이는 게 보인다.
“왜,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무척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여자의 눈물은.... 왠지 그렇다.
“아니요. 제가 선배님을 만난지 어언 10년인데 고맙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서요.”
“헙, 10년 동안 고맙다는 말을 한번도 안 했다고?”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물이 턱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여자나 울리는 나쁜 놈이 된 것 같다.
“음, 내가 혹시 후배들이나 괴롭히는 못된 저승사자였던 거야?”
“뭐 못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잘해주는 편도 아니었어요. 그저 서열 2위답게 군기 잡는 존재? 카리스마 짱, 가오 짱, 짱짱 짱답게 살겠다 뭐 그런 거였죠. 그래도 어린 나이에 저승사자가 됐는데 혹시 온통 우락부락한 아저씨들만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찬수 오빠보다는 못하지만 헤헤, 또래 오빠가 있다는 건 엄청 좋았어요.”
소녀는 슬며시 미소 짓고 있었다. 찬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좋은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날 만큼? 죽은 지 10년이나 됐는데 참나. 왜 아이돌 가수 그만 그리워하라며 알밤을 먹였는지 알 것 같았다.
“찬수라는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다시 만난 적 없어? 유명한 가수였으면 지금도 종종 방송에 나올 거 아니야.”
“그게 갑자기 사라져버렸어요. 은퇴를 했는데 어딘가 은둔해 있다고도 하고 마약중독으로 죽었다는 소문도 떠돌고 이민 가서 잘 산다는 소문도 있고 소문만 무성해요. 악마새, 아, 악마한테 좀 보여달라고 해도 죽어도 안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제가 우연히 찬수 오빠를 짜잔 만나게 된 거죠. 정말 영화처럼. 그게 제 환상의 시작이었어요.”
소녀는 고개를 떨구며 다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침묵. 둘 다 각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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