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악마의 환영식
좀비떼들이 갑자기 덮쳐왔다. 얼굴에 살점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가고 피칠갑을 한 흉측한 몰골이었다.
“으아아, 뭐야!”
“아앗! 깜짝이야.”
주먹을 마구 휘둘러대는 민하진, 주은정, 김혁 사이로 사라지는 좀비 환영들. 역시 악마다운 환영식이었다.
“간 떨어질 뻔 했잖아!!!”
주은정이 버럭 소리치자 허공에 혼자 남은 좀비 하나가 악마로 변했다. 악마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천하의 주은정님께서도 그럴 때가 있으셔요?”
“이런 호러스러운 비쥬얼은 네 취향이냐? 저질스럽기는.”
악마는 주은정을 살짝 흘겨보고는 김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민하진이 조용한 건 제 살이 다시 흰 피부로 되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팔을 이리저리 걷어 보고 하면서 재차 확인중이었다. 역시 이런 ‘가족적인’ 모습이 익숙한 것이 지옥에 돌아온 실감이 난다.
“맞아요. 정말 징그럽게 생기긴 했네요.”
뒤늦게 민하진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피부색은 본래대로 돌아왔지만 기묘한 존댓말은 너무도 연극적이면서도 어색했다. 벌칙의 여파는 ‘악마님’이란 호칭뿐만 아니라 평상시 쓰지도 않던 존댓말까지 끌어내는 모양이었다.
“야 민하진, 너 진짜 꼴불견이다.”
“참견 마셔.”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악마는 김혁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우리의 김혁이 돌아온 거지? 뭐 생각 안 나거나 그런 건 없지?”
“참 근데 선배님, 기억은 언제부터 돌아왔던 거예요?”
민하진이 살짝 흘겨보며 김혁에게 물었다.
“어? 어.. 그거는...”
김혁의 곤란한 상황을 면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때맞춰 악마의 눈빛이 반짝거리는가 싶더니 곧 ‘눈물불꽃쇼’를 하기 시작했다. 눈물인지 불꽃인지 모를 것들이 마구 사방으로 튀었다. 아아앙!!
주변에 있는 존재들이 ‘앗 차거’와 ‘앗 뜨거’를 동시에 내뱉게 하는 악마만의 울음 표현이었다.
“그만, 그만, 그만 좀 해. 진짜 못 봐주겠네.”
주은정은 손으로 얼굴 앞쪽을 방어하며 멀찍이 물러났고 민하진도 몸을 피했다. 김혁만 제자리에서 인상을 잔뜩 구기고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과 뜨거운 불꽃이 동시에 얼굴에 계속 튀었다. 눈물불꽃쇼도 오랜만에 체험하니 기분이 새로웠다.
악마는 이내 눈물을 뚝 멈추고 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섭섭하네. 난 이렇게 반가운데 넌 내가 안 보고 싶었던 거야? 얼마만에 온 거야. 정말. 나 안 보고 싶었어?”
“징그럽게 왜 이래?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면서.”
“흥, 칫!”
처음 지옥에서 봤던 아저씨 같던 악마는 저승사자들을 청소년으로 대거 뽑고 나서는 본인도 이제는 거의 소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어려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는 짓은 점점 더 어린애 같아지고 있다. 저승사자들이 생긴 건 어려도 연차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는 것과는 반비례하는 현상이다.
“보고 싶었다고 해주면 안 되겠냐?”
“안 되겠다...”
악마가 절망한 표정으로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뭐, 쪼금 그립긴 했어. 나도.”
악마가 씨익 웃음지었다.
“그치? 그렇지? 이제나 저제나 언제 오나 계속 기다렸다구.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기억을 영영 못 찾으면 어쩌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그러니까 함부로 이상한데 막 구경 다니고 하는 짓 좀 하지 말라니까.”
“번개 때릴 때 사심 한점 없었던 거 맞지?”
“어? 물론 그럼, 그럼. 뭘 의심하는 거야?”
“아니면 됐고.”
“음....근데 말야. 지금은 우리가 이럴 시간이 없어. 반가운 건 반가운 거지만.”
불리하니까 말 돌리는 것 봐라. 난리법석은 저 혼자 다 부려놓고선.
“그런 게 아냐. 곧바로 돌아가야 돼.”
“왜?”
악마는 미묘하게 아저씨 같은 느낌으로 변해 있었다. 일 얘기를 할 때는 특히 진지해진다.
“일단 잠정적으로 지금 가지고 있는 리스트 임무는 중단하고.”
“왜 뭐 땜에?”
“세상이 위기에 처했으니까. 그게 먼저지. 좀비 바이러스가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거든.”
“그렇게 빨리 그럴 수가 있어? 거긴 인가에서도 엄청 떨어진 덴데?”
“그렇게 됐지. 이제 너희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닐 때가 아냐. 저런 속도라면 좀비들이 엄청나게 불어나고... 휴, 이제 곧 모든 곳이 정지 상태가 될 거야.”
악마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뭐가 그렇게 빠르다는 거야? 입구도 다 막아놨는데 걸어간다 해도 하루는 꼬박 걸어야 할 거리야. 벌써 퍼져나간다는 게 말이 돼?”
“그게 말이다. 좀비에 물린 인간 하나가 차에 탔거든. 연구소 밖으로 나갔어.”
“그러니까 어떻게? 좀비들이 운전도 해? 그런 거야?”
“그냥 보여주는 게 낫겠지.”
악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영상 하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훤히 밝은 황무지에 얌전히 묶여 있는 검은 무리들이 보였다. 김혁이 보일 때마다 악다구니를 쓰고 애원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저건 솔직히 저래선 안 됐어. 김혁. 너는 리스트에 없는 인간들을 죽게 놔둘 권리가 없잖아.”
“그래도 저런 인간들을 그냥 놔둘 순 없었어요.”
민하진이 먼저 끼어들었다.
“맞아. 그냥 뒀으면 연구소 안에 사람들을 다 죽였을 거야.”
주은정도 한마디 거들었다. 김혁은 저때 남아 있는 연구원들을 보호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죄 없는 연구원들을 죽인 것에 대해 벌을 주고 싶었었다.
“그래, 뭐 시간도 별로 없었고 지금 그걸 따지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잊지 마. 제멋대로의 단죄는 저승사자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좀비들이 어딘가에 있는 걸 뻔히 알면서 좀비들에게 뜯어 먹히도록 두는 게 직접 죽이는 거와 뭐가 다르지? 암튼 이번엔 넘어가지만 좀더 신중하라고.”
김혁은 묶여 있는 검은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배려를 했어야 한다는 건지. 악마의 핀잔에 좀 마음이 상하는데 영상 속의 풀죽어 있던 검은 무리들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같은 편이 또 온 건가? 아 저런 건 너무 해피엔딩인데 악당들에겐.... 그러나 곧 그들은 무수한 총알세례를 받았다. 허억! 그들은 당혹감과 분노에 찬 표정을 지은 채 죽어갔다.
“어? 뭐야,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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