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종말의 시작1
김혁은 바닥을 통과해 바로 1층으로 내려가서 허공에 뜬 채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스크맨들은 각자 흩어져 1층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냥 돌아갈 생각은 아닌 듯 했다. 어떤 사람은 문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어떤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차까지 달려갔다.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조직적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밖에선 타이어가 펑크 난 검은 고치들의 차에서 기름을 빼내 모으고 안에선 빈 술병들과 불에 탈만한 것들을 모았다.
그들은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핏자국이나 짱돌의 시체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기이한 문양 같은 것. 거기 놓여 있는 한 개의 의자나 이불더미 같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작은형님이 짱돌 총에 묻은 피 한 방울로 감염된 게 맞다면 숙주를 떠난 바이러스도 일정 시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모든 건 간밤의 일이니 지금쯤이면 안전해졌을지도 모르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 좀비 바이러스가 다 죽어버린 건지 그들이 착용한 마스크와 장갑만으로 괜찮을지는 악마의 눈으로나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현재로선 가짜 백신이 저들의 일사분란함과 거침없는 행동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진짜 좀비 바이러스의 침투는 막아줄 수 없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김혁의 마음은 점점 더 심란해졌다. 저 핏자국들과 저 시체가 마스크맨들을 좀비로 만들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기도 했고 검은 오라를 달고 다니는 저들에게서 공포의 냄새가 전혀 맡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계속 신경쓰였다. 죽음과 관련한 공포를 상실한 자들을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에 속했다. 타인의 죽음이든 자신의 죽음이든 그 앞에서 태연한 척 가장해도 인간이라면 마음 깊은 곳에선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었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다. 죽음에는 항상 공포가, 망설임이, 후회가 공존한다. 저승사자가 된 이후로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지만 이렇듯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양 취급되는 현장은 처음 보았다.
마스크맨들은 죽음을 보는 것도, 죽음을 실행하는 것에서도 거리낌이 없다. 그런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랬다. 행동에 주저함도 없고 남몰래 공포의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다. 가짜 백신의 작용 때문일지 아니면 폐기물 전담처리반이라는 그들의 말처럼 이런 일들이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라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지금 공포 그 자체, 어둠이 되어 더 연약한 인간들을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창문을 막아뒀던 합판들도 모두 옮겨지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테이블과 의자들도 모아져 잘게 바수어졌다. 마지막에는 타단 만 장작이나 조직원들이 2층에 올라가기 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각목 따위들까지도 남김없이 긁어모아졌다. 그들은 마치 그 건물에서 앙상한 껍데기만 남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수북히 모아진 탈 것들은 짱돌의 시체 위에 쌓이고 남은 것들은 2층 입구로 날라졌다. 문가에 선 자가 우두머리인 듯 보였다. 그는 문가에 선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 연기를 후, 길게 내뿜어내며 조직원들의 움직임을 차갑고도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스크를 벗어낸 그의 얼굴은 표정이 없는데 그것이 마치 이 모든 일이 따분하고 성가신 일일 뿐이라는 듯한 무심함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비를 피해 들어온 폐가에서 한기를 가시기 위해 모닥불이라도 피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 의심도 없는 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없다. 저들이 따르는 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깰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백신 따위는 없다고 말해주면 조금쯤 공포에 떨려나? 조금이라도 그 믿음에 의혹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으려나?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저들을 설득할 기회를 준다고 해도 김혁은 저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저들의 죽이고 죽는 릴레이가 언제까지 되풀이 될런지도 알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검은 조직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를 잔인한 릴레이. 지금 저들이라고 또 다른 조직에게 죽임을 당하지 말란 법은 없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죽음의 릴레이를 끝낼 방법은 저들을 맘대로 부리는 결정권자의 멈추라는 말 한마디뿐일 지도 몰랐다. 그러나 비밀을 지켜야 하고 남모르게 좀비 바이러스를 처치해야 하는 자들로서는 결코 쉽사리 멈출 수도 없으리라. 아니, 멀리까지 상상해볼 필요도 없이 지금 저들로 인해 결국 세상은 좀비 바이러스로 뒤덮이게 될 거다.
김혁은 문득 자신이 지금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는 걸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악마는 저승사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너희들뿐이라고 했었다. 결국 이익과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만으론 멈추기 어려운 일임을 악마는 알고 있었던 거다.
공포심도 없고 칠흑처럼 검은 오라를 달고 돌아다니는 자들, 좀비보다 더 끔직한 존재들이 저기 있다. 김혁은 당장이라도 저들을 한방에 쓸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지옥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한 살기(殺氣)였다. 살기는 살기를 깨우는 법. 아직도 낮인 것이, 아직 밤이 멀었다는 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라 볼 수밖에 그 어느 것도 할 게 없었다. 이제 정말 모든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인가? 깊은 절망감에 처박히는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며 김혁은 다시 천정으로 몸을 솟구쳤다.
2층의 검은 고치들은 마스크맨들에 비하면 너무도 질박한 편이었다. 2층에 진동하는 공포의 냄새가 그나마 이들이 좀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강탄이는 창밖을 살피다가 자기들 차에서 기름을 빼내는 자들을 발견하고는 조직원들에게 낮게 소리쳤다.
“저들은 돌아가지 않아요. 불을 지르려 하고 있어요.”
다른 조직원도 재빨리 몸을 낮춘 채 창가로 다가가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죽일놈들. 좀비부터 보여준 게 잘못이야. 우리 모습을 먼저 보여줬어야 한다고. 그럼 저렇게까지 안 할 거야.”
“그럴까요? 우리도 멀쩡한 사람들을 쐈는데....”
탄이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민철이는 좀비였을까, 형?’하고 묻던 그때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불타는 노을빛 아래 생각에 잠겨 있던 어린 남자의 얼굴에 얼비친 붉은 슬픔이 얼핏 탄이의 얼굴에 어린 듯도 했다.
그 말엔 조직원도 별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넘버쓰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이런 건 무의미합니다. 우리도 살아야죠.”
“아직,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해요.”
탄이도 옆으로 가 반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조직원은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그런 분노가 고스란히 탄이에게 쏟아졌다.
“어쩌겠다고? 저들은 기다릴 맘이 없어. 저놈들에게 우린 좀비라고. 아니라고 말해봐야 안 믿어! 저걸 봤잖아.”
조직원은 좀비 침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침대를 흔들어대며 몸부림치는 좀비를.
“하지만...”
강탄이는 말을 멈추고 검은 고치들을 둘러보았다.
“여긴 안엔 탈만 한 게 별로 없어서 입구만 태운다면 견딜 수 있을지도 몰라요.”
“유독가스는 어쩌구, 입구가 불타고 나면 저들이 쳐들어올 수도 있어.”
침대에 묶여 있던 검은 고치들 중에 하나가 소리쳤다.
“넌 우리더러 이대로 불타 죽으라는 거야? 아니면 꼼짝없이 총 맞아 죽으라는 거야? 이 자식아, 너는 우리가 그냥 다 죽어버리길 바라냐?”
이번엔 듣고만 있던 넘버쓰리가 말했다.
“저들이 불을 지를게 확실하다면 이건 의미가 없지. 모두 풀어줘라.”
“탈출도 어려운데 누군가가 또 좀비가 된다면...”
강탄이는 좀비가 될지도 모를 내부의 위험도 경계하자는 말이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지금으로선 그걸 조심하기엔 바깥의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내는 창문을 제외하고 사면이 전부 막혀 있었다. 침대에 묶인 채 유독가스를 견딘다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무기도 없이 좀비와 싸워야 하는 상황 역시도 난감한 건 맞았다. 아무도 좀비가 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지만.
“저놈들, 우리가 창으로 뛰어내릴 때만 기다리겠지? 낄낄거리면서 총을 쏴 댈 거야. 뛰어내려봐야 총맞아 죽거나 다리가 부러진 채 총맞거나지.”
그때 약간 나이 지긋한 남자가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잠깐만, 저 벽, 저기 강탄이가 앉아 있던 벽 저건 가벽이야.”
“뭐요?”
모두들 그 벽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그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삼면인 시멘트벽들과 다름없이 칠이 돼 있었다.
“내가 큰형님 사무실 공사 할 때도 다 지켜봤던 사람이라고. 저 벽도 원래 공사가 안 됐었는데 여길 침실로 쓰기로 하면서 그때 대충 베니어 판 하나 대고 벽을 세웠지. 부수려고 하면 부술 순 있을 거야.”
“아 그런 건 빨리 빨리 좀 말하라고요. 뭘 망설입니까? 얼른 부수고 나갑시다.”
검은 고치들에겐 갑자기 희망이 생겼다. 모두가 서로 먼저 풀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야 빨리 해. 난 바베큐 되기 싫다구.”
“야, 나부터 풀어줘.”
“왜 너야? 나부터 나부터.”
강탄이와 조직원은 넘버쓰리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최종 결정을 그에게 듣겠다는 몸짓이었다. 넘버쓰리는 별 망설임없이 화답했다.
“풀어라. 우린 여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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