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화 악마의 용건
김혁은 그 틈에 얼른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바빠 죽겠는데 왜 오라고 한 건데? 지금도 저기선 좀비들이 마구마구 생겨나고 있는데 우리 꼬꼬마들만 남겨놓고 온 게 걸린다고. 빨리 돌아가야 해.”
악마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혼잣말하듯 했다.
“후, 내가 널 잘못 본 게 아니길 바라야지..."
이번엔 악마가 진 게 분명하단 생각에 김혁은 미소 짓고 있었고 악마는 조그만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로 저런 일은 다신 용서 못해.”
“네 악마님!!”
김혁이 민하진 흉내를 내며 과장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푸히힛, 너 그거 하진이 흉내내는 거냐? 우헤헤헤!”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린 악마 때문에 김혁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 정도로 웃긴가? 화를 내다 못해 기운도 없어 보이는 악마가 가엾어서 좀 장난스럽게 해본 것 뿐인데 예상치 못하게 악마는 엄청나게 요란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씨뻘건 덩어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더니 몸을 폭죽처럼 터뜨리며 요란하게 계속 웃어댄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자신이 민하진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할 때 하진이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여전히 무엇 때문에 웃긴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가끔은 입장 바꾸기를 해봐야 뭔가 이해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민하진의 기분을 이해하는 동시에 과도하게 길어지는 악마의 웃음에는 슬며시 짜증이 치밀었다.
“아 진짜 기껏 오라고 해놓고 이럴 거야?”
김혁이 짜증을 담아 말을 마치고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 악마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음음 그래, 그렇지. 왜 오라고 했냐면 좀비로 말뚝 박고 이동하는 게 꼴사납기도 하고 불쌍해서 말이지. 새 리스트를 만들어주려고 오라고 했어.”
“새 리스트?”
“지금까진 생각보다 잘들 하고 있어. 속력만 조금 높인다면 어쩜 좀비가 더 많이 확산되진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게 될까? 난 오히려 좀비가 온 세상을 뒤덮어버릴까 봐 걱정인데.”
“너희들이라면 할 수 있어. 희망을 가져. 인간만 희망이 필요한 게 아니야.”
“뭐?”
악마는 김혁이 넘버쓰리에게 했던 말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중인 듯 했다. 악마는 여기서 저승사자들의 활동을 다 볼 수 있었다.
“저승사자도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아니 내일을 맞이하는 모든 존재는 희망이 필요해.”
“그거야 뭐 그렇긴 하지.”
“리스트 꺼내봐. 빨리.”
김혁이 리스트를 꺼내자 리스트는 어느새 한면이 전부 빡빡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직 데려오지 못한 4명을 제외하고 비어 있던 여백을 메운 건 전국 곳곳의 지명들이었다.
“전국 사방팔방 모두 닿도록 조치해놨지. 나 잘했지? 히히힛.”
“고맙네. 그렇잖아도 이동하는데 너무 시간을 많이 써서 걱정이었는데.”
“나만큼 너희들을 생각하는 존재가 또 있는 줄 알아?”
생색은, 김혁은 리스트를 보다가 이은현이란 이름에 눈길이 갔다. 이른 밤에 잠들어 있던 그 여자.
“그런데 이 이은현이란 여자는 무슨 죄를 지었지?”
“응? 그 여자는 연구계의 조만호야.”
“뭐?”
“장회장 회사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사람인데 미래 연구소에 스파이까지 심어서 직원들을 암암리에 관리했지. 연구원들이 사라지는 것도 다 그 여자가 관련돼 있고. 연구소에서 지하동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은 다 내쫓거나 더 심한 짓도 했거든. 괴롭히고 미행하고 사고 일으키고. 딱 조만호가 하는 일을 한 거지.”
“그럼 유지성도 이 여자가?”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너무한다는 생각을 하며 김혁이 되물었다.
“유지성이야 그렇다쳐도 다른 연구원들은 왜 그렇게까지 했지? 어차피 안다고 뭘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도 아닌데.”
“비밀 엄수는 그렇게 무서운 거지. 너희들도 좀 조심 좀 해. 내가 볼 때마다 아주 조마조마하다니까?”
“조심하고 있잖아. 비밀요원이니 뭐니 생쑈까지 해가면서 애쓰는 거 안 보여?”
“천국이니 지옥이니 이런 말 하면 멋있어 보여서 그런 말을 해대는 거야?
남자에게 늘어놓은 말을 핀잔하고 있다. 역시 잔소리가 없을 순 없겠지.
“그럼 그 남자가 잘못한 선택을 하게 둬야 해?”
“다른 설득의 기술을 쓰라고.”
“그냥 지옥으로 확 보내버릴 걸 그랬나?”
“으이구!”
악마는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김혁에게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았다. 지난 40년 동안 이런 대화들을 수도 없이 나눴으니까. 김혁 역시 알고 있었다. 이런 틈에 얼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참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지? 왜 좀비가 된 건데?”
김혁은 넘버쓰리의 아내가 왜 좀비가 됐는지를 물었다.
“아 그 미인? 좀비가 되기 직전엔 말이야. 사람들이 본심을 드러내. 아무래도 뇌세포가 공격을 받아서 그런지 지적 능력도 퇴화하는 것 같고. 기본 욕구만 강해지기도 하고.”
그 여자가 좀비가 되기 직전에 내뱉은 독설은 본심일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일단은 좀비가 된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거랑 뭔 상관인데? 좀비가 된 삼인조랑 마주쳤던 거야?”
“지금 말해주려고 하잖아. 성격 급한 건 하여간. 그 여자가 장을 보러 가서 삼인조를 딱 마주쳤지. 여자는 같은 조직 사람이니까 친절하게 대해준 것뿐인데 그 중에 그 여자한테 전부터 흑심을 품고 있었던 녀석이 있었던 거야. 시간상으로 그들은 거의 좀비가 되기 직전이었다고. 그 녀석이 다짜고짜 달겨들어가지고 여자한테 키스해버렸어.”
“뭐? 누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김혁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 팔 다친 녀석. 학준가 뭔가 하는 놈. 짱돌 옆에 앉아 있었다고 난리쳤잖아 왜.”
그는 차에서 짱돌 애인을 두고 그런 여자는 트럭으로 갖다 줘도 안 갖겠다고 큰소리쳤었다. 초록색 오라를 가진 짱돌 애인과 비교하면 넘버쓰리의 아내가 훨씬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뭐야 그게. 문 것도 아니고 키스를 했다고?”
“여자는 남자가 팔을 다친 걸 보고 다정하게 안부를 물으려다가 봉변을 당한 거지. 안타까운 일이야. 더구나 그런 일을 다친 남편한테 가서 말할 수도 없었고, 차라리 물렸다면 나 오늘 이러이러 해서 이랬어요 이상한 일이죠? 할 순 있었겠지만 키스했다고 말하기엔 여자 입장도 난처했을 거야.”
여자는 아픈 남편의 조직 사람이니 일이 커질 걸 염려해서 비밀로 묻어두려 했을 것이다.
“그 남편도 감염됐어? 좀비가 되나?”
“미리 알면 뭐가 좀 나아? 가서 보면 알 텐데. 근데 말야,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앉아서 천리를 보시는 분께서 뭐가 궁금하실까?”
“아 여기랑 거긴 너무 멀어서 늬들 속마음까진 안 보이는 거 알잖아.”
“남의 속마음 맘대로 읽는 게 좋은 거냐?”
“내 맘대로 안되는 걸 어쩌냐고. 암튼 그래서 물어볼게.”
“아 뭘 물어볼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데?”
“저기 말이야.”
악마가 양쪽 검지를 맞부딫쳐가며 김혁의 눈치를 살살 본다. 쉽사리 질문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혁은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저런 모습은 늘 뭔가 미안한 일이 있을 때 보이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아 빨리 말해. 답답해 죽겠네.”
김혁이 갑자기 소리를 꽥 질러대자 악마가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아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냐? 그러니까 하진이가 더 좋아 은정이가 더 좋아?”
“뭐?”
순간적으로 김혁은 멍해졌다. 예상치 못한 질문, 좀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저런 게 왜 궁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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