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탈출3
넘버 쓰리는 끝 쪽의 한 사람에게 명령했다.
“저쪽에 그놈들 있나 봐라.”
눈길을 받은 조직원은 넘버쓰리가 고갯짓으로 가리킨 2층 난간 끝으로 몰래 다가가 아래쪽을 살폈다. 그리고 쪼가리 중에 하나를 바닥으로 던졌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아직은 아무도 없습니다.”
김혁이 공중에 떠서 보기에도 아직 그쪽까진 마스크맨들이 아무도 도착해 있지 않았다. 건물의 뒤쪽인데다 뒤로 돌아드는 길에 이것저것 쌓인 게 많아서 헤치고 나가기가 쉽지 않을 듯 보였다.
앞쪽으로는 폐타이어 더미와 부서진 차량들을 돌아가야 하고 뒤쪽으로는 아무렇게나 버린 부자재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가야 했다. 건물 뒤쪽 벽을 마무리 짓기 전에 공사가 중단된 탓인지 이런 저런 것들이 꽤 쌓여 있기도 했지만 벽이 없는 쪽을 이후에도 주로 쓰레기처리장으로 애용했는지 이런 저런 못 쓰는 잡다한 물건들이 함께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침실 쪽에서 연기 덩어리를 몰고 나타난 조직원이 콜록거리며 급하게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천으로 싸인 조그만 거울 하나가 들려 있었다.
“콜록 콜록.”
그는 고통스럽게 계속 기침만 해대고 있을 뿐이라 그의 손에 들린 거울은 다른 사람에 의해 총을 가진 조직원에게 넘겨졌다. 그도 헝겊에 싸인 거울을 쉽사리 맨손으로 만질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이 닿지 않게 헝겊만 헤치고는 거울을 복도 쪽으로 내밀어 살피기 시작했다.
“철산이 녀석 코털 긴 덕을 이런 데서 보네. 지금 복도엔 놈들이 안 보입니다.”
“우리가 탈출하는 동안 복도 쪽은 우선 건수가 맡고 서두르자.”
“길이는 이만하면 될까요?”
줄을 두겹 세겹으로 엮었던 조직원이 줄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길이는 상관없어. 이 건물이 천정이 높아서 그렇지. 바닥에 닿을 때까지 타고 내려갈 건 아니잖아?”
“맞아. 웬만한 건물이면 까짓 거 그냥 뛰어도 되는데 여긴 좀 높지?”
“그래도 너무 욕심 부리지 마라. 아래쪽엔 잡다한 것도 많고 최대한 잡고 내려가. 지금으로선 안 다치는 게 중요하니까.”
이 말을 하면서 넘버쓰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다리에 총상을 입은 조직원에게로 향했다. 그 다리에선 아직 피가 계속 흐르는지 지혈한 헝겊이 새빨갛게 변한데다 점점 더 축축해지는 듯 보였다. 조직원은 가만히 제 다리만 보고 있었다. 넘버쓰리는 곧 시선을 거두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바닥에 닿으면 무조건 숲으로 뛰어라. 무기도 없는데 괜히 싸우겠다 나서지 말고 살아남는 거에만 집중하고. 그냥 뛰어. 아무 생각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냐?”
“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디로 가든 뭘 하든 이후로는 찾지도 않고 책임도 묻지 않겠다. 여기서 누가 살아남았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저들이 온 이상 우리를 돌봐줄 조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모르겠나?”
“하지만 마을엔... 거기는 어쩌구요.”
“...”
“이렇게 끝내야 합니까? 왜요?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요? 열심히 일한 대가가 이겁니까?”
조직원들의 반발은 거셌다. 그들에게선 공포의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겼다. 개인으로의 삶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고 아무도 함께 해주지 않을 탈출의 여정을 두려워하는가 김혁으로선 알 수 없었다. 넘버쓰리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버리는 게 아니라, 너희 자유 의지란 말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도 좋다. 죽음까지 함께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일을 하려고 모였을 뿐이고 이제 일이 끝났을 뿐이니까.”
모두가 인상을 구긴 채 말이 없었다. 넘버쓰리가 다시 말을 맺었다.
“우선 살아남아야 가족도 볼 수 있지 않겠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친구, 아니 좋은 이웃으로 만나자. 시간 없으니 서둘러.”
“천중이는요?”
한 조직원이 걱정을 담아 부상당한 동료를 챙겼다. 넘버쓰리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부상당한 조직원을 보고 말했다.
“팔힘만으로 줄 타고 내려갈 수 있겠냐?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대신 다른 조직원이 대답하고 나섰다.
“서너명이서 줄에 묶어 내리고 아래쪽에서 받아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넘버쓰리는 숲까지의 거리를 시선으로 훑었다. 누가 보기에도 부상당한 다리로 저기까지 가기엔 무리로 보였다. 총을 쏴대는 놈들을 피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가도 쉽지 않은 거리였다.
“너희들이 피신시킬 각오가 돼 있다면 그렇게 해라.”
냉담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선 넘버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인 듯 했다. 조직원들은 눈치를 보며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을 뿐 별 말은 없었다.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져 있었으나 비에 젖은 채 줄을 타고 내려가는 건 많이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곳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우리가 먼저 내려가서 받을게.”
한 사람이 씩씩하게 말하자 아무도 반박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의리가 있는 녀석들이라고 김혁은 생각했다. 한명 두명 늘어뜨려진 줄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자들이라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다. 갑자기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이 좀비로 변하기 전까지는.
그을음으로 얼굴빛이 가려진데다 비 가까이 있어서 그의 땀방울이 비가 튄 것으로 오인되기 좋았다. 그래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김혁의 눈에는 그의 오라가 심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는 곧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앞에 서 있던 조직원에게 생각없이 확 달겨들었다. 줄을 타려고 난간 끝에 서 있던 조직원은 저항할 새도 없이 그만 허공에 붕 떠버렸다.
“아, 아악.”
결국 그는 좀비와 함께 허공에서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모두 피해! 좀비다. 좀비.”
위에 있던 조직원이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퍼억, 으윽. 아래쪽에선 떨어진 자의 비명소리와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조직원들이 화다닥 흩어지며 짧게 내지른 비명소리로 잠시 소란스러웠다.
“아 씨발, 뭐야 또. 뭐 때문에 자꾸 좀비가 되는 건데?”
아래를 살피던 조직원이 거의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복도 쪽을 살피는 건수와 부상자 외 아직 내려가지 못한 다섯명은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좀비와 함께 떨어진 조직원은 이미 떨어지면서 부상을 입은 데다 좀비에게 물어 뜯겨 죽은 것처럼 보였다. 좀비는 계속 그 살을 뜯어먹고 있었다.
“좀비는 어떻게 됐어?”
복도를 살피던 건수가 물었다.
“살을, 타짜의 살을 뜯어먹고 있어.”
“야, 이리 와. 보고 있어.”
건수가 한 조직원을 불렀다. 그는 다가온 자에게 거울을 넘겨주고 문가에서 일어섰다. 건수가 난간 쪽으로 가 아래쪽의 좀비를 보고는 곧 총을 겨누고 그 머리를 쐈다. 좀비는 머리가 터진 채 그들이 타짜라고 부르던 조직원 위로 쓰러졌다. 비가 그 위로 내리며 오물과 핏물을 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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