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복수의 무게
김혁과 떠중이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좀비 사체를 이불에 말아 내다놓은 다음 남자의 집에서 외부로 통하는 문과 창문들을 모두 막았다. 그건 마당을 둘러싼 흰 울타리가 있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예쁜 집이 망가져 보기 싫었지만 지금은 미관보다 중요한 게 생존이었다.
김혁이 이불로 둘둘 만 좀비 사체를 들쳐메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떠중이가 들겠다는 걸 말리고 직접 짊어진 건 왠지 모르게 40년 전의 그 기억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따라 자꾸만 40년 전 일들이 생각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김혁은 40년 전, 지옥 문 앞에서 처음으로 악마를 만났고 조금 어이없는 계약을 맺었다.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다.
40년 전, 나무들이 우거져 그늘진 울창한 숲 속 외진 곳에다 소년을 묻으려던 뚱뚱한 원장의 이미지는 모두 악마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그 당시는 그걸 몰랐지만 환상임을 알게 된 다음에도 그 장면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야산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소년의 몸, 그 옆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구덩이를 파고 있는 고아원 원장을 또 다른 자신이 공중에 떠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구덩이에 파묻혔다.
그리고 지옥. 새빨간 악마를 만났고 복수를 제안받았다.
“여긴 어디지? 넌 뭐야?”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지... 옥? 지옥이라고?”
“기억 안 나나? 넌 죽었지. 널 구덩이에 묻고 있는 원장을 보고 있었잖아.”
“그래 죽었지. 내가 .... 근데 왜 여기 있지?”
“엄밀히 말하면 아직 지옥은 아니고 날 만났으니까 지옥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게 무슨 말이야? 좀 쉽게 말해.”
“글쎄, 사람들은 날 악마라고 한다지?”
“악마?”
공중에 떠 있던 사람 형상에 가까운 빨간 덩어리는 뿔 달리고 삼지창을 든 눈에 익숙한 악마 캐릭터로 변형됐다.
“어때 좀 비슷해? 히힛. 난 이 공간에서 나를 원하는 사람에 의해 태어나지.”
“난 널 원한 적이 없는데?”
“왜 이러실까? 날 불러낸 건 너야. 나야 무지하게 고맙지.”
“난 너의 존재조차 몰랐는데 내가 널 불러냈다고?”
“그런 게 있다. 뭘 다 알려고 해? 모든 걸 설명하기는 너무 너무 복잡해. 시간도 별로 없고. 간단히 본론만 말하면 천국의 문이냐 지옥의 문이냐를 선택할 수 있는 드문 인간이라 넌 날 만나게 된 거야.”
“무슨 소리야 대체.”
“차차 알게 될 거야. 암튼, 내가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하지.”
“....?”
“마지막 확인이기도 한데 여기서 내 제안을 거부한다면 넌 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어. 하지만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너는 지옥불에 떨어지게 되지.”
이거 뭔가 반대로 말 한 거 아닌가?
“누가 천국을 두고 지옥을 선택한다는 거냐? 멍청하긴.”
“일단 끝까지 들어보고 결정을 하라고. 성격 급하네, 참.”
“말해.”
“너는 다시 한번 기회를 얻을 수 있지. 널 죽인 인간을 지옥불에 처넣을 수 있는 기회를.”
김혁의 귀가 번쩍 트였다.
“원장을? 원장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분명히 관심을 가질 것 같았거든. 히힛.”
악마는 기쁜 듯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물론 가공할 힘을 가지고 돌아가지. 너는 어쨌든 이승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누구도 널 당해낼 순 없어. 가서 고아원 원장을 끌고 오는 거야 이리로. 그리고 지옥불에 처넣으면? 으하하하.”
기괴한 웃음과 함께 악마는 활활 불타오르는 씨뻘건 불덩어리로 모습을 바꿨다.
“이렇게 활활 타며 고통 받게 돼. 너의 원수에게 죽지도 못하는 고통을 안기는 거야. 그것만한 복수가 어딨어. 정말 짜릿하지 않아?”
“복수를 하고 그 복수의 대가로 나도 지옥불로 가라? 그런 건가?”
“뭐 말하자면 그렇지."
악마는 다시 그 우스꽝스런 캐릭터 모습으로 돌아왔다. 김혁은 혼잣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원장은 죽으면 지옥에 올 것은 뻔한 일. 그런 인간이 지옥에 안 온다면 누가 지옥에 오겠는가? 근데 굳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뭔가 수상한데... ?
"선택은 니가 하는 거니까 싫다고 하면 넌 바로 천국으로 갈 수 있어. 하긴 뭐 서정이란 아이가 천국으로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네. 얼마 안 가서 올 것 같긴 하던데. 오, 아니다. 어쩌면 지옥으로 올 수도 있겠다.”
“뭐라고? 정이가 왜?”
서정이 지옥으로 온다는 말에 김혁은 깜짝 놀랐다. 정이 같은 애가 지옥에 올 일이 뭐가 있다고 어째서.
“그놈이 서정을 그냥 둘 것 같아? 그날밤 너도 봤잖아. 넌 그놈한테 왜 덤볐어? 그런 몹쓸 짓을 당하면 그애가 살아있고 싶을지 모르겠네. 난 가엾은 여자애들이 스스로 생을 놔버리는 걸 참 많이 봤거든.”
“으... 안돼, 정이를 내버려둬!!”
“어쨌든 살인은 가장 큰 죄야. 자신을 죽이면 지옥불에 떨어지게 되지. 아무리 그 영혼이 아름답고 맑았던 사람이라도 그 죄를 태워야 하니까 이쪽으로 떨어지게 돼 있어.”
“...”
원장이, 원장이... 그래, 원장이 서정 옆에 있는 한 안심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지금도 원장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니까. 뭐 물론 이제는 지 맘대로 해도 되니 좀 여유를 부리고 있긴 하지만. 이제 너처럼 덤빌 녀석도 사라졌으니 말야. 근데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지금은 그 여자애가 앓아누워 있어. 네가 죽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거든. 그래서 차마 건드리진 못하고 있지. 하지만 그 인간이라면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분명히 서정을 그냥 두진 않겠지. 그놈이 무슨 짓을 할지 뻔하잖아?”
“안돼, 안돼. 안 된다고.”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김혁은 그때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죽게 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었던 거였음에도 악마가 그런 환상으로 꼬여낸 거였다. 그렇게 1년 여간 저승사자가 되어 이승을 떠돌았다.
시체가 됐던 것이나 시체를 구덩이에 묻었던 것이나 모두 환상이라 해도 그는 자신을 죽인 자의 영혼을 거두고 그 몸을 구덩이에 묻기 위해 떠메고 갔던 그날 새벽의 기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 불유쾌한 기억. 그건 자신의 푸르뎅뎅한 몸이 구덩이에 묻히는 광경을 보는 것만큼이나 음울하고 불길한 기억이었다.
원장의 뚱뚱한 살찐 몸은 하나도 무겁지 않았지만 그날 분명히 뭔가가 묵직하게 맘속에 무게를 드리운 채 매달려 있었다. 기억의 무게란 그런 것이다. 결코 사라지지도 않고 무게를 덜지도 않는다. 그 환상이 김혁의 정신에 새겨놓은 것들이 지난 40년을 지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건 무서운 거였다.
복수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 복수는 한순간이지만 그 기억은 나머지 일생에 살아 숨쉬게 된다. 그런 기억을 안은 채 평생을 사는 게 행복할 리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악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방법이다. 이미 영혼이 썩어버린 자들의 싸움, 지옥 불구덩이 속까지 계속될 그런 싸움으로 이곳에서 미리 지옥을 경험하는 것.
김혁은 좀비의 사체가 주는 무게도 마음속에 각인해 두리라 생각했다. 지금 김혁에겐 어깨에 들쳐멘 좀비가 검불처럼 가벼우나 마음속에선 결국 묵직하게 무게를 드리우게 되리라는 걸 아니까.
비록 좀비라고 해도 한때 인간이었던 자. 이들을 구하지 못한 자책감을 확실히 새겨두리라.
김혁은 동굴까지 가는 길 내내 말이 없었다. 떠중이도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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