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화 리스트의 비밀2
“직접 눈으로 보고도 못 믿어요? 당신 앞에 있는 존재가 사람처럼 보여요? 저승사자라고요. 타임머신에 들어갔다가 그게 작동되는 바람에 기억상실증에도 걸리고 이 리스트는 잃어버려서 계속 찾고 있었다구요. 그게 이동박스에서 발견됐다면 답이 뭐겠어요?”
은성은 어떻게든 리스트가 타임머신에 의해 옮겨졌음을 명석원이 믿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명석원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네 혹시 이번 일로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건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저승사자라고? 그 말을 믿어? 자넨 과학자라네.”
“그건 저희 엄마가 먼저 절 납득시켰어요. 제 엄마는 40년 전에 만났던 저 저승사자를 똑똑히 기억해냈거든요.”
“뭐? 오박사까지? 기가 막히는군. 여자들이란 이래서 ...”
“이게 여자들과 무슨 상관인데요?”
하진이 끼어들었다. 그러다 김혁 쪽을 바라보고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진 않았다. 박사님들의 대화에 끼어들 때가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이 타임머신은 지난번 우리 실험 이후로 작동 된 적도 없잖아. 이건 그때로부터 한참 지나서라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김은성은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대답했다.
“사실 제가 혼자 있을 때 잠깐 작동시켰었어요.”
상사 모르게 정부 재산인 실험 장비를 개인이 맘대로 작동시켰다는 건 분명 문책감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제정신인가? 이걸 함부로... 징계당할 사람은 따로 있었구만. 아무리 자네 뒤에 유명한 어머니가 있다 해도 이번 일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럼 그냥 못 넘어가지. 연구소를 떠날 각오는 하고 그런 거겠지?”
“그래야 한다면 그러죠.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당신은 날 죽이겠다고 총까지 쏘았고 지금 연구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면서. 이 모든 게 당신 책임인데요. 당신이야말로 각오를 단단히 해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아니군요. 당신은 그 전에 지옥으로 가야겠군요. 그 리스트에 이름이 있는 걸로 봐서는.”
지옥 얘기를 꺼내자 명석원이 김혁을 바라보고는 소리쳤다.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잖아. 난 아무 죄도 없어.”
이에 김은성이 대꾸했다.
“당신이 책임자잖아요. 또 누가 있다는 거예요? 요즘 사라지는 연구원들도 당신이 그렇게 한 건가요?”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사라지는 사람들은 그 리스트에 있던 사람들이었어. 나와 아무 상관도 없어. 난 아무것도 몰라.”
연구소 연구원들이 사라지는 이유는 명석원도 정말 모르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 은성은 김혁을 바라보았다. 김혁이 지난번 목격했던 일을 말해야 할 때인 모양이었다.
“뭐 이 리스트에 오른 건 이번 일보다는 다른 일들 때문일 가능성이 큰데. 여태껏 쌓여 왔던 죄과가 리스트를 만드는 거니까. 그건 지옥의 기준이고. 이유는 나도 모르니까 지옥 가서 듣자고. 어쨌든 내가 지난번에 본 걸로는 오늘 이 사태의 책임은 당신이 지는 게 맞지. 지난번에 지하동에서 굉장히 느리고 이상한 남자 하나를 잃어버리고 몰래 찾아다녔지 않았던가? 그 사람이 좀비 바이러스를 가진 거였지?”
김혁의 말에 명박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 그걸 어떻게...”
“내가 누구라고? 저승사자라니까. 그때 다 봤어. 가만, 아, 뭐냐, 이렇게 되면 저승사자 최초로 법정에 가서 증언도 해야 되는 거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데요. 선배님. 지금 농담이 나와요?”
하진이 김혁의 어줍잖은 농담에 핀잔을 주었다.
“여기 저질러 놓은 게 하도 무시무시한 일이라 그냥 지옥에 데려가면 여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돼서 말야.”
“싫어.내가 왜 지옥을 가. 난 누구보다 몸 바쳐 열심히 일 했던 사람인데 내가 왜 지옥에 가야 하지?”
“내가 데리러 온 사람들 중에 자기가 지옥갈만하다고 실토하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어. 물론 지옥 가서 들어보면 다 지옥갈만 한 사람들이었고. 영혼이 검게 썩을 정도면 뭐. 지은 죄가 많으니 지옥행 리스트에 오르는 거거든. 당신 뒤에는 완전 시커먼 검은 오라가 있다구.”
명석원이 겁에 질린 얼굴로 제 몸을 두리번거렸지만 눈에 보일리는 없었다. 그때 문 쪽에서 뭔가 무거운 것을 털썩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갑작스런 소리에 모두가 놀라 문쪽을 바라보았다. 좀비?
검은 옷차림에 짧은 머리를 한 늘씬한 미소년 같은 소녀가 서 있었다. 발치에는 머리통은 형체도 알 수 없게 바스라진 연구원 몸통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 주은정.”
김혁이 먼저 소리쳤다. 짧은 머리 소녀는 실내를 한바퀴 돌아보고는 말했다.
“다들 여기 모여서 뭘 하는 건데? 지금 노닥거릴 때가 아닐 텐데. 이러니 나까지 출동시키게 만들지. 오랜만이네요. 선배님.”
짧은 머리 소녀가 김혁을 향해 고개를 짧게 까딱이자 김혁이 대꾸했다.
“주은정, 니가 여긴 또 웬일이냐? 너까지 보낼만큼 여기 상황이 심각한 거야?”
김혁이 주은정에게 친근하게 계속 말을 걸자 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선배님, 은정이는 단번에 알아보네요? 쟤는 기억이 나요?”
“그럼, 지옥의 천하장사 주은정을 내가 왜 몰라?”
김혁은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하진은 아직 김혁이 기억이 돌아온 걸 모르고 있는 상태니 저 혼잣 생각에 본인은 처음 봤을 때 몰라봤으면서 주은정은 단번에 알아본 것에 섭섭함을 느낄 게 뻔했다. 이제 연극을 끝낼 때가 왔다. 김혁이 막 말을 하려는 찰나 주은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민하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냐. 이 좀비가 저 연구소 밖을 휘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니까?”
“뭐? 연구소 밖에를?”
이번에는 명석원이 소리쳤다.
“이 좀비를 발견하지만 않았어도 난 지옥에서 편하게 쉬고 있을 거였다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에 좀비라도 하나 더 찾았어야지.”
주은정은 날카로운 눈으로 김혁과 하진을 차례로 쏘아보았다.
“노닥거리긴 누가 노닥거려? 지금까지 힘겹게 좀비들을 몰아넣고 이제야 리스트를 찾았는데. 저 하얀 머리 아저씨가 총 들고 설치는 바람에 이러는 거라고. 뭘 알고나 말해.”
하진이 주은정에게 뾰족하게 구는 건 단지 노닥거린다는 말 때문은 아니라는 걸 김혁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 지옥에서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거의 말도 안 트고 지내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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