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길고 긴 낮 5
김혁이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실내 조직원들은 거칠게 술렁거리고 있었다.
“저놈들은 대체 뭐야?”
“어떡하지? 저들이 정말 우리 죽이러 온 걸까?”
“아 젠장. 그냥 당할 순 없어. 모두 이걸 풀고 싸우면 돼.”
“저들이 그냥 왔을 것 같아? 무기도 없는데 뭘로 싸워? 더구나 지금은 누가 좀비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놈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게 생겼잖아.”
“아 씨발 이래저래 죽는 건 마찬가진데...”
“그렇다고 이렇게 손놓고 있다가 죽자고?”
그들의 웅성거림 끝에 강탄이가 조심스럽게 나서서 말했다.
“저들에게 좀비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해주는 건 어떨까요? 저들도 총을 가졌을 거라 어차피 맨주먹으론 상대가 안 돼요. 최대한 못 들어오게 하고 스스로 떠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니까 어떻게?”
“좀비를 직접 보여주고...”
이야기를 듣던 문가를 지키던 조직원은 작은형님과 이제 막 좀비로 변하기 시작한 다른 조직원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저 정도에 겁먹고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냐?”
“적어도 쉽게 들어올 생각은 안 할 걸요.”
마스크맨들이 1층에 들어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시체가 있는데요? 벌써 다 도망가버린 거 아닙니까? 같은 말들이었다.
검은 고치들은 그 목소리들에서 그들이 혹시 다른 일로 왔을까 하는 한가닥 남은 희망마저 버렸다.
“그냥 모두를 풀어주는 게 안 낫겠냐?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가를 지키던 조직원이 넘버쓰리에게 물었다. 넘버쓰리는 탄탄하게 막아둔 폐타이어 방어물을 보며 말했다.
“일단 탄이 말대로 설득해보다가 물러서지 않으면 빨리 풀어주는 걸로 하자. 조직원들이 총맞지 않게 문 주변에 침대를 더 쌓아. 빨리.”
탄이와 조직원은 문가쪽으로 좀비들의 침대부터 먼저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오는 침입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둘은 몸을 더 재게 놀려 비어 있는 침대들을 세로로 세워 병풍처럼 좀비 침대 뒤를 둘러놓았다. 그렇게 하면 폐타이어와 묶인 침대들 틈으로 뭔가 보게 된다 해도 바로 보이는 건 좀비들뿐일 거였다. 마스크맨들의 발 소리가 문가에서 멈추기 전에 가까스로 탄이와 조직원은 세워둔 침대 뒤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폐타이어 문 앞에 당도한 마스크맨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야?”
“안 쓰는 덴가? 출입구가 따로 있나?”
“제가 알기론 없는데요?”
구멍 틈새로 이리저리 안을 기웃거리는 마스크맨들에게 탄이 옆에서 상황을 살피던 조직원이 소리쳤다.
“뭐 하는 놈들이냐?”
“뭐야, 안에 사람이 있는 거야?”
그때 작은형님이 거칠게 몸부림치며 침에 젖은 ‘우어어’ 소리를 냈다. 틈새를 비집고 드디어 좀비를 발견한 마스크맨들이 한마디씩 했다.
“윽, 저건 뭐지?”
“저게 대체 뭐야? 좀빈가?”
탄이 옆 조직원이 다시 소리쳤다.
“너희들은 뭐 때문에 왔지? 여긴 왜 왔나?”
“우리? 일하러 왔지.”
“페기물 처리 전담반”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그들끼리 낄낄거렸다. 조직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곤 다시 소리쳤다.
“여기 들어오면 너희들도 이렇게 된다. 잘 봐둬라. 나 같으면 진짜 얼씬도 안 할 건데.”
이때 강탄이가 거들었다.
“이 사람들도 일하러 갔다가 이 꼴이 된 거다. 좀비 바이러스가 뭔지도 모르고 갔었지. 뭐 느끼는 거 없냐?”
넘버쓰리가 누운 채 천정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를 내버려둬라. 나머지는 좀비가 아냐. 지금 우리는 스스로 좀비가 아닌 걸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폐타이어 너머에서 목소리들이 수근거렸다.
“안에 다 모여 있는 건가봐?”
“왜 도망치지도 않고? 희한한 녀석들일세.”
“어떻게 할까요?”
“해치워 버려.”
구멍 틈 사이로 총구가 끼워지고 총알이 날아왔다. 작은형님의 목에 총알이 박히자 피가 솟구쳐 올랐다.
“저 자식들이...”
강탄 옆 조직원이 잇사이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때 탄이가 소리쳤다.
“쏘지마!! 피가 튀면 안돼. 피 한 방울로도 감염된다고. 저 사람도 좀비한테 물린 다른 사람의 피 한 방울에 닿아서 저렇게 됐어. 우습게 볼 게 아니라니까. 이건 생각보다 무서운 바이러스야. 전염력도 강하고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도 없어. 그 정도 마스크로 된다고 생각했어?”
탄이가 말하는 와중에 작은형님은 마침내 고독한 떨림을 멈췄고 공중으로 치솟던 핏줄기도 잦아들었다. 두 번째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고 마스크맨들도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다른 좀비만 침대 위에서 몸부림쳐대서 침대가 삐걱대며 소음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저희들끼리 소곤거리는 마스크맨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험실에서 탈출한 좀비가 하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럿이었습니까?”
“우리가 늦게 온 탓이지.”
탄이가 다시 대꾸했다. 오늘 따라 어린남자가 말이 참 많다고 김혁은 생각했다.
“너희도 속은 거다. 우리처럼. 우리도 첨엔 그런 줄 알고 연구소에 갔으니까. 그냥 좀비바이러스가 퍼지기 전에만 처치하고 오면 된다고 생각했지. 우리 꼴을 봐. 우리도 다 잘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멀쩡하던 사람이 좀비가 됐잖아. 1층에서 봤지? 그는 지난 밤에 좀비로 변했지. 이 사람들은 오늘 아침까진 멀쩡했었는데. 너희가 여길 들어왔다 돌아갔을 때 무사할 거라고 확신해?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걸. 올 거면 제대로 된 방역장비를 갖추고 다시 오든가.”
“우리는 예방 백신을 맞았다.”
여유로운 마스크맨의 말에 검은 고치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백신이 있다고?”
“젠장, 그런 게 있는데 우리한테는 왜 안 줬어. 그것도 아까웠나?”
“야, 우릴 이런 데다 짱박아둔 것만 봐도 말 다했지. 아까 뭐랬어? 폐기물 전담반? 우린 원래 이렇게 쓰고 버릴 작정이었던 거야. 개새끼들.”
침대에 묶인 조직원들이 침대를 들썩이며 여기저기서 불만을 쏟아낼 때 김혁은 생각했다. 또 누군가가 애꿎은 희생양들을 속여 죄를 짓도록 내몰았다는 것을. 연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무슨 예방 백신이란 말인가. 관여했던 연구원들조차도 그 좀비 바이러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건만. 대체 저들에게 놔준 백신은 무슨 성분일지 궁금했다.
마스크맨이 구멍을 통해 다시 안을 살피고는 저희들끼리 떠들어댔다.
“좀비라는 것도 그냥 죽긴 하네요. 우리가 알던 좀비들처럼 죽었다가 벌떡 일어나는 건 아닌가본데요?”
“굳이 안에까지 들어가서 손댈 필요 없겠어요. 다른 출구가 없다면...”
마스크맨들은 더 작은 목소리로 그들끼리 소곤대더니 모두 물러갔다.
“뭐야? 가는 건가?”
“정말?”
탄이가 창가로 다가가서 밖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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