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탈출4
좀비를 처치한 한 발의 총성 이후엔 빗소리뿐이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주변도 고요했다. 이제 남은 총알은 하나뿐. 건수는 말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복도를 살폈다.
“천중아, 너 걸을 수 있겠냐? 일단 내려가서...”
서 있던 조직원 중 하나가 부상당한 조직원에게 물었다. 천중은 얼굴이 많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힘없는 몸짓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난 가망 없으니까 어서들 가.”
“뭐? 다섯 명이라 좀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할 수 있어. 임마.”
“그래. 못 뛰더라도 아래엔 숨어 있을 만한 데가 있을 거야. 저놈들은 우리 쫒아오느라 정신없을 거고.”
갑자기 한 조직원이 제안했다. 천중이는 어쩌냐고 말했던 조직원이었다.
“아니면 복도 놈들 해치우고 총 뺏어서 그냥 1층으로 가는 게 어때요? 그럼 차를 탈 수도 있을 텐데.”
조직원들은 잠시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눈치였다. 총을 두 자루 이상 확보한다면 이미 여럿으로 분산돼 있는 놈들을 상대하기는 훨씬 수월할 터였다. 맨몸으로 노출돼 숲으로 달려가다 총 맞는 것보단 차까지 뛰어가는 게 더 빠르고 위험부담이 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차가 모조리 펑크난 것까지는 모르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본 건 마스크맨들이 기름을 빼내는 모습뿐이었다.
“저것들이 기름 다 뺐는데 차까지 가면 뭐해?”
“저놈들 차라도 뺏으면 되지.”
다른 조직원들의 소모적인 대화에 천중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하게 번진 미소는 체념이었다. 이 모든 대화에 결론을 짓겠다는 듯이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내 얘길 들어봐. 저 녀석이 좀비로 변한 거면 나도 결국 그렇게 된다는 거지?”
“무슨 소리야?”
조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천중에게 모아졌다.
“아까 나 지혈해준 게 저 녀석이잖아. 지혈해준 천도 쟤 거였고.”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피에 흠뻑 젖은 천을 모두 바라보았다.
“아 씨, 그런...”
“설마 그런 걸로 그렇게 될까? 피가 닿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 조직원은 진하게 공포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좀비가 된 자가 그 직전에 호흡할 때 쓰던 천을 상처에 닿게 했다면 그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장담하고 안심할 수는 없을 터였다. 좀비가 가졌던 거울조차도 맨손으로 만지기 겁내하던 자들이니. 그나마 그만큼이라도 망설여주는 동료들에게 천중은 고마움을 느낄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게 아니라도 난 숲이든 어디든 갈 수 없어. 정말 몸에 힘이 다 빠진 느낌이야. 그 총 나한테 주고 얼른들 가. 놈들 없을 때 빨리.”
“안 돼. 한 놈이라도 죽이고...”
건수가 여전히 복도를 본 채 대답하는 말을 자르며 천중이 말을 이어갔다.
“여긴 내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게. 살아 있는 동안은. 그때까지는. 그니까 가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나한테 뭔가 주고 싶으면 나중에 우리 누나나 못 본체 하지 말고 잘 챙겨줘.”
“아 씨발. 진짜.”
처음부터 천중을 알뜰하게 살피던 조직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빨리. 지금 뛰어도 숲까지 무사히 갈까 말까야. 빨리 줘.”
건수가 넘버쓰리와 다른 조직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말이 없었고 멈칫해 있었다. 중요한 건 그들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이미 건물 뒤편 끄트머리에 모습을 드러낸 마스크맨들이 서너 명 보이기 시작했다. 난간을 살피던 조직원도 그들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놈들이 건물 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총을 줘라. 천중이를 문가 쪽으로 앉혀.”
조직원들은 부상당한 자를 부축해 문가 쪽으로 옮겨놓았다. 건수는 거울과 총을 천중에게 넘겼다. 그들은 눈빛으로 혹은 눈물로 천중에게 인사를 대신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천중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저 복도를 관찰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줄을 타고 내려가는 조직원의 눈물을 내리는 비가 가려주었다. 그가 줄을 타고 아래에 도착하자 먼저 줄을 타고 내려온 조직원 중 한 명이 좀비를 조심스레 살피다 말했다.
“뭐야. 저 녀석 천은 목에 두르고 있는데?”
좀비 가까이 다가가 본 조직원은 거의 울듯이 소리쳤다.
“천중이 이 개자식 거짓말쳤어.”
다시 줄을 타고 오르려는 자를 제지하며 끌며 조직원들은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천중은 고정된 자세로 복도 너머를 끈질기게 바라볼 뿐이었다. 팔에 힘이 없는지 거울 든 손이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서 거울을 들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거울이 손에서 떨어지고 자신의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걸 직감한 천중은 간신히 총을 들어 마지막 한방을 복도를 향해 쐈다. 그건 복도를 지키는 마스크맨들에게 아직 실내에 조직원이 있음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이제 천중의 팔은 축 늘어졌고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김혁은 그곳을 떠나 허공에 떠서 도망치는 조직원들을 눈으로 쫒았다. 숲으로 달려가던 이들은 절반쯤 갔을 때 그 총성을 들었다. 그들에겐 첫 위협의 총성이었다.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더 빨리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 뒤로 총알이 빗발치기 시작했지만 정확하게 맞추기엔 거리가 좀 멀어진 다음이었다. 그러나 마스크맨들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달려가며 계속 총을 쏘아댔다. 그 사이에 조직원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강탄이는 그들 중에서도 달리기 실력이 가장 좋았다. 바람처럼 날래게 가장 먼저 숲에 도착한 것도 강탄이였다.
우거진 숲이긴 했지만 숲으로 간다고 해서 총 든 사내들을 피해 숨을 만한 곳이 딱히 있는 건 아니었다. 탄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먼저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더 가면 산을 넘을 수 있는 가느다란 오르막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길답게 한 눈에도 휜히 보였다.
강탄이는 길이 없는 곳, 더 험한 곳으로 발을 디뎠다. 비가 내려 진흙이 된 땅은 미끄러웠고 잔가지들이 시야를 가렸다. 몸을 숨기더라도 좀 더 먼 곳에 숨어야 했다.
김혁이 허공에 떠서 보니 좀비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줄을 타고 내려갔던 조직원 세명 중 두 명은 그리 머지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한명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