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마을 사람들1
건수는 하얗게 칠해진 나즈막한 울타리로 둘러쳐진 조그만 마당으로 들어서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엄마! 나 왔어.”
김혁 눈에는 다 큰 남자가 엄마 엄마거리는 걸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런 모습이 역시 낯설고 많이 이상해 보였다. 여자 앞이라 귀여워 보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니겠지? 왠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곧 문이 열리고 안에서 정말 머리가 하얗게 센 파파할머니가 내다봤다. 특이하게도 붉은 기가 약간 섞인 분홍빛 오라를 가졌다. 저 정도 나이에 저런 순수하고 밝은 색을 갖기란 어려운 법이라 저승사자들 셋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지옥에 갈 사람이 아니라도 고령의 노인들 오라에는 기본적으로 검은빛이 서리게 마련이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영혼을 순수하게 간직하기란 더욱 어렵기에 대부분 탁하거나 어두운 색 오라들이 많은데 저토록 선명한 분홍색 오라라니, 40년 차 김혁도 그런 노인의 오라를 처음 봤기 때문에 더욱 신기해 하며 계속 바라보게 됐다.
“응? 건수냐? 아니 이 오밤중에 웬일이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인의 주름진 얼굴엔 미소가 금새 가득 번졌고 벌써 몸은 반쯤 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모두 비좁은 마당에 선 채로 건수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아이구, 우리 엄마. 그새 팍삭 늙었네. 응? 친구들 좀 데리고 왔는데 우리 밥 좀 줘. 지금 배고파 죽겠거든.”
건수의 어머니는 서 있는 젊은이들을 쭉 한번 훑어보고는 건수를 보고 가볍게 핀잔했다.
“아, 이 시간에 와서 다짜고짜 밥을 달라구 하면 어쩌냐? 너는, 전화라도 먼저 하든가. 좀 기다려 봐. 내 얼른 준비할 테니.”
약간 퉁명스러운 말투와 다르게 건수 엄마는 서두르려는 티가 역력했다. 건수 엄마가 서둘러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김혁이 얼른 건수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곧 가야하니까 우리 것까진 필요 없어.”
“왜? 여기까지 왔는데 밥이라도 먹고 가.”
“아니야. 우린 마을만 잠시 둘러보고 갈 테니까 먼저 좀 안내해주지. 삼인조가 왔는지만 알면 되니까.”
건수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다시 말했다.
“엄마, 두 명만 먹을 거야. 그 전에 우리 마을 좀 잠깐 돌아보고 올게.”
“응? 둘만? 왜? 어, 그려. 너무 늦지 않게 와. 음식 식으니까.”
“응. 알았어. 근데 아빠는?”
“민철네 할아범한테 갔지. 갈 데야 빤하지. 뭐.”
“민철네?... 으응, 얼른 갔다 올게.”
김혁은 강탄이를 바라봤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조직원에 대해 그 가족에게 소식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강탄이의 표정은 내내 어둡게 물들어 있었던 그대로였지만 건수의 얼굴에는 엄마에게 보였던 표정이 사라지고 이내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건수를 따라 모두 집 밖으로 나왔다. 하얀 울타리보다는 높지만 그래도 나즈막한 돌담을 끼고 길과 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
“봄철이면 여기저기 꽃들이 화사하게 피고 가을이면 탐스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서 여긴 정말 아름답지.”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건수의 읊조림은 앞으로 사라질지 모를 마을에 대한 걱정과 슬픔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건수가 골목을 따라 걷다가 불이 켜진 한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형님, 오상 형님, 저예요. 건수.”
안에서 기척이 나더니 젊은 여자가 나왔다. 붉은 기가 도는 회색 오라를 가진 보기 드문 미인이다.
“아 형수님. 잘 지내셨어요? 형님 좀 봬러 왔어요.”
“오랜만이에요. 건수씨. 들어오세요. 여러 분이 오셨네요?”
“잠깐만 실례할게요. 물어볼게 좀 있어서.”
그때 안에서 목발을 짚고 한 건장한 남자가 문가로 나왔다.
“야 이놈, 건수. 웬일이냐? 응? 강탄이까지? 뭔일 있어? 저 녀석들은 또 누구야? 신입이야?”
무덤덤하게 저승사자들을 훑던 그의 눈길은 민하진을 발견하자마자 매섭게 변했다.
“누굴 데려온 거야? 여기를?”
“형님, 말씀 드리자면 좀 긴데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건수가 젊은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남자는 잠시 모두를 바라보곤 들어오라는 고갯짓을 하곤 먼저 방 쪽으로 사라졌다.
“다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나?”
김혁이 먼저 말했다.
“그래.”
강탄이, 떠중이, 민하진은 마당에 남기로 하고 김혁과 건수만 방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고 그럴듯한 바깥과는 다르게 안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영화사가 세트장 실내까지는 좋게 만들 생각이 없었거나 그 전에 망해버린 모양이었다. 실내는 정말 아무 꾸밈없이 그냥 밋밋하기만 했다.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비좁았고 천정도 낮아서 더욱 초라해보였다. 어쩌면 집에 어울리지 않는 덩치 큰 남자가 버티고 앉아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아무튼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간신히 놓여져 있는 모양이 숲속 오두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남자는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물었다.
“형님, 혹시 용석이랑 상만이 학주한테 뭐 연락 받은 거 없습니까?”
“어제도 찾더니 걔네들은 왜 자꾸 찾아? 정말 도망친 거야?”
“그게...”
건수가 머뭇거리며 김혁을 바라보았다. 김혁이 간명하게 정리해 대답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제 너희 조직은 없어졌다는 거고 앞으로 세상은 좀비 천지가 된다는 거지.”
김혁이 말하는 도중에 이미 남자는 인상을 확 구기고 김혁을 째려보다가 말이 끝나자 건수를 향해 거칠게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이 남자는 뭐야? 누군데 데려와서 이런 말을 씨부리게 해? 조직이 없어졌다니? 무슨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충만했다.
“그러니까 형님 사실 저희가 이번에 어떤 연구소 관련된 일을 맡았는데 그게 잘못 됐습니다. 거기서 연구하던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나와서 조직원들이 좀비가 되거나 죽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뭐? 좀비라니 대체 그런 게 있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말해봐. 작은 형님은? 안 되겠어. 전화라도 해야지.”
남자가 성급히 한쪽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챙겨들었다.
“작은형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뭐?”
방 밖에서 쟁반이 엎어지며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아내가 겁에 질려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형수님 괜찮습니까?”
건수가 발딱 일어나 여자에게로 다가가고 남자는 김혁을 째려보았다.
“다시 말해봐. 뭐가 어떻게 됐다고? 왜 우리 조직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거야? 이건 말도 안돼. 말이 안 되지.”
“모두 사실이다. 용석이 일행은 마을에 들어와선 안돼. 좀비 바이러스를 갖고 있을 수 있어. 그랬다면 뭐 이미 좀비가 됐을 거긴 하지만. 혹시 누구 접촉한 사람이 있다면 알아야 해. 어제나 오늘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온 사람이라든가. 그들을 만났던 사람이 있거나 하면...”
남자는 아직 김혁에게 대꾸해줄 마음이 없는지 침묵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건수에게 성급하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봐.”
건수는 연구소에 갔던 일과 좀비로부터 도망쳐 오두막까지 가게 된 사연을 대략적으로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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