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역사적인 순간
김혁은 조용히 대답했다.
“이제 곧 세상은 좀비들로 가득차고 핏물이 낭자한 아수라장으로 변할 거다. 그 모든 책임은 네가 져야지. 네가 거느린 조직이 아지트를 습격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사태는 막을 수 있었어.”
장회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 그건 조만호가 결정한 일이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 쪽 애들을 보내준 것뿐이야. 그런 일인 줄 몰랐다네. 정말이라네.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네만.”
“그럼 넌 뭐가 두려워서 여기 숨어 있는 건데?”
“그거야 차를 도둑맞기도 했고...”
장회장은 아지트로 간 마스크맨들로부터 아지트 조직원들을 전부 해치우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거였다. 누군가 복수하러 올까봐 여기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김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뭐 그런 건 내 알바 아니고. 중요한 건 죽은 조직원들이나 남겨진 가족들한테 보상을 좀 해야겠다는 말이지. 이미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고 어떻게 책임지는가를 봐야겠어.”
김혁의 이 말에는 장회장도 정색을 하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꾸했다. 좀 전까지 쩔쩔매던 태도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왜 그것까지 해야 하지? 난 그들이 일한 만큼을 늘 지불했는데. 난 그들을 공짜로 부린 게 아니란 말일세.”
“뭐 얼마나 했는데? 그들이 사는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차도 안 다니는 시골 구속에서 삼시세끼 챙겨 먹기도 힘들다고 하는데? 그 아지트는 또 어떻고. 그게 사람 사는 건가? 사람이 살게는 해줘야지.”
이 말을 하는 동안 김혁의 눈엔 아지트의 바람막이도 없는 벽들과 세트장 마을의 허름한 내부가 스쳐지나갔다.
“그거야, 조직 관리를 하는 사람 책임이지. 그걸 왜 나한테 그러나?”
“회장님께서는 정석대로 하시고 싶으시다? 좋아. 좀비바이러스를 연구시킨 게 너희 기업이라고 온 세상에 알려서 엄청난 배상금을 물게 하고 기업이 공중분해 되는 쪽을 바라나? 좀 쉽게 쉽게 가자고. 다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지?”
“대체 넌 누구길래, 모든 일이 다 잘 처리되고 있는데 누가 보냈지?”
“모든 일이 잘 처리되고 있다고? 세상이 좀비 천지가 되고 사람들이 다 죽어나가고 있는데 뭐가 다 잘 처리되고 있다는 거지? 지금 너만 안전하다고 다 잘 된 거라고 하는 거야?”
“네 말은 믿을 수 없어. 좀비 같은 건 본적도 없는데.”
장회장은 무턱대고 밀고 들어온 이 이상한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네. 진짜 좀비 우리에 처넣어 줘야 믿겠어? 조만호처럼 되고 싶나?”
“조사장이 어떻게 됐다고?”
“좀비가 됐지. 시뻘건 눈을 하고 사람 살을 뜯어 먹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는 걸. 음, 조만호한테 던져줘도 볼만하겠네. 지금쯤 엄청 배가 고플 텐데 뜯어먹을 게 많아서 당신을 엄청 좋아할 거야.”
김혁이 장회장의 뚱뚱한 몸을 훑으며 말하자 장회장은 소름이 끼치는지 몸을 움츠렸다.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왜. 어쩌다가.”
“데려가줄까? 눈으로 직접 봐야 믿겠다면 그렇게 하지.”
김혁이 팔로 장회장을 잡으려는 시늉을 하자 장회장은 몸을 더욱 움츠리며 소리쳤다.
“저리 가! 손치워!”
김혁은 몸을 바로 세워 똑바로 선 채 장회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나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 그냥 가겠어. 내일 다시 왔을 때는 새 유언장을 준비해 놓도록. 음, 좀비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 같은 거 하나 만드는 것도 좋겠네. 재벌들은 원래 재단 만드는 게 취미잖아?”
김혁이 침대 쪽에서 좀 멀어지자 장회장도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김혁은 혹시나 싶어 다른 경고도 잊지 않았다.
“총 든 사람 수십 명을 데려다 놔도 날 못 당하니까 꼼수 쓰지 말고. 우리 조용히 처리하자고. 기억해라. 난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고 언제든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존재란 걸.
음, 그 재단에는 당신 재산의 절반을 넣도록.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위한 특별 위로금도 준비하고,”
“아무리 그래도 재산의 반은... 회사는 내 개인의 것이 아니네. 회사에 딸린 식구들도 생각해야지.”
“퍽이나 위하는 척은. 그래서 반만 넣으라는 거야.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 뭐라는 거야? 전 재산을 다 헌납해도 모자랄 판에.”
김혁은 호텔방을 나서려다가 손에 여전히 들고 있던 총을 반으로 분질러 침대로 던졌다. 총알이 날아드는 것만큼이나 놀란 눈을 하고 장회장이 반으로 동강난 총을 바라봤다.
“아 그리고 만약 내일도 유언장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널 정말 조만호에게 먹히게 만들 테니 각오해라.”
김혁이 호텔방을 나올 때까지 장회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포의 냄새만 슬금슬금 김혁의 뒤로 따라나왔다. 문 앞에 쓰러진 경호원들은 여전히 그대로 꼼짝 않고 그 모양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김혁은 복도 끝까지 천천히 걸어가 cctv 사각지대인 모퉁이를 돌자마자 리스트를 꺼내 조만호 이름을 찍었다.
오두막 옆에 가져다 둔 차는 완벽한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차 트렁크에 갇힌 좀비들은 여전히 쌩쌩하게 차체를 두들기고 몸부림을 치며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좀비들은 잠도 안 자나? 김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트렁크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다시 봐도 무시무시한 몰골이었다. 중간에 있던 반쯤 뜯어먹혔던 운전사의 사체는 이제 뼈만 앙상했는데 그마저도 일부는 부러져 버리고 사람이었단 걸 알아내기 힘들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김혁은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이한태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지옥에 돌아가면 분명 악마가 난리를 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반응은 예상 이상이었다. 악마는 김혁을 보자마자 엄청나게 큰 시뻘건 불꽃들을 마구 마구 떨궈내며 난리를 쳐댔다. 김혁의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따끔따끔 쏟아져 내렸다. 참다 못해 김혁이 한 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김혁, 너 진짜, 너 진짜!!”
“내가 뭘?”
“넌 꼭 잘 하다가 한번씩 이상해진단 말이야. 그러지 좀 말라고.”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야단치려고 부른 거 아니잖아. 용건만 간단히.”
김혁은 악마가 뭐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건지 빨리 생각 낼 순 없었다. 다리를 다친 남자에게 지옥과 천국이 어쩌구 저쩌구 한 것 때문인가?
“이젠 하다 하다 삥도 뜯냐? 응? 응?”
“아, 아, 그거? 뭐 마을 사람들도 살게 해줘야지.”
악마는 손가락을 튕겨 김혁이 장회장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허공에 띄웠다. 김혁이 막 장회장과 수표책을 사이에 두고 금액을 쓰라고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게 누가 봐도 강도질이지. 저게. 협박에다가 강도짓에다가 대체 무슨 짓이야. 엉? 내 악마 생활 수천 년 동안 데리러 간 사람한테 삥 뜯는 저승사자는 본적도 없다.”
할 때는 몰랐는데 저렇게 두고 보니 좀 그래 보이는 면도 있었다.
“그거야... 좀비 사태도 수천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까 그렇지.”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정당치 못 하면 안 된다는 거 몰라? 이제 그런 건 알 때도 되지 않았어? 40년 동안 대체 뭘 한 거야? 생각이 많은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던 거야?”
“나도 알아. 안다구.”
“근데?”
“글쎄, 요즘 들어 책임이라는 게 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돼서 말야.”
“그래서?”
“저 사람의 죄는 지옥에서 묻겠지만 피해 입은 사람들은 상실감밖엔 떠안을 게 없잖아. 어차피 죽으면 쓰지도 못할 돈 좀 나눠주고 오면 저 사람은 위인 대접 받고 좀 좋아?”
“뭐라고?”
“생각해봐. 죽을 때 유산의 반을 기부하고 좀비 피해자를 위해 써주십사, 그러는 부자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부자라고 두고 두고 기리지 않을까? 사실은 천하의 못된 악당인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김혁은 좀 혼이나고, 장회장은 지옥불에 들어가고 게임 오버. 뭐가 문제야?”
악마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렁슬렁 리듬을 타다가 정신을 차리고 슬며시 김혁을 째려봤다. 악마의 침묵으로 김혁은 묘한 기분이 됐다. 여태껏 40년 동안 악마의 말문을 막히게 하기 위해서 그토록 애써왔건만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악마가 말문이 막혔다. 으하하하. 김혁이 속으로 웃고 있는 걸 이미 아는 악마는 한숨을 쉬곤 대꾸했다.
“아, 진짜 너는, 너는...!”
악마는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는데다 불꽃은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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