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복수라고?
영화 세트장이었던 마을은 아직 고요했다. 비명소리나 돌아다니는 좀비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김혁과 떠중이는 각자 마을의 집집마다를 다시 한번 면밀히 살피며 돌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좀비가 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집집마다 안타까운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혼자 떨어진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겠다고 애원하며 방문을 두드리고 젊은 엄마는 자신의 방에서 귀를 막고 고통스러워하는 집,
뚝 떨어진 방에서 각자 이불속에 숨어 대화를 나누는 엄마와 아이가 있는 집.
다 큰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불안에 떠는 엄마와 아이가 있는 집.
아직 갓난아기를 안은 엄마는 어쩔 줄 모른 채 아기를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공포에 떠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느라 애쓰는 엄마들 역시 강한 공포의 냄새를 풍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밤이었다.
공포의 냄새가 안개처럼 온 마을에 깔려 있다. 김혁은 안타까운 마음에 바람이라도 일으켜 마을에서 공포의 냄새를 날려버리려고 했다. 그러자 색색깔로 칠해진 작은 창문들이 덜컹이며 우우 떨었다. 그 소리가 더 공포감을 일으키는 것 같아 그마저도 멈췄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넘버쓰리의 집으로 가니 남자는 여전히 여자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앞의 벽을 보고 있었다. 체념과 슬픔으로 멍해진 남자의 얼굴과 여전히 사납게 먹이를 찾아 고개를 돌려대며 포효하는 여자의 얼굴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좀비와 단둘이 남겨진 남자의 심정은 어떨까? 짐작해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상상되지 않았다.
김혁은 투명한 모습으로 허공에 떠서 한참동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중이가 날아와 옆에 섰다. 좀비가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둘은 이제 같은 것을 바라보며 대화했다.
“선배님은 저 남자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날이 밝기 전에 여자는 처리해야 하는데...”
김혁은 새벽이 오기 전에 장회장도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에 이제 슬슬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가고 나면 남겨진 남자에겐 고통뿐이겠죠? 어차피 검은 오라고 지옥으로 갈 텐데 저 남자가 해달라는 대로 해줘도 괜찮지 않아요?”
“그건 안돼. 이생에서의 고통을 줄이자고 지옥에서의 고통을 늘리게 할 순 없어. 더구나 우리가 나서서 죄를 더 얹어주는 건 안돼. 적어도 저 남자가 좀비가 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해.”
“좀비가 안 된다 해도 저 남잔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할 것 같은데요?”
“그건 저 남자의 선택이고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그렇다고 여기 계속 두는 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우린 낮 동안 손도 쓸 수 없는데 어디 딴 데로 옮겨둬야 할까요?”
김혁은 숲속 오두막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 거동도 불편한 남자를 외딴 곳에 혼자 유폐시켜 놓는다는 것도 좋은 방법처럼 생각되진 않았다. 그를 살게 할 방법은 없을까? 지금 저 남자를 살게 하는 건 다리가 회복되고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뭔가 다른 게 더 필요했다.
“인간에겐 희망이 필요해. 그게 없이는 다시 살아낼 결심을 하지 않을 거야. 일단은 집을 단단히 페쇄하고 묶어두는 수밖에 없어. 가자.”
김혁과 떠중이는 동굴로 날아갔다. 문 앞에서 몸을 나타내고 건수가 했듯이 문을 세 번 노크하고 잠시 쉬었다가 두 번 노크했다. 문이 열렸다. 문에 어떤 장치가 돼 있어서 저절로 열리는 건지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마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김혁과 떠중이는 조용히 걸어 남자의 집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온 둘을 보곤 씁씁한 미소를 지었다.
“날 좀 그만 보내주겠나?”
“좀비가 아닌 사람을 함부로 해칠 순 없어.”
김혁과 떠중이는 여자와 남자를 묶은 줄을 풀기 시작했다.
“왜, 왜 뭘 하려는 거야? 그냥 둬.”
김혁은 남자를 잡은 채 떠중이가 줄을 다 풀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풀린 줄을 받아 남자만 따로 꽁꽁 묶었다. 떠중이는 그 사이 여자를 다른 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줄에서 풀려난 여자가 사납게 떠중이게 덤벼들었다.
“우아아 크아악!!”
떠중이가 여자의 팔을 뒤로 고정시켜 잡고 방을 나갔다.
“뭣들 하는 거야. 그냥 여기서 나도 같이, 그냥 여기서 보내란 말이야!”
남자가 버럭 소리쳤다. 김혁이 남자를 단단히 묶고 나서 떨어져 섰다. 남자가 독기 서린 눈으로 김혁을 올려다보았다.
“너에게 소중한 사람은 저 여자뿐인가? 다른 가족은?”
“저 여자 없인 아무 의미 없다.”
“죽거나 살거나 그건 하늘의 뜻이지. 왜 우리한테 죄를 짓게 하겠다는 거냐?”
“그럼 날 풀어주면 되잖아.”
“그럴 순 없어.”
“어차피 죽일 거면 지금 해치우라고!”
남자가 또 다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너희 같은 킬러가 아니야. 착각하는군. 조금만 참으라고. 늘 요행이라는 게 있지. 좀비가 안 된다면 그건 살라는 거겠지. 그때도 살고 싶지 않다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이거 풀라고 씨발. 야아, 아앜!”
남자가 묶인 팔에 힘을 주며 풀어보려 한참을 버둥댔다. 떠중이도 옆에 와서 김혁과 함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고독한 싸움은 제 풀에 지쳐 멈췄다. 줄이 끊어지거나 저절로 풀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잠잠해지자 김혁이 말을 시작했다.
“좀비 바이러스로 수많은 가족들이 가족을 잃었지. 당신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야. 연구소에선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이웃 마을은 좀비가 득실거리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곳들에서 이런 불행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겠지.”
김혁은 폐인처럼 지내던 오수연을 떠올렸다.
“소중한 딸을 잃은 엄마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났어. 너는 아내를 저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은가?”
김혁은 ‘복수’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악마를 떠올렸다. 악마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을 설득했던 그날 처음 들은 단어.
지옥 문 앞에 떨어진 소년에게 복수심을 자극하던 악마. 널 죽게 만든 고아원 원장을 데려올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그럼으로서 서정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었지. 소년은 그 술수에 넘어가버려 천국행을 포기하고 결국 이 길을 택하게 됐다.
김혁은 가끔 그렇게 만든 악마의 계략을 원망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다르게 보면 악마가 단순히 맘에 드는 인간을 저승사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악마는 김혁을, 민하진을, 주은정을, 장한조를 살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억울하게 생을 빼앗기고 죽은 아이들을 이렇게라도 다시 살게 하고 싶었던 거였는지도. 비록 이승과 저승을 오가지만 아직은 김혁이고 민하진이고 주은정이고 장한조일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내지 못한 나머지 생을 살게 한 거다.
그래서 그런 거였나? 다시 살게 하기 위해 복수를 들먹일 수밖에 없었던 건가? 그 순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김혁이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올 마음을 먹진 않았을 테니까.
“누구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조만호는 이미 좀비가 됐다며 우릴 이렇게 만든 건 그놈이잖아.”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 자는 앞으로도 계속 있겠지. 돈밖에 모르는 장회장 같은 사람, 비윤리적인 연구소장 같은 사람, 너희 같은 자들을 이용해먹는 자들, 그런 자들이 활개 치도록 놔두는 거야말로 네 아내를 두 번 죽이는 거다.”
김혁은 말을 잠시 끊고 머뭇대다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내를 다시 만나고 싶다면 네가 여기서 지은 죄를 씻어내야지. 네 아내가 지옥에 떨어질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너도 천국으로 가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나?”
지옥에 가면 또 악마가 한소리 하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말을 마쳤다. 남자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지옥이라고? 그런 걸 믿나?”
“믿지 않으면 넌 왜 여자를 따라가려 하는 거지? 그저 지금 느낄 잠깐의 고통을 면해보려고?”
“...”
곧 좀비가 될지도 모르는 자에게 너무 과도한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 건 아닌가싶기도 했다. 좀비가 돼버린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을지 몰랐다. 그러나 단 몇 시간이라도 남자가 불행감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비가 된다 해도 스스로를 죽인 죄 만큼은 덜어줄 수 있으니.
“내가 뭘 할 수 있지?”
남자가 고개를 떨구고 깁스한 채 뻗어 있는 다리를 바라봤다.
“그건 차차 생각해보자고. 배가 고픈가? 한동안 갇혀 있어야 할 거야. 이 집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거고. 뭔가 필요하면 지금 말해라.”
남자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중이가 나가 뒤적거리더니 부엌에서 빨대가 달린 물통에 물을 받아와 방바닥에 놓았다. 남자는 그들이 나갈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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