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진실과 마주할 시간1
김혁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희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감염됐는지 모를 정도로 여기저기서 좀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젠 저희가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유지성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는 말이 무슨... 이해가 안돼요. 그런 일이 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잖아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죠. 말씀드렸다시피 저들은 연구를 계속 할 작정이라 그들 선에서 조용히 처리하려 하는데 그게 오히려 그 바이러스를 더 널리 퍼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유지성은 좀 더 신중한 어투로 물었다.
“전 아무 힘도 없는데요. 프로젝트를 중단하려면 명박사님을 설득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은가요?”
“바로 그 명도원이 실험을 강행하려 하는 겁니다. 정부 쪽에다 거짓말을 하고요.”
“아니 명소장님 말고 명석원 박사님이요. 지하동 책임자.”
김혁은 뽀글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명석원을 떠올렸다. 형의 그늘도 넘지 못할 인간인데 그가 살아 있대도 이 실험을 중단시킬 리 없다고 생각하며 짧게 말했다.
“그 사람도 희생됐습니다.”
“네? 그분까지요? 그분이 왜...”
유지성은 더욱 놀란 얼굴로 김혁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에게선 공포의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이제야 엄청난 일에 휘말릴 뻔 했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김혁은 유지성에게 지금 모든 걸 말해줘야 하나를 잠시 망설였지만 언젠가 알아도 알게 될 일이라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길에서의 박사님 사고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연구소에서 일어난 일에 비하면 다행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무고한 분들까지도 희생됐으니까요. 오박사님 따님도 그날 거기 계셨었죠. 1층, 타임머신을 연구하던 김은성 박사님.”
이쯤 되자 유지성도 김혁이 거짓 정보를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표정이었다. 김혁은 유지성의 깁스한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박사님이 오박사님을 만나는 건 바이러스를 포기하기 싫은 세력들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겠죠.”
“설마 설마 했는데 그럼 정말 그런 거였어요? 이 사고가?”
그자들은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른 말로 대신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 바이러스가 어떻게 전염되고 어떻게 차단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박사님뿐입니다. 혹시 잠복기 상태에서 바이러스를 제거할 방법 같은 건 없나요?”
유지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한번 감염되면 그 어떤 걸로도 바이러스만 제거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몸의 면역체계도 소용없고 신경계를 망가뜨리는 것도 너무 빨라서 당혹스러웠죠. 숙주가 죽어야만 소멸이 되는 무서운 바이러스에요. 변이도 빠르지만 그 공격성은 정말... 저 혼자서 반대한다고 중단될 프로젝트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박사님을 생각해냈던 거예요. 그분이라면 따로 움직여줄 분들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서 찾아가던 길이었는데...”
유지성에게서 공포의 냄새가 더욱 많이 퍼져나왔다. 진실을 모두 아는 게 좋은 일일까? 김혁은 주은정을 한번 바라보곤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자들은 오박사님도 납치하려 했었습니다. 연구를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자들입니다. 이 병원은 그 자들이 사람을 보낼 수 있어서 안전하진 않아요. 일단 박사님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오박사님과 뭔가 연계할게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아 그분은 지금 연락이 안 된다고...”
유지성이 주은정을 쳐다보았다. 다 알지 않느냐는 눈빛.
“오박사님과 연락 가능한 사람을 알려주십시오.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그거야...”
유지성은 주은정과 김혁을 번갈아보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믿어야 할지를 가늠해보고 있는 중이리라. 유지성에겐 아직도 눈앞의 존재들이 그저 의심쩍은 낯선 자들일 뿐이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모두가 문 쪽을 돌아봤다. 김혁도 돌아봤다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서정이었다.
“손님들이 와 계셨구나?”
주은정이 눈치껏 서둘러 서정에게 다가갔다.
“저 어머님, 잠시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주은정이 서정을 데리고 서둘러 나가려고 하자 서정은 불안한 눈으로 유지성과 김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유지성이 괜찮다는 고갯짓을 했다. 서정과 주은정은 복도로 나가고 병실 문이 닫혔다.
김혁은 갑작스럽게 먼 옛날 첫사랑과 마주친 이 상황에 조금 당황해버렸다. 40년이 흘렀지만 서정을 향한 감정은 아직 남아 있는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갑자기 만나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해서 더욱 그러했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서정이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이었다. 잠든 얼굴일지언정 죽기 직전까지 돌봐줬던 그 얼굴과 많이 닮았을 테니. 40년이 흘렀으니 다 잊어버렸으려나? 이렇대도 저렇대도 쓸쓸하긴 마찬가지였다.
말이 없는 김혁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유지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박사님이 이 일을 도와주실까요? 따님까지 그렇게 됐다면 정말 상심이 크실 텐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와주실 것 같습니다만 오박사님과 연결해주시면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전 그분이나 김박사님과도 안면이 있습니다.”
유지성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없이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을 들으며 유지성이 김혁에게 물었다.
“누가 찾아왔다고 전하면 될까요?”
김혁은 이름을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유지성은 서정의 딸이다. 이름을 알려 주게 되면 자신이 누군지 곧 서정이 알게 된다. 저승사자인 걸 아는 셋째 딸, 이름을 말해주는 첫째 딸, 첫째 딸의 교통사고 때 서정이 본 그 얼굴이 조합된다면 결국 서정은 자신이 알던 그 김혁이 맞다고 생각하게 될 터였다.
“5층이라고 하시면 알 겁니다.”
유지성은 이름도 없이 뭐 그런 인연으로도 통화가 연결될까 싶은 얼굴로 미심쩍어 하며 전화를 받은 상대에게 말을 전하고 곧 전화를 끊었다.
“곧 전화가 올 거예요. 저도 곧바로 연락할 연락처는 갖고 있지 않아요. 경호원을 통해 거절 전화를 주시든 직접 전화를 하시죠.”
“네.”
오수연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김혁은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그 바이러스라는 게 숙주가 죽으면 얼마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쭉 지켜봐도 정확히 어떻게 감염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일단은 혈액 접촉이고요. 침이나 체액에 섞인 바이러스가 옮겨져도 감염이 될 수는 있는데 점막이나 상처 등에 직접 닿는 경우가 아니면 100%는 아니에요.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접촉하는 건 안심할 순 없어요. 최대한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책이죠.”
“아직 좀비가 되기 전 잠복기 중에도 다른 사람에게 감염이 가능한 겁니까?”
“흔친 않지만 불가능하진 않죠. 얼마나 진행됐느냐에 따라 다르니까요.”
좀비가 누가 될지도 모르는데 잠복기 중에 그걸 구분해서 접촉을 안 하기란 어려운 일이니 절망스런 정보다.
“좀비가 죽으면 바이러스는 언제 사라지는 거죠?”
“바이러스는 입자 형태라서 한동안은 생존 가능해요. 그리 긴 시간은 아니고요. 그 사이에 옮겨진다면 다른 숙주에서 살게 되죠.”
“그럼 죽은 좀비도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군요.”
“네. 그게 까다롭고 통제가 힘든 부분이죠.”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데 다른 데서 예방 백신 같은 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불가능해요. 우리 연구원들이 못했는데 누가요?”
유지성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유지성의 전화벨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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