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화 악마의 메세지
김혁은 이제 설득할 말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요근래 지난 40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한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기분이었다. 평소처럼 과묵해도 되는 그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이제 제발 오수연이 알겠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오수연이 입을 열었을 때는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김혁씨는 어떤가요? 열 여덟에 그렇게 됐다고 했죠? 지난 40년 동안 지켜본 이 세상은 괜찮은 곳이던가요?”
김혁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진심을 요구하고 있었다. 오수연의 절망은 생각보다 깊은 모양이었다. 어둡다. 너무 어둡다. 늘 인간에겐 희망이 없다고 중얼거리는 주은정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말할 수 없는 기분, 분명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믿고 싶은 그 무엇을 자극하는 그 기분. 김혁은 아직 그게 뭔지 여전히 모를 기분이지만 그 생각에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삶을 잃고 나서야 뚜렷이 깨달은 그것. 김혁은 대답 대신 질문을 되돌려줬다.
“박사님은 어떤가요? 열 일곱 살 그 봄, 5층 난간에서 그냥 뛰어내렸더라면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지난 40년은 아무 가치가 없는 거였던가요?”
“...!”
“전 모두가 알아주는 미래의 과학자를 구한 그날을 얼마나 잘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말씀드리지만 제가 저승사자가 되고 처음 만난 사람이 그 귀여운 여학생이었고 처음으로 저승으로 데려간 자가 그 몹쓸 과학 교사였습니다. 그때 제가 잘못한 겁니까?”
“...!”
오수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김혁은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번 음미했다. 지금 한 말은 오수연에게 한 말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영혼을 거두러 다니는 일에 슬슬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요즘의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떠냐? 넌 저승사자로 산 지난 세월이 아무 가치도 없던 거였느냐?
이 세상이 지옥이 되든 좀비 세상이 되든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건 뛰어내리려는 자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그때와 다름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승엔 지옥이 없다. 지옥처럼 만드는 자들이 있을 뿐.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
이번 일로 40년 전 저승사자로 일을 시작할 때 처음 만난 인간을 다시 만난 건 우연일까? 40년 동안 돌아다녔어도 예전에 만났던 사람을 다시 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게다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있을 수도 없었다. 그저 스쳐갈 뿐 항상 리스트를 따라서만 길이 마련돼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건 리스트에 오른 검은 오라들이었지 선량한 자들이 아니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40년을 돌아 다시 그때의 인간과 저승사자를 한 자리에서 만나게 했다. 오묘한 일이다. 40년 전, 오수연을 5층 난간에 서게 했던 장본인인 과학교사 조순철이 누구던가? 다름 아닌 지금 애절하게 도와주길 간청하는 유지성의 외할아버지가 아니던가. 당사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저승사자로서 이런 인연의 얽히고 설킴을 발견할 때마다 인연의 신비로움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조순철의 악행으로 그는 지옥불에 던져졌지만 그가 남긴 자손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오수연이 무겁게 한 마디 했다.
“돕겠어요. 유박사를 돕는 게 제 딸이 원한 일이라면. 제가 해야죠.”
“고맙습니다.”
김혁과 오수연의 눈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세찬 울음이 그녀의 슬픔을 어느 정도 씻어간 건지 그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그럼 전 박사님만 믿겠습니다. 아, 무엇보다 먼저 유지성씨의 병원을 먼저 옮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어요. 유박사와 연락해서 힘닿는 데까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테니 그건 걱정 말아요.”
“네, 전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김혁이 돌아 나오려 하자 오수연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 아직 대답 못한 게 있어요.”
“네?”
“그때 날 구해줘서 고마워요. 지난 40년은 내게도 감사한 인생이었어요. 은성이 같은 딸의 엄마로 살 수 있어서 좋았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내 엄마에게 큰 죄를 짓지 않게 해줬다는 걸 이제 깨달았네요.”
오수연의 눈에 다시 눈물이 어른거렸다.
“죽음은 아주 무거운 것이죠. 그걸 함부로 휘두르려 해선 안 됩니다. 인간들이 그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김혁은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걸어나왔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을 투명하게 하고 곧장 리스트의 조만호 이름을 찍었다.
숲에 도착해서는 김혁은 먼저 트렁크 위에 올려둔 통나무를 치웠다. 트렁크 뚜껑이 살짝 튀어 오르며 그 안에서 좀비들이 몸을 일으켰다. 우어어어어~~ 콰아아아~. 우어어웍~ 씨뻘건 피를 뒤집어쓴 좀비들이 팔을 휘적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그보다 더 검붉은 핏물이 차 밖으로 훅 쏟아져 내렸다. 다시 봐도 깜짝 놀랄 끔찍한 몰골이었다.
김혁은 재빨리 트렁크 뚜껑을 닫았다. 일단 찰칵 소리를 내며 잠기긴 했지만 안에 좀비들이 움직이다가 다시 열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힘을 줘 차체의 두 귀퉁이를 꾹 눌렀다. 그리고 아래쪽도 쳐 올려서 단단히 맞물리게 했다. 이 정도면 안에서 아무리 몸무림쳐도 좀비들이 트렁크 문을 열 수는 없으리라 안심할 수 있었다. 김혁이 트렁크 뚜껑을 살피고 있는 동안에도 좀비들은 트렁크 뚜껑을 탕탕 쳐대고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트렁크 뚜껑은 꿈쩍도 안 했다.
김혁은 이제 핏물이 쏟아져 내린 젖은 흙바닥에 옆의 흙을 쓸어와 덮고 발로 다졌다. 그리곤 그 자리에 트렁크 위에 놓았던 통나무를 가져다 뉘였다.
대충 마무리가 된 걸 확인하고 나서야 김혁은 자동차를 번쩍 든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좀비들은 먹이가 없으면 얼마만에 굶어죽을까를 생각하면서.
오두막이 보였다. 굴뚝의 실연기는 아직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떠나진 않은 건가? 오두막에서 적당히 안 보이는 지점에 차를 쿵 내려놓고 옆의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하나 뽑아 트렁크 위에다 올려두었다. 앞쪽으론 차를 끌고 나갈만한 공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마무리하고 오두막으로 날아갔다.
오두막 안엔 건수와 강탄이가 난로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민하진과 주은정은 몸을 투명하게 한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김혁도 합세해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야야, 우리 엄마 같은 소리 하네?”
건수가 강탄이에게 말했다.
“형은 꿈 안 믿어요?”
“뭐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너 원래 꿈 잘 꾸냐?”
“아뇨. 전 자면서 꿈 꾼 적 한번도 없어요. 기억을 못하는 건지는 몰라도.”
“근데 오늘 그런 생생한 꿈을 꿨다?”
강탄이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떠중이가 온다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너 알던 애들 중에 떠중이라는 별명 가진 애 없어?”
강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개꿈이겠지. 오늘 너무 놀랄 일이 많았잖아. 뒤숭숭하다 보니 그런 꿈을 꿨겠지.”
“그럴까요?”
건수는 난로 위에 올려뒀던 냄비에서 뜨거운 물을 컵에 나눠담고는 강탄이에게 하나를 건넸다. 그들은 뜨거운 물을 조금씩 마시며 주린 배를 달랬다.
김혁이 민하진에게 물었다.
“떠중이가 온다니? 무슨 꿈을 꿨다는 거야?”
“아무래도 악마님의 메시지 같은데요? 떠중이를 보냈나봐요.”
“그래?”
“꿈에 작은형님이 나타나서 짱돌을 추적하러 왔던 남자가 오면 그를 따라가라고 했대요.”
“나?”
“네. 그리고 떠중이가 갈 거다라고도 말했대요.”
하진의 말이 끝나자 주은정이 덧붙였다.
“쟤는 선배님을 떠중이로 알아들은 것 같아요.”
“나를?”
민하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곤 곧 킥킥거렸다.
“그러고 보니 떠중이가 선배님하고 좀 닮은 것도 같네요.”
“내가 어딜 닮아? 걔를.”
김혁이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묻자 민하진은 주은정을 쿡쿡 찔렀다.
“안 그래? 주은정, 너가 말해 봐.”
“글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닮았나?”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던 주은정마저 생각해보는 모양새를 취하자 김혁은 더 강렬하게 말했다.
“생긴 거로 치면 내가 더 잘 생겼고 아는 걸로 치면 걔가 더 많이 알겠고 주먹질로 치면 내가 더 세고 걔는 귀엽고, 난 멋있고 뭐가 닮았다는 거야?”
그때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대답했다.
“남자라는 것만 빼곤 닮은 게 없죠. 안녕하셨습니까? 선배님.”
어느새 떠중이가 와 있었다. 지옥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비하면 많이 여유로워진 모습으로 싱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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