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너의 죄를 알라
김혁과 떠중이는 동굴을 통과하자마자 하늘로 솟구쳐 올라 시장이 있는 마을로 날아갔다. 주은정이 해치운 좀비가 있던 집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좀비 사체를 내려놓고 마을에 널브러진 다른 좀비 사체들을 모으려고 나갔다. 주은정과 민하진은 다른 데 갔는지 마을에선 보이지 않았다.
김혁과 떠중이는 마을 여기저기에 남아 있던 좀비 사체들을 모아들였다. 삼인조 중의 나머지, 쓰레기통에 처박힌 좀비와 자신이 해치운 좀비를 포함해 넷이서 해치운 좀비들을 눈에 띄는 대로 모두 그 집으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 주은정과 민하진이 돌아왔다. 그들은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들을 모두 막아놓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산사태처럼 보이게 하느라 애를 좀 썼죠.”
민하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래, 이제 나머지는 너희들에게 맡겨야겠다. 난 이제 회장님을 모시러 가야지. 내가 지옥에 다녀오는 동안 싸우지들 말고.”
“네 선배님!”
떠중이가 씩씩하게 대꾸하고 민하진이 뾰족하게 투덜거렸다.
“우리가 뭐 앤가요? 싸우게.”
얼마 전까지 주은정과 티격태격하는 게 일이었던 민하진이 그런 말을 하니 왠지 웃음이 났지만 참고 대답했다.
“어, 그래. 애는 아니지.”
애어른이지, 그 말은 속으로 되뇌고 김혁은 리스트를 꺼내 장회장 이름을 찍었다.
그곳은 널찍한 호텔방이었다. 순간적으로 민망한 장면을 구경하게 되는 건가 싶어 긴장이 됐다. 한밤중에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일이 적지 않았다. 보게 되면 보는 거지만 결코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악마는 그런 것도 구경할 수 있는 게 이 일의 장점이라고 말하지만 김혁은 본의 아니게 훔쳐보게 되면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기에 침대 쪽을 봤다. 의외로 장회장은 여자도 없이 혼자였다. 잠을 잤던 것 같지도 않고 잠옷 차림도 아닌데다 양복 자켓만 벗은 채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심각하게 어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텔방 밖으로 나가보니 문 앞은 건장한 남자 둘이 지켜 서 있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장회장은 뭔가 겁을 집어 먹고 숨어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장회장, 당신이 두려워하는 건 뭐지?
김혁은 재빨리 경호원들의 급소를 공격해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조용히 두 사람이 쓰러졌다.
김혁이 모습을 드러내고 호텔방으로 들어서자 깜짝 놀란 장회장이 서둘러 베개 밑에서 총을 찾아 빼들었다. 그는 눈에 띄게 몸을 떨어댔다.
“어,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지?”
장회장이 바깥을 향해 소리치려 하는 걸 제지하려고 김혁이 서둘러 말했다.
“누가 들어올 거란 기대는 말아. 둘 다 바닥에서 쿨쿨 자는 중이니까.”
“어떻게 날 찾았나?”
이번엔 또 누구로 오해받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시침 떼고 대꾸했다.
“이런 데 숨으면 못 찾을까봐? 난 당신이 어디 있든 찾아낼 수 있어.”
김혁이 장회장 쪽으로 한 발짝 다가들자 그가 총을 똑바로 겨누고 말했다.
“세상 시끄럽게 할 일 뭐 있나? 음? 조만호 밑에서 일하나? 그만한 실력이면 거기 있긴 아깝군. 내가 두 배로 거둬주지. 어때?”
“그딴 소리 할 시간 없어.”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만.”
장회장이 총을 쐈지만 김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히 총알은 가슴에 명중했지만 끄떡도 않는 김혁을 보고 더 몸을 떨어대며 두 번째 총알을 발사하려 했지만 그 전에 총을 빼앗겨 버리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너, 넌 뭐지?”
“언제부터 개나 소나 다 총을 쏴댔지? 응?”
김혁은 총구를 장회장 쪽을 향한 채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장회장에게선 강력한 공포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장회장이 몸을 뒤로 젖히다 침대 헤드에 등이 닿아 멈췄다.
“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유언장 하나 쓰자.”
“뭐?”
“뭘 그렇게 놀라. 때가 되면 가는 거야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건데...”
“어, 어딜 간다는 거야?”
“지옥.”
“뭐?”
“아, 아, 유언장은 이런 상황에선 분쟁에 휘말릴 수도 있으려나? 요즘 사람들은 유언장도 잘 안 믿어서 말이지. 그럼 백지 수표 하나 쓰든지 너 같은 인간은 하룻밤에도 그런 거 쉽게 쉽게 막 쓰잖아. 이번엔 좋은 일 하는 거니까 금액 좀 크게 쓰고.”
“...?”
“뭐해? 빨리.”
“그래, 그래, 돈이라면 주겠네, 주지. 그래 얼마가 필요한가?”
장회장이 품에서 수표책을 꺼내들었다.
“니가 줄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을 적어.”
“뭐?”
“수많은 가족들의 생계가 걸린 일이야. 정부 몰래 좀비 바이러스 연구를 한 게 알려지면 돈이 뭐야 기업이 사라질 텐데. 연구원까지 죽이려 했고 또...”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장회장이 표정을 바꾸고 멈칫했다. 이놈이 대체 뭐 하는 놈인가 싶은 얼굴. 혹은 조만호 쪽 사람이 아닌가 싶은 얼굴로 김혁을 바라봤다.
“뭔가 잘못 알고 온 것 같은데...”
“잘못 알기는. 미래연구소에서 몰래 좀비 바이러스 연구를 시킨 것도 너고 조만호를 사주해서 연구원들을 몰살한 것도 너고 다른 조직을 이용해서 조만호의 조직원들을 몰살시킨 것도 너잖아. 뭐 더 많은 죄를 지었으면 그건 알아서 생각해보고.”
장회장이 땀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만호가, 조만호를 어떻게 한 거야? 그 사람 말을 믿나? 다 그놈이 한 거라고. 그놈이 내가 했다고 하든가? 난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
이런 자들이 기본적으로 장착한 옵션 발뺌.
“시켰으니까 했지. 돈을 주니까 했지. 니놈이나 그놈이나 똑같아. 난 조만호 따위를 위해 일하지 않아.”
“그럼, 대체 목적이 뭐냐?”
“다 시끄럽고 빨리 수표나 써.”
“그러니까 난 모르는 일이라니까. 돈은, 그래 돈은 주겠네만.”
떨리는 손으로 장회장이 수표에 금액을 적었다.
“10억? 이야 회장님 목숨값이 그것밖에 안돼?
“뭐?”
“본인 몸값이 어느 정돈지 좀 생각하라고.”
은근히 쪼잔한 스케일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라고 김혁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한 생계비로 주는 ‘큰돈’도 정말 큰돈이 아닐 수 있고 그 돈에서 또 조만호가 중간에서 슬쩍해갔다면 그 가족들이 삼시세끼조차 먹기 힘든 게 당연했다.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 김혁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장회장이 눈치를 보며 대꾸했다.
“아무리 내가 회장이라도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은 한도가 있어. 그리고 이건 다 추적이 가능한데...아 내가 신고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가? 그럼 추적이 안 되는 현금으로 마련해주든가.”
“다 해주겠네. 하지만 지금 바로는 안돼. 시간을 줘야지.”
김혁은 잠시 고민했다. 유언장을 적게 하든 현금을 마련하게 하든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이왕 하루 늦춰줄 거면 합법적인 것으로 받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공식적으로 유산을 남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하지. 변호사 불러서 공증까지 마치는 걸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조만호 쪽에 보내던 돈이 얼마나 되지?”
“내가 무슨 돈을 보냈다고 자꾸.”
“뭐 누가 듣고 있을까봐 일부러 그러는 거야? 다 알고 왔어. 조만호 조직 식구들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아나? 이젠 하루아침에 가족들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지. 그 근방까지도 좀비가 퍼져 들어서 지금 난리도 아닌데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는 거야?”
“뭐? 좀비가 어떻게 됐다고?”
장회장은 정말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